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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Aug 16. 2023

09 대학실패, 인생대학 합격

그 당시 지독한 열등감에 사로 잡히곤 했다. 친구 중에는 이름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친구도 더러 있었다중학교 때까지는 서로 비슷하게 공부를 잘했었는데. 오갈 데 없는 고아처럼 서울의 한 신문보급소에서 새벽마다 신문을 돌리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나침반도 없이 항해하는 돛단배처처럼 작은 바람에도 늘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과거만, 현실만 탓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서울대 체육교육과를 목표로 정했다. 그래야 상처 난 자존심과 열등감에서 조금은 헤어 나올 것 같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등학교 때 '국가대표'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뛰어난(?) 핸드볼 선수였고, 나름 운동신경이 뛰어났기 때문에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신문배달이 끝나자마자 씻고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곧바로 전철을 타고 서율역 부근에 있는 학원으로 향했다. 국어, 영어, 수학을 듣고 학원자습실에 남아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그러나 새벽 일찍 일어나 5시간 동안을 달리고 공부하려니 몸과 마음이 늘 따로였다. 수업시간에 졸기 일쑤였고, 전찰 안에서도 잠이 들어 학원을 지나치거나 되돌아올 때 종점인 의정부까지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11월에 원서를 접수하고 학교룰 둘러보니 마음은 이미 합격이라도 한 듯 기분이 좋았다. 잠시 현실을 잊고 행복의 꿈을 꾸는 신데렐라처럼.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학력고사 점수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역부족이었다. 의욕만으로, 정신력만으로 한계가 있었다. 나는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였다.  


2년간의 신문배달과 대학진학을 위한 사투도 보람 없이 끝나고 한번 연기했던 군에 입대해야 했다. 

형이 먼저 입대해 있었기에 1년 사이로 아들 둘이 입대하는 것이어서 부모님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1988. 5. 17. 온갖 회한을 뒤로하고 입소한 논란훈련소  29 연대 무적 7중대.  워낙 손재주가 없어서 총검 분해 조립은 항상 늦었다. 제식훈련, 각개전투, 화생방훈련에 이어졌다. 10분간의 휴식 시간에 피우는 한 모금의 담배향기는 모든 힘듦을 날리고도 남았다. 

훈련 마지막이었던 50킬로미터 행군은 지옥이었다. 출발하려는데 비가 슬슬 내리기 시작했다. 그 뜨거운 여름날 판초우의(비옷)를 걸치고 배낭에 건빵과 양말 등을 몇 개씩 챙겨 넣었다. 비가 점점 거세게 내려 군화 속의 양말까지 흠뻑 젖었고, 여분의 양말, 건빵도 모두 비의 먹잇감이 되어 버렸다. 비만 신나고 행복해 보였다. 정신없이 걷는 사이 어둠이 밀려왔고 반환점인 산정상을 앞에 뒀다. 완전군장을 한 데다가 비로 온몸이 젖어 한 발도 한발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비몽사몽 고개를 올라가던 중 나도 모르게 골짝으로 굴러 떨어졌다. 어딘가를 심하게 부딪힌 것 같았는데 아픈 데가 없었다. 마치 꿈속에서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멀쩡한 것처럼. 나를 본 조교가 잽싸게 쫓아와 싸다구를 갈기며 여기서 낙오할 거냐고 거칠게 몰아붙였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를 복창하고 일어서는데 조교가 외쳤다. '자 지금부터 노래일발 장전, 노래는 어머님의 은혜, 발사. 노래를 시작하기도 전에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 실 때 괴롬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 오생 하시내....., 어느새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마치 보약을 먹은 듯 다시 힘이 났다. 그렇게 행군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보니 발바닥 전체가 잔뜩 부풀어 오르고 부르터 있었다. 이어지는 10킬로미터 구보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수료하던 날. 그동안 익힌 총검술, 제식동작을 부모님들께 보여드렸다. 논산훈련소 연병장에 복사한 듯 검게 그을린 얼굴의 진짜사나이 700명이 같은 동작, 같은 기합, 같은 마음으로 각도 있게 제식동작을 진행했다. 마지막 순서 '부모님께 받들어 총'과 함께 훈련소가 떠나갈 듯 박수갈채가 터졌다. 아버지 어머니가 오셨다. 어둠 속의 반딧불처럼 이리저리 부모님을 찾았다. 혹시 안 오신 걸까. 분명히 오신다고 했었는데. 한참 만에야 겨우 나의 아버지, 어머니를 봤다. 어머니는 벌써부터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나오려는 눈물이 쏙 들어가도록 큰 소리로 '충성'을 외쳤다. 

   

잠깐 동안의 면회를 뒤로하고 후반기교육을 받으러 야간열차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아무리 쳐다봐도 컴컴한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마치 내 미래 같다는 생각에 우울했다. 아직 운전면허증도 없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탱크를 몰았다. '하면 되고 안 하면 안 된다'는 그때부터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해보지 않고서는 아무로 성공 여부를 알 수 없다. 밤새 잠을 못 자고 걱정했던 일들이 그다음 날 맞닥뜨려 보면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후반기 교육이 끝나고  행정병으로 착출 되었다. 군대는 줄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대배치를 받던 날. 더블백을 메고 나를 데리러 온 상병 선임을 따라가는 도중 충혼탑에 이르렀다. 선임이 갑자기  ’오늘 참 별 멋지다. JO일병 별 보이나? 

이렇게 날이 맑은 대낮에 별이라니....'미쳤나 보네, 이 양반이'. ‘안 보입니다.’라고 거칠게 외쳤다. 순간 선임의 손바닥이 내 앞에서 불을 뿜었다. 그때서야 내 얼굴 앞에 별이 보였다. 

‘선임이 있다면 있는 거지. 야 이거 봐라, 아직 사회물이 덜 빠졌구먼.’

곧이어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뒤로 기어’가 반복됐다. 총혼탑을 몇 바퀴 돌았다. 갑자기 정전이 된 듯 정신이 아찔했다. 뭔가 생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대 앞에 도착할 때까지 기갑가를 불렀다. '이하늘 이 땅에 푸른 정기로 기운찬 우리 기갑 하늘로 뻗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군기가 잔뜩 든 채 이윽고 도착한 내무반. 자대배치 신고 연습을 하는데 얼마나 고함을 질러댔는지 몇 번 만에 목이 쇘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른 적은 처음이었다. ‘신고합니다. 이병 JO는 8월 7일 자로 자대배치를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그래도 목소리가 작다고, 군기가 덜 들었다고 쪼그려 뛰기가 이어졌고, 그날 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그때 내무반에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병장 두 명이 산신령처럼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전라도, 한 명은 경상도 사나이들이었다. 자대배치받은 신병은 한 달 동안은 모든 것에서 열외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TV 앞에 앉아 대기하는 게 전부였다. 

전역을 앞둔 병장들은 나를 웃기려고 갖은 수를 썼다. 당시 '동작 그만'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였는데 병장들과 함께 보면서 웃음을 참기란 불가능했다. 그때마다 내무반의 군기를 담당하는 상병 사령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고 행여 살며시 웃기라도 할라치면 그날 밤은 신병이 군기가 빠졌다며 어김없이 집합이 이어졌다.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갔다. 드디어 나도 식기 당번이라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일병이 되어 내무반 청소 등 궂은일을 도맡게 되었으며 상병이 되어서는 내무반 기율을 담당했다. 

그 당시 월급은 4,000원 정도였다. 보너스가 나오는 달이면 7,500원 정도. 그 정도면 충분했다. 신문배달할 때처럼 가불을 하지 않아도 되어 행복했다. 부러울 것이 없었다. 밤 10시. 사무실 선임이 피엑스에서 깻잎 캔을 하나 사 오라고 하더니 나를 데리고 사무실로 갔다. 선임은 능숙하게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끓이더니 그 속에 미리 준비해 놓은 라면 네 개를 마구 밀어 넣었다.  이게 다 들어갈까? 잠시 후 쟁반에 커피포트에 든 라면을 쏟아부었다. 내 눈에 라면이 살아 있는 듯 보였다. 선임이 어디선가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침이 꿀꺽, 조금 더 지체하면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태어나서 그렇게 맛있는 라면은 처음이었다. 인생 라면에 소주 한잔이었다. 


국방부 시계는 생각보다 빨랐다. 병장으로 진급하여 2개월 후 내무반장이 되었다. 어깨에 견장이 채워졌다. 내무반 침상에서 흰 양말을 신어보고, 편하게 누워보고 싶은 소원이 그제야 이루어졌다. 몸은 편해졌지만 한 중대의 내무반을 이끈다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가끔씩 졸병들이 보이지 않을 때  불안했다. 아무 일 없어야 될 텐데. 군대는 인생의 축소판이었고 참으로 고마운 시간들이었다. 적어도 한 번은. 아버지가 8년을 복무했다고 하셨다. 나는 30개월, 큰 놈 20개월, 작은놈 19개월, 집안에 별이 수두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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