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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세준 Jan 26. 2018

엄마의 이름

나는 엄마의 세상에 대한 마침표

마흔아홉의 우리 엄마. 스무 살의 결혼해 형을 낳고, 스물셋에 나를 낳았다. 엄마는 항상 내 세상의 시작이었다. 소리 내는 법, 웃는 법, 밥 먹는 법 등 세상의 모든 것을 그녀로부터 배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엄마의 세상에 대한 마침표였다. 엄마는 나를 마지막으로 영영 이름을 지웠다. 엄마의 이름 대신 '세준 엄마'로 살았다. 좋아하는 화장과 네일아트는 하지 못하게 됐다. 그 모든 것은 오롯이 나 때문이었다. 철이 없던 시절, 엄마의 아기 때 모습, 결혼 무렵의 모습이 남아 있는 앨범을 뒤적거리며, 나는


엄마는 왜, 밥만 해? 엄마 꿈은 뭐였어?


라고 물었다.


없긴... 많았지. 그래도 엄마니까.


29년 간 엄마로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한 것은 '밥 짓기'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엄마의 밥을 먹었고, 대학 졸업하고 독립하기 전까지 엄마는 매일 따끈한 밥을 지었다. 명절 때면 전을 부치며 제사상을 차렸고, 소풍날에는 내가 좋아하는 소시지볶음과 장조림 등이 가득 들어 있는 도시락을 쌌다. 한 번은 엄마의 레시피대로 김치볶음밥을 해서 혼자 먹은 적이 있었다. 엄마가 해준 것과는 미묘하게 맛이 달랐다. 그 이유를 엄마에게 물으니


사랑이 빠져서


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엄마가 해준 밥을 통해 사랑을 배웠다. 언젠가 추운 겨울 엄마는 붕어빵을 사들고 귀가했다. 뜨거운 붕어빵을 반으로 쪼개 호호 불며 먹는 나를 엄마는 그저 지켜만 봤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 붕어빵집에서 쓰는 포장지였다. 입천장이 데일만큼 뜨거운 팥이 들어있었다. 팥을 둘러싸고 있는 빵은 쫀득쫀득했고, 맛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먹어버렸는데 엄마는 아직도 붕어빵을 들고만 있었다. 더 먹을 거냐고 묻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더니 그제야 엄마도 먹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나는 축구를 했다. 학교에서 정식으로 축구부로 들어오길 제안했고 나는 동의했다. 처음 감독과 대면하여 유니폼 제작부터 합숙 생활, 그로 인해 발생되는 비용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지 나는 몰랐다. 엄마는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계속할 거라고, 열심히 하면 되지 않냐, 고 우겨댔다. 엄마는 또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축구를 포기했다. 그 뒤 엄마는 축구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 티브이에서 축구 국가대표 친선 경기나 월드컵 때도 엄마는 보지 않았다. 축구를 보며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에 엄마는 외로웠다. 


엄마는 자신의 이름을 부끄러워 


했다. 이름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낯간지러운 칭찬을 듣는 느낌이라고 했다. 여태 엄마는 이름 대신 온갖 호칭으로 불렸다. 나는 일부러 더 놀릴 심산으로 엄마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 말라며 손사래 치는 엄마의 웃는 모습을 보며 엄마에게도 강인함만 있다는 것이 아님을 나는 깨달았다. 나도 살면서 거의 처음 불러봤다. 결혼 전에는 무수히 많이 불렸을 엄마의 예쁜 이름.    


이제라도 엄마의 그 예쁜 이름 

많이 불러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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