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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세준 Aug 24. 2018

다시, 사람을 생각하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 삑, 삑, 삑 ㅡ 띠리리리


나는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다. 타 지역으로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어 가끔 부모님 집에 가곤 한다. 갈 때마다 화분의 위치와 종류가 바뀌고, 책상이 없어지고, 식탁보가 바뀐다. 엄마의 기분 따라 집안의 물건이 사라지고 새로 생기고, 바뀌고 한다. 그러나 바뀌지 않는 건 현관문 비밀번호다. 엄마가 몇 년째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비록 이 집에서 떠났지만, 자발적으로 언제든 다시 와서 편하게 쉴 장소를 내주는 것이다. 내 장소가 있음을 알려주는 행위이다. 엄마는 집안의 각종 물건을 건드려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 중에 하나가 또 있는데, 바로 '내 방'이다. 이를 통해 나는 그곳에 없지만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는다.(그저 가족이라서?)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인간과 사람은 다르다, 고 김현경은 말한다. 대화할 때, 글을 쓸 때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굳이 인간과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다. 차이를 못 느끼겠으며 어떤 단어를 써도 의미는 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현경은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라며 사람의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중략)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P.31

개인과 개인이 서로 이름을 부르고 존중하며 더 나아가 환대하여 자리를 마련해줄 때, 비로소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장소/자리를 갖는다는 뜻이다. 손님이 당신의 집을 찾아왔을 때, 그 사람을 현관문에 그대로 세워두는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앉을자리를 내주는 행위는 그 손님을 사람으로서 대접하는 것이다. 환대받지 못하여 사회에 내 자리가 없는, 사회 바깥에 있는 사람, 즉 존재를 부정당한 이는 사람이 아니다.   


너, 거기 있니?


늦은 시간. 지하철 막차를 탔다. 칸에는 할머니와 휴가 나온 군인이 있다. 할머니가 혼잣말을 (크게) 한다. "어휴, 사람이 나밖에 없네"라고. 군 복무 시절 우스갯소리로 떠돌던 소리다. 한마디로 '군인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번쯤 군인이었던 사람, 지금 군인인 사람은 들어봤을 이야기다. 그러나 그저 유머가 아니다. 저자 김현경도 같은 맥락에서 군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군인이 되는 순간 시민권의 정지를 경험한다. 헌법의 적용 바깥에서, 잘못을 저질렀을 때 형법이 아닌 군법으로 처벌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환대할(받을) 권리도 박탈당한다. 환대할 권리와 받을 권리는 사람의 권리이다. 군인은 민간인과의 접촉은 불가하며, 누군가를 환대할 권리조차 없다. 이는 그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입소와 동시에 모든 행동과 말은 통제된다. 내 물건도 사용하지 못한다. 당연히 내 공간도 없다. 신체적, 도덕적으로 수치심을 유발하는 관행들, 특정한 자세와 동작의 강요, 체벌과 조롱, 엄격한 규율, 상급자에 대한 복종... 더 이상 나는 내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훈련이라는 합리성을 부여받고 있긴 하지만,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이다. 이외에도 김현경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태아), 노예, 사형수 들도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 : 장애인

무릎을 꿇었다. 2017년 9월, 장애 아동을 둔 학부모들이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를 짓게 해달라는 것이 이들의 요구였다. 어떤 욕도 모욕도 참을 수 있으니 내 자식들이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달라, 고 장애아동의 학부모들은 소리쳤다. 작년 4월 기준, 서울시 기준으로 특수교육 대상자 수는 1만 2천여 명, 하지만 이들의 절반도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저자 김현경이 주장한 태아, 노예, 사형수에 더해 장애인을 추가하고 싶다. 이들은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가 없다. 비장애인은 장애인들을 사회 바깥으로 내몰았다. 여기는 우리 사회이니 물 흐리지 말고, 시설로 가! 라며 사회 속으로 환대하지 않았다. 


정신병원에서 실습한 적이 있었다. 병원은 정신장애인들에게 정해진 시간에만 바깥 하늘을 보고 공기를 맡을 수 있게 했다. 병동을 드나들 때 마스터 키는 필수였다. 철문을 항상 잠그고 손잡이를 돌려 또 한 번 확인했다. 간호사는 그들에게 약을 먹이고 입 속을 보며 확인했다. 혀 밑까지 꼼꼼히. 극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던 한 환자와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잘못한 것 없는데, 왜 가두냐"며 억울함과 분노가 느껴졌다. 바로 우리가 잘못한 것 없는 이들을 가두고 있었다. 자유를 빼앗고, 획일적으로 환자복을 입히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주고 '미쳤다'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스스로 만든 게 아니다. 손가락이 그들을 향하고, 시설로 가라며 등떠민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다. 우리가 그들을 환대하지 않았다.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물건으로 전락했다. 특히 선거철 정치인의 통과의례처럼 자주 보이는 행위는 장애인을 '사용'하는 것이다. 움직이지 못해 누워 있는 신체장애인을 욕조에 두고 목욕을 시켜주는 척하며, 반나체로 있는 장애인의 모습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선'을 베풀고 있는 것으로 포장돼 언론매체에 소개된다. 장애인이 물건이기 때문에 그들의 인격은 사라졌기 때문에 가능하다. 요양원에서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게 턱받이를 하고 밥을 떠먹여 주는 정치인(이런 사람이 지난 대선 후보로 거론됐다)까지 장애인과 사회 약자들을 '사용'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또 다른 사용법이 있다. 살인 사건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정신장애' 경력이다. 정신장애가 있어 살인을 저질렀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는데, 언론은 이를 활용한다. 그들을 사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방법은 비장애인에게 불안과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비장애인은 정신장애인을 두려운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들은 계속해서 시설에 격리되어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실제 통계만 보더라도, 강력 범죄 중 정신장애인이 저지른 횟수가 비장애인의 횟수의 절반도 채 안된다. 그러나 이는 쉽게 무시된다. 누구도 얘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을 대신해서 나서 줄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자리를 주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딸린 권리들을 준다는 것이다. 또는 권리를 주장할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환대 받음을 통해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권리를 갖게 된다. 적대를 거두어들이고 그들에게 접근을 허락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절대적 환대가 현재 우리에게 필요하다. 데리다가 주장한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환대를 가리킨다. 데리다조차 이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데리다는 "그 타자가 당신에게서 가정이나 지배력을 빼앗는다 해도,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것이 무조건적 환대의 조건"이라면서, 내 공간, 가정의 지배력을 포기하는 게 절대적 환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김현경은 반박한다. 환대는 단순히 외부인을 맞이하는 문제, 내 경계선을 개방하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환대는 '주인'과 '손님'이라는 프레임에 갇힌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가? 


절대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이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 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 고 김현경은 말한다. 이로써 절대적 환대의 모든 조건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너'와 '내'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환대하는 것,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경하고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정상이라는 기준을 세워두고 그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배척해버리는 행위를 배척하는 것, 이러한 요소들이 비로소 모였을 때 사람 냄새나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장애인 인권과 권리의 문제, 난민 수용과 같이 일련의 사회적 사건들이 터져 나올 때마다 사람에 대해, 자리/장소에 대해, 그리고 절대적 환대에 대해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생각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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