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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세준 Nov 30. 2021

방마다 물컵이 있어요

자가 증식하는 물컵과 귀찮음에 대하여

일회용 페트병으로 물을 마시는 것은 편리함을 가져다준다. 500ml 생수병을 주문하면 하루도 안돼서 배달을 받을 수 있고, 어디든 편하게 들고 다니면서 마실 수 있으며 다 마신 후 그것들만 모은 후 버리면 된다. 한 번에 다 마실 수 없는 경우에는 유성매직으로 생수병 뚜껑에 이름을 써서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다른 가족이 마시는 생수병과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하루에 2병 이상은 기본으로 마시는데 그 결과 쓰레기가 장난이 아니다. 나만 마시는 게 아니라 다른 가족의 페트병을 합치면 어마어마하다. 이틀에 한 번은 페트병을 버리러 분리수거장에 가야 할 정도이다. 이는 환경에도 엄청난 피해를 주고, 분리쓰레기를 담당하는 가족(나)에게도 크나큰 귀찮음을 가져온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나는 정수기 설치를 제안했다. 명분은 나의 귀찮음이 아니라 당연히 '환경오염'이었다. 스웨덴의 유명한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처럼 나는 강하게 주장했다. 또한 조만간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도 정수기가 필요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어필했다. 다행히 와이프도 정수기를 설치하는 것에 흔쾌히 동의하였고, 꼼꼼히 따져보고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요새는 정수기도 잘 나와서 필터 교체하는 것도 간편하고, 비용도 합리적인 것이 많았다. 그래서 몇 군데 비교해보고 구입했고, 설치 기사분이 오셔서 깔끔하게 설치를 해주셨다. 


정수기를 설치해서 일회용 페트병은 더 이상 구입하지 않아도 됐고, 당연히 쓰레기도 발생하지 않아 버리러 가는 수고로움도 사라졌다. 하지만 방심하는 순간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정수기는 움직이지 않는다. 정수기에는 발이 달려 있지 않아 한 자리에 그대로 오매불망 물을 뱉을 준비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누가 움직여야 하는가. 바로 물을 마시고 싶은 사람이 움직이게 된다. 물을 마시고 싶은 사람이 이제는 컵을 들고 정수기로 향한다. 컵에 물을 받고 한 모금 마시면서 걷는다. A방으로 간다. 영양제를 손에 덜어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신다. 컵은? 그대로 거기에 둔다. 


그러다 B방으로 와서 시간을 보내다가 목이 말라 주방으로 가서 새로운 컵을 꺼내 정수기로 향한다(A방에 있는 컵은 내 머리에서 잊은 지 오래다). 물을 한 컵 시원하게 마신다. 컵은? 식탁 위에 올려둔다. 그리고 다시 다른 일을 하다가 목이 말라 주방으로 향한다. 식탁 위에 있는 컵을 보고 이거 누구 컵이야, 하고 묻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내 컵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럼 나는 또 새로운 컵을 꺼내 정수기로 향한다. 물을 마신다. B방으로 들고 들어온다. 컵은? B방 책상 위에 올려둔다. 


밥 먹을 시간이 돼서 B방에 있던 나를 부르면 나는 주방으로 나간다. 밥을 먹는다. 목이 마르지만 내가 쓰던 컵을 찾을 수가 없다. 또 새로운 컵을 꺼내 물을 따르고 목이 마를 때마다 마신다. 이때쯤이면 물컵의 카오스 시대다. 밥을 먹고 식기세척기를 작동시키고 난 후 여러 방에 놓여 있는, 자가 증식한 것처럼 보이는 컵들이 보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식기세척기는 이미 돌아가고 있는 중이고 설거지는 귀찮으니 내일 씻어야지. 마치 무한 루프에 빠진 것처럼 매일 반복되고 있다. 찬장에 있던 컵은 어느새 비어 가고 각 방에 줄지어 있는 컵들을 보면 웃기기도 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페트병 분리수거하러 나가는 것도 귀찮았는데 이제는 정수기로 가는 것조차 귀찮고(왜 이렇게 귀찮은 게 많은지), 그래서 방마다 컵을 전용으로 두게 되고, 새로운 컵을 들고 방에 들어와보면 컵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어쩔 줄 몰라하고, 또 이 컵이 내 건지, 저 컵이 내 건지 알 수 없고, 이 방 저 방에 있는 컵들을 보면 정수기를 설치한 게 잘한 일인지 의문이 들지만, 환경을 생각하면 유리컵 여러 개 쓰는 게 더 좋은 게 아닐까, 합리화하며 또 새로운 컵을 꺼내 물을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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