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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세준 Dec 05. 2021

입만 봐도 알아요

네가 누굴 닮았을지

"그놈의 입 좀..."


나는 하루에 한 번, 통과의례처럼 듣는 소리가 있다. 와이프한테도, 직장에서 동료한테도 내 입은 화두이다. 입의 모양 때문이 아니라 '입만 살았기' 때문이다. 장난기가 많아 머릿속에 수백 가지의 장난 리스트가 있는 나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거기다 말도 많아서 저런 소리를 매일 듣는다. 장난을 치지 않으면 내 삶의 존재 이유가 없는 것처럼, 내 삶의 원동력이랄까. 하루에 한 번 장난을 치지 않고 수다를 떨지 않으면 좀이 쑤신다. 


와이프는 그런 장난을 벌써 9년째 감내하고 있다. 이제는 질릴 법도 한데 나는 새로운 장난을 개발하고 기획하고 실천해서 등짝 스매싱을 맞아야 끝난다. 나는 남자인 친구들하고 약속을 잡아도 술을 마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입을 '털러' 가는 게 목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술집보다는 따스한 오후에 친구들을 만나 카페에 앉아서 떠드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렇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하고 집에 돌아오면서 귀가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잘 들어가라, 는 안부 인사와 함께 몇 분 간의 수다를 더 떨고 나면, 어느새 목은 쉬어서 제 목소리가 안 나오게 되는데, 와이프는 또 한숨을 크게 내쉰다. 술을 많이 먹지 않아도 어떻게 몇 시간을 앉아서 목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떠들다 올 수 있는지 전혀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을 지으며. 예전에는 귀가가 조금 늦어지면 와이프는 술 그만 먹고 들어와, 라는 명령을 했는데, 나는 술을 많이 먹지 않고 취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수다로 인해 귀가가 늦어지는 것을 알게 된 와이프는 이제는 그만 떠들고 집에 와, 로 바뀌었다.


며칠 전, 임신한 와이프와 함께 병원으로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갔다. 코로나19 때문에 원래는 와이프 혼자 병원에 들어가서 검사를 받고 나왔는데, 11월부터 보호자 1명도 입장이 가능해져서 임신 7개월 만에 처음으로 산부인과라는 곳을 들어가 보았다. 임산부 당뇨검사를 하고 초음파로 우리 아기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처음 보았다. 지난번 방문 때도 입체 초음파를 했지만 아기가 팔로 얼굴을 감싸고 가리고 있어서 제대로 된 얼굴을 못 봤기 때문에 이번엔 기대를 하고 초음파실로 들어갔다. 


아기의 심장이 잘 뛰고 있는지 내장이 잘 있는지 먼저 확인을 하고 초음파 기계는 아기의 얼굴로 향했다. 누굴 닮았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아기는 쉽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도 당황하여 와이프의 배를 흔들어보고 기계로도 흔들어보고, 쉐낏 쉐낏 해보았지만 아기는 여전히 밀당 중이었다. 거의 30분은 넘게 의사 선생님도 우리에게 아기의 얼굴을 보여주려고 열심히 사진을 찍고 하셨지만 전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얼굴의 반 정도는 볼 수 있었는데 입은 보였다. 팔로 얼굴은 가릴지언정 입은 가리지 않는, 입만은 가리지 않겠다는 그 결의가 참으로 기특했다. 


의사 선생님이 여기는 이마, 코, 입 이라며 하나 둘 찍으면서 친절히 설명을 해주시며 보여주었다. 의사 선생님이 여기는 입이고요, 하는 순간 나와 와이프는 동시에 어? 어잉? 하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 웃었다. 아마 아기가 뱃속에 있는 부부라면 모두 궁금해하는 포인트가 아기는 누구 닮았을까, 일 텐데 현재 초음파상으로 보이는 모습을 봐서는 일단 입은 나를 닮았다. 너무 똑같다. 내가 봐도 똑같다. 검사를 받고 병원 로비에 앉아 대기를 하는 중에 초음파 사진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와이프는 슬픈 표정이었다. 얘도 시끄러울라나? 저 입으로 엄청난 양의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치겠지? 하는 와이프의 모습을 보며, 미래에 아기가 크고 나는 좀 더 나이를 먹었을 때도 변함없이 와이프에게 장난을 치고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을 상상했다. 

 

저, 저저저, 무한 수다 폭격기가 될 입 좀 보시게


그리고 나는 입을 쑥 내밀어 아기의 입모양을 따라하며 나 닮았지? 나 닮았어! 하다 한 대 맞고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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