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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월 Jun 03. 2024

길을 비켜 주세요

도를 아십니까?

"영혼이 참 맑으십니다. 좋은 말씀 들어보시면 어떠세요?"


 '내 영혼이 맑은지 안맑은지 당신들은 아시오?시간이 없어서 비켜주시면 감사하겠는데...제!!좀!'


퇴근 후 핸드폰이 망가져 a/s를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7시엔 기사분들도 퇴근을 해야하기에 급하게 걸어가는 중이였는데 하필 그 시간에 붙잡힐게 뭐람. 그것도 금요일이였다. 그날 고치지 않으면 주말에 아무와도 연락을 취할 수가 없기때문에 마음이 점점 더 급해졌다.


맑은 영혼이고 나발이고 이미 때묻은 영혼인걸 알고 있는데 무슨..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자주 붙잡혔던 나는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를 궁리하곤 했다. 그 시절엔 착해보이는 인상이 싫었고 나를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죄송할일이 아님에도 늘 죄송하다는 말로 그들을 밀어내야 했다. 한번은 생년월일을 물어보더니 사주를 봐주기 시작해서 흥미롭게 들었던 적이 있다. 어쩜 그렇게 맞는 말만 하는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같고 신기해서 길거리에 서서 사이비 종교인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쎄한 느낌은 사주풀이가 끝나고 시작되었다. 


"함께 가서 공부를 해보면 어때요?또래 친구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할 수 있을거에요"


'하.. 또 낚였군 왜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 걸까'


이번엔 죄송하지 않기로 했다.


"사주풀이는 잘 들었습니다. 지나가겠습니다"


그래 이쯤이면 된 것이다. 그 소굴로 유인하기 위한 미끼에 불과한 것에 많이 고마워 할 이유는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정중히 거절했으면 충분히 알아 들었을 것이다. 날 좀 잡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20대시절 나를 종종 귀찮게 했던 그들에게 붙잡혔던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데 붙잡히는 사람들의 특징은 혼자 걸어가는 사람, 인상이 착하고 순해 보일수록 확률이 올라가고 시선을 마주치면 그들의 레이더망에 들어온 것이므로 튀는게 상책이였다. 어찌나 집요한지 영업사원들의 실적을 올리는 것만큼 좋은 실적을 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인상을 개조해야 하는 것인가. 정중하게 말고 싸가지없는 말투로 거절해야 하는 것인가. 중간에 말을 끊고 단호하게 대했어야 했는가. 길거리를 지나갈 때의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만나지 말자. 내 영혼은 지금 화가 많이 나 있다구!


웃음이 많았던 얼굴은 곧 잘 그들의 타겟이 되곤 했다. 웃는걸 조금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다가오는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선방을 날릴 생각이었다.


"관심없어요 그냥 갈께요"


"네? 저기 길좀 물어보려고 하는데요....."


"아 네 죄송합니다"


가끔 선수치려다가 민망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길을 물어보기 위해 고민했을 그 분은 무슨 죄란 말인가. 예측이 빗나갔을 때 갑자기 미안해졌다. 너무 예민했나.


그 시절엔 그들의 이야기가 가거리가 되었다. 친구들과 머리를 싸메고 분석을 해보기도 여러번이였고 그들에게 잡히지 않는 방법을 의논하며 하나씩 써먹곤 했다.


한 친구는 한번도 붙잡힌적이 없다고 해서 신기했다. 노하우를 물어보니 일단 웃지 않기, 무표정, 그들이다 싶으면 째려보기, 다정하지 않은 말투, 그들의 말이 시작되기전에 들어주려고 하면 절대 안된다는 둥 여러 방법이 나왔다. 그리고 필살기는 그 친구의 인상이 한몫 한다고 했다.


쉽지 않았던 사이비 종교인들의 따돌리기는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나중엔 내려놓게 되었다. 대충 얘길 들어주면서 계속 걸음을 옮기며 바쁘다는 시그널을 보냈다. 왜 말을 끊지를 못하니... 그들의 외로움을 들어주는 일도 썩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소굴은 1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외로움을 털어내고 빨리 자립하길 바랐다. 마음이 힘들어서 기댈곳이 필요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내가 그 외로움을 덜어줄 순 없지만 종종 길거리에서 대화상대가 되어줄 순 있었다. 들어주는 이가 있어서 조금 덜 외로웠으려나.


마음을 좀 내려놓으니 더이상 걸음이 빨라지지도 않았고 누군가 다가오면 반갑지는 않지만 이야기는 곧  잘 들어주게 되었다. 조금씩 조금씩 걸음을 옮기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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