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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월 Oct 06. 2024

겨울밤의 멜로디

순수한 그녀

"너는 알고 있니?"


"뭘?"


"너 중학생같아. 전혀 스물여덟살로 안보여. 학생같아"


"학생맞잖아. 늦깍이긴 하지만 대학생이라구!"


"아니 대학생이 아니라 중학생 같다니까"


그 친구는 늘 나에게 중학생같다며 내가 너무 어려보인다고 말했다. 성스럽지 않다는 것인지 정말 동안이라는 소린지 해깔리는 그의 말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어깨에 못 미치는 단발머리에 화장기없는 얼굴때문이였을지도 모르겠다.


해외에서 살고 있다던 그녀석은 학과수업을 위해 한국에 왔다고 했다. 두 나라를 왔다갔다하며 생활하는게 나쁘지 않고 기회가 되면 꼭 해외여행을 다니라고 조언해주던 친구였다. 그리고 항상 내 외모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지도 않았지만 딱히 나쁘지도 않았다. 잘 들어보면 결론은 내 모습 그대로를 설명했고 지금의 나이보다 어려보인다 말이였다.


그러면서 본인은 내 옆에 있으면 상대적으로 나이가 들어 보인다고 했다. 그게 내 잘못은 아니였지만 많이 어려보인다던 비주얼때문에 조금은 미안해질 때도 더러 있었다. 어디까지나 나와 그녀석이 있을 때 상대적으로 나이가 들어보인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녀석이 노안은 아니였다.


"냥 너는 너의 나이대 같이 생겼어. 나이들어 보이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 아님 내옆에 오질 말든가.."


항상 나를 보면 중학생 같다고 말하던 그녀석에게 종종 쏘아붙이곤 했다. 이제 그 얘긴 그만 듣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석은 쫑알쫑알 거리며 늘 내옆에 있었다. 내 말투따위 신경쓰지 않는 놈. 가끔 입을 막아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넌 여자친구 없어? 여자친구좀 만들어 나한테 붙지 말고"


"친구야. 너도 여자친구인걸?"


"꺼져!! 중학생같다고 놀리지나 말라구!!"


"으흐흐흐 삐졌어? 나 내일 비행기타. 집에 갔다가 방학끝나면 올건데 보고 싶다고 울지마"


"그냥 거기에서 오지마. 국 금지 시키고싶다"


우리의 대화는 늘 이랬다. 예쁘게 말하는 법을 몰랐던 나는 그녀석에게 친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중학생같다는 말 썩 유쾌하게 들리지도 않았다.


차갑게 내려앉은 밤공기가 춥게 느껴지는 밤에 한강 벤치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영어캠프준비로 한참 열심히 공부하다가 집중이 안될땐 어김없이 한강공원을 찾곤 했는데 살결에 닿는 바람이 이젠 차가운 기운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으슬으슬 한기가 도는 것 같아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였다.


"안녕?"


"뭐야 너. 비행기 안탔어? 혼날래?"


"아니 안혼날래. 여행좀 다니고 싶어서. 여기서 만날줄이야"


"그러게 여기서.. 만날줄이야..."


"산책하러 나온거야? 잠깐 앉자"


"추워서 들어가려던 참이야"


"내 옷 입음 되잖아. 나랑 조금만 같이 있어주라"


"후.. 너 내가 거절 못하는거 알고 이러는거지?"


"어"


"옷이나 내놔. 추워"


그녀석에게 붙잡혀 다시 한강을 마주보 았다. 여행계획에 대해 자세히 브리핑중인 친구는 많이 진지했다. 그리고 눈빛이 빛나고 즐거워 보였다. 어느새 친구의 여행계획에 져들고 있었다. 마치 여행중인 착각이 들 정도로 매우 구체적이고 세세한 계획이였다.


"근데 이렇게 다니려면 방학이 끝날거 같은데 집에 안갈 분위기다?"


"일단 다녀보고 못 갈 수도 있고 갈 수도 있고 모르겠어. 인생이 어디 계획한대로 딱 들어맞는 것도 아니고. 난 지금의 상황에 최선을 다해 즐길거야. 집은 여름방학에 가도 괜찮아. 우리 부모님은 날 심하게 통제하지 않아. 여행다니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셔"


"부럽다. 우리 부모님은 통제가 심해서 여행가려면 몇일 동안 얘기해야 해. 가기로 해도 여행가는 날이 되면 안보내 주려고 해. 난 어린아이가 아닌데 너무 울타리에 가두려고 해서 답답해"


"너 어린아이같잖아"


"나한테 맞고 싶은 거니?"


"내가 너희 부모님이여도 널 못보낼거 같아"


공감능력은 1도 없고 놀리기 좋아하는 녀석은 건수가 생길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했다.


"너 여자한테 그렇게 얘기하면 안되는거 몰라? 그건 여자의 매력이 없다는 얘기로 들릴 때도 있어. 귀엽다가 아니라 여자가 아닌 것 같다"


"흠.. 난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 넌 귀엽지만 이쁘기도 해. 그리고 성격이 여성스럽기도 한데 남자같기도 해. 내가 어린아이같다고 말하는 건 순수하다는 말이였어"


급발진했던 나는 갑자기 민망해졌다. 순수하다는 뜻이였다니..


"넌 항상 생각이 많아 보여. 그리고 너의 생각안에 너를 가두는 것 같아. 넌 분명히 여성스러운 매력이 있고 성격이 좋은 편이고 사람도 좋아하고 정이 많아. 장점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지만 딱 하나. 생각이 너무 쓸데 없이 많아."


"맞아. 너 사람 볼 줄 아는구나. 맹탕인지 알았는데 아니였네?"


그 녀석은 갑자기 진지한 이야기들을 쏟아 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은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정확한 분석력과 예리한 눈썰미와 직감을 가진 친구였다. 이런 똑똑한 친구 같으니라고..


쌀쌀맞던 나는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어느새 수긍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보다는 친절한 말투로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중학생같다고 한 말을 몇날 몇일동안 고민한 적도 있어. 처음엔 그러려니. 저러다 말겠지 했거든. 근데 넌 틈만 나면 나한테 중학생같다. 어려보인다고 해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생각이 많았던건 사실이야. 다행히 내가 우려했던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다는 말은 아닌  같아서 이제 널 좀 친절하게 대해 보려구"


"진작 얘기해줄걸 그랬네. 그럼 이렇게 속앓이 않했을텐데"


"됐어. 니가 내 속을 어떻게 알고 진작 얘기해줄걸 그랬냐고 하는거야?"


"귀여워"


 "매를 버는구나 니가. 친절하게 대한다는 말은 취소할께"


"니가 친절하게 대하지 않아도 넌 나한테 친절한 편이야. 넌 화를 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보기 너의 말투는 친절하게 화내는 말투거든. 화가 없는 사람이 화를 내는 것 같은... 뭐 대충 그런거"


실제로 내 사주에는 "화"가 없다. 좀 다른 의미일 수 있지만 굉장히 차분한 편이였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늘 친절한 편이였다.


"그리고 너가 다른 친구들한테는 무척이나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알고 있어. 물론 나에게 대하는 거랑 온도차가 느껴지긴 하지만 나에게 대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아. 종종 말투가 귀여울 때가 있어. 분명히 넌 열받아서 화를 내고 있는데 화내는 것도 친절해. 신기하고 매력있어. 차갑기도 하면서 따뜻해 항상"


이녀석은 지금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래서 내가 화를 내는 거에 전혀 쫄지 않는다. 무섭지 않다. 화를 내봐야 화내는 것 같지 않다. 뭐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상처받지 않게 이쁘게 포장해서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진심으로 하는 말 같기도 했고. 이곧대로 해석하지 않고 머리속에 엉켜있는 쓸데없는 생각들까지 합세하여 또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


"너. 또. 생각 많이 하고 있지? 많이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도 해봐"


'뭐야 이녀석.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잖아. 정체가 뭐지'


이렇게 생각이 많은 나를 어디가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녀석은 분명히 장황하게 이야기할께 뻔하니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겨울밤의 공기는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추웠지만 매우 상쾌했다.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입김을 불어대며 말했다.


"추워. 집에 갈래"


"안아줄까?"


"꺼져!!"


차가웠던 공기가 갑자기 따뜻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체온이 급격히 상승하는 기분이 들었다. 은은한 향수냄새가 났고 나를 감싸고 있던 팔과 손은 스하고 든든했다. 슴은 포근하고 종종 숨이 막혔다.


"날 좀 놔줄래? 숨을 못쉬겠어"


"추워 하는 것 같아서.. 그래도 따뜻하지? 또 추워지면 얘기해"


"더워. 안추워 질거 같아"


"귀여워"


손바닥으로 그 녀석의 등짝을 힘껏 쳐주었다. 등짝스메싱을 자처한 친구는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꼭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만 쳐다봐. 짜증나. 또 맞고 싶지 않으면 자중해"


"너 놀리는거 재밌어. 반응이 즉각즉각 오니까 웃겨"


"후... 내가 주짓수를 배워서 언젠간 너를 혼내 주겠어"


"좋아!!"


이 녀석은 끝까지 나를 놀려대며 재밌어 했다. 녀석이 즐거워 하는 미소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녀석 웃는 모습이 이런 모습이였구나.. 유선 이어폰 한쪽을 귀에 꽃아주며 같이 듣자고 제안을 하는 친구였다.


[Rialto - monday morning 5.19]


한강의 새벽공기는 더 차가워지고 있었지만 난 더이상 춥지 않았다. 왼쪽 귀에서 흐르는 음악이 따뜻한 온기를 나누어 주는 기분이 들었다. 겨울밤의 공기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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