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수능을 치르는 날만 되면 매서운 추위가 찾아오곤 했다. 열심히 머리속에 저장해 두었던 지식들을 방출하기 위해 시험장을 찾았던 날도 많이 추운 날이였다. 보온병에 따뜻한 물을 담아 초조한 마음으로 물병을 꽉 안고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과연 제대로 공부를 한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거나 어려운 문제가 많았고 시험이 끝나기도 전에 난 이미 이번 수능은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수를 해야 하는지 독학이 아닌 학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던 시험장 안의 나의 모습은 불안했고 긴장감을 가득 앉고 있었다. 그리고 반 포기상태였다.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온갖 상념들을 비집고 들어가 물었다.
'내가 공부를 덜 한 것일까. 시험이 너무 어려웠던 것일까. 오늘따라 머리가 안따라 주었던 것일까. 아니면 난 재수를 할 운명인 것인가. 원하는 학교에 갈 수 있을까....'
고3 시절 간절히 이루고 싶었던 목표가 있었던 나를 아빠는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응원해 주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해주었고 우리 집안에서 가장 외향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라며 어느 날은 아빠의 말 한마디로 너무 멋진 내가 되어 있을 때도 있었다.
내가 유년시절의 아빠는 멋쟁이였다. 늘 단정히 양장을 차려 입었고 사진찍기를 좋아했던 당신은 해외에서 일을 하고 귀국할때 사왔던 멋진 카메라에 늘 우리들의 모습을 담았다.
우리는 인화한 사진들을 모아 두었던 앨범을 종종 꺼내보며 키득거리거나 사진에 대해 물어보면 아빠는 추억에 잠기곤 했다.
귀국할때 사온 향수가 한개는 남자향수였고 한개는 니나리찌로 기억하는데 두 향수 모두 내가 뿌리고 다녔고 그때부터 향수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빠는 내가 향수의 세계에 입문하게 해준 사람이었고 나는 꽤 어린 시절부터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멋쟁이가 되었다.
컨트리 팝을 즐겨 듣던 아빠는 오디오에 진심이였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음질이 좋을지 많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오디오를 자주 만지작 거렸던 아빠는 오디오를 몇년만에 다시 바꾸곤 했다. 집안 가득 울려퍼지는 음악에 심취했던 아빠의 모습은 지금의 나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아빠의 모습에서 비롯되어졌다.
유년시절의 기억에 아빠의 모습이 많이 담겨 있다. 아빠는 늘 우리들과 시간을 보내려 했고 양장을 손수 만드는 일을 하시면서도 시간을 내어 우리들과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일을 하셨던 엄마보다 더 애착형성이 잘 되었던 아빠의 존재는 내 인생의 든든한 지원자였으며 내 얘기를 잘 들어주고 생각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였다.
고2때 자퇴를 생각했던 나를 잡아준 건 아빠였다. 수능을 망치고 재수를 택한 나는 한참 수능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을때 아빠는 바람쐬러 가자며 버스에 올라 탔다. 도착한 곳은 대학 캠퍼스였다. 목표로 삼고 있던 대학교에 직접 데려가 주었던 아빠였다.
"실제로 와 보니 어때? 멋지지? 최선을 다하면 올 수 있을거야. 못 오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회는 계속 있을테니까"
아빠는 정말 섬세하고 멋진 분이였다. 한참 힘들어했던 나에게 잠시 쉬어가라고 해주었던 사람.
우리가 어렸을땐 아빠는 서울로 우리들을 많이 데리고 다녔다. 그 당시 동대문에 팔던 외국 군인식량을 사러가는 걸 좋아했던 우리들은 짙은 카키색 비닐에 들어있는 갖가지 군인식량을 좋아했다. 빵, 콩, 땅콩버터, 과자등 우리가 좋아 했던 식량은 군것질 거리였는데 영어로 씌어진 비닐을 뜯으며 뭐가 나올지 기대했던 재미도 쏠쏠했다.
운동을 좋아하고 등산을 좋아했던 아빠와 산에도 종종 따라갔는데 걸음을 맞춰주던 아빠가 나중엔 저만치 먼저 가 있었고 천천히 올라가면 아빠는 쉬고 있었다. 산의 공기는 너무 상쾌했고 산에서 보는 전망은 정말 아름다웠다. 노을이라도 질 때 쯤이면 그곳에서 보는 풍경은 장관이였다. 등산의 맛을 알게 해준 사람도 아빠였다.
아빠는 매일같이 웨이트 운동을 루틴처럼 했다. 그래서 늘 군살없는 몸을 유지했고 양장을 즐겨입던 아빠는 옷테가 났다. 내가 조금이라도 살이 찌고 배가 나오는거 같으면 살이 찌지 않게 해야한다며 건강하게 생활하길 바랐다. 멋쟁이 아빠는 내가 청바지 입는걸 싫어했다. 양장을 입으면 단정해 보이고 잘 어울린다고 해주었다.
아빠가 늘 친절했던 것 만은 아니였다. 초등학생시절에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발표를 하지 못했던 날이 있었는데 한살 차이나는 오빠가 그걸 아빠한테 말해 버리는 바람에 우리들을 똑똑하게 키우고 싶어했던 아빠는 화가 났다. 그때 처음으로 아빠한테 회초리로 맞았던 기억이 있는데 발표를 해내지 못했다는 것보다 오빠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그 날 이후로 억지로라도 발표는 해냈고 그때부터였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난 부끄러움 많던 소녀에서 점점 외향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으로 변해갔다. 방법이 좋진 않았지만 아빠로 인해서 내가 바뀌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조용한 집안 분위기에서 살았던 나는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스무살이 되면 꼭 독립하리라 마음먹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도 자유롭지 못한 통금시간에 불만이 많았다. 9시만 되어도 전화기에 불이 났고 심하게 통제하는 부모님에게서 하루 빨리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 갔다.
유년시절과 학창시절 때의 아빠는 나에게 너무 좋은 사람이였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좀 답답해졌다. 아마도 아빠가 나의 성향을 파악했더라면 우리의 관계가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지 여러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통제에서 벗어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빠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다시 아빠와 사이가 좋아졌다.
자주 통화하며 서로 안부를 궁금해 했고 아빠는 나에게 하지 않았던 옛날 이야기도 많이 하곤 했다. 아빠와 한시간이 넘게 통화를 하기도 하고 점점 몸이 쇠약해 져 가던 아빠는 나에게 전화를 거는 횟수가 늘어났다. 아마도 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힘든 마음들을 기대었던 것 같다. 아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어느 순간 인생의 큰 짐을 떠안은 것처럼 무거워 질 때가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일상적인 이야기가 아닌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말하는 걸 듣고 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였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오던 날. 아빠와 좀 더 긴 시간 함께 하지 못한 시간들이 너무 후회가 되었다. 아빠를 마주하는 게 마지막 날인 걸 알았더라면 그렇게 빨리 아빠와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는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계셨다.
아빠는 아프게 떠났지만 아빠의 기억은 희미해지지 않는다.
입관식에서 아빠를 애타게 부르며 차갑게 식어버린 아빠의 팔을 붙잡고 한동안 놓을 수가 없었다. 거짓말이였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것들이..
한동안 꽤 여러번 꿈에서 본 아빠의 모습은 유년시절 내 기억속에 있던 멋쟁이 아빠의 밝고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였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부디 그곳에서는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아빠는 언제나 내 기억속에 멋진 아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가끔 꿈에서 만난 아빠는 여전히 웃고 계셨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거칠때마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지켜보고 계실 아빠에게 나 잘 살고 있다고 앞으로 더 멋지게 잘 살아보겠노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아빠의 기억이 희미해지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