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같은 고요함이 불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하게 요동치는 심장소리가 꽤나 시끄럽게 들리고 거슬리기까지 했으니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어나서 움직여야 했다. 이렇게 있다간 돌연변이 세포가 혹시라도 활개를 치거나 날 괴롭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건강할때 건강하게 살려면 자신과의 타협보단 마음가는대로 한번쯤 살아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괜찮은 것 뿐이던가. 이보다 더 멋진 인생은 없다. 정도는 되지 않을까.
팔자에 있는 역마의 기운이 강하게 작용하는 해일수도 있을 것이고 어쨋든 순리(?), 운명, 마음... 뭐 이딴것들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보기로 마음먹은 날. 캐리어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직 신이 나기 전이니 본격적으로 신나기 전까지는 감기에 걸린다거나 갑자기 일이 바빠져 연차를 반납하라던가 하는 이상한 일들이 생기지 않길 바라고 있을 뿐이다.
새벽 비행을 앞두고 몇시간 전 일찌감치 눈을 떴다기 보단 카페인의 도움으로 거의 잠을 설쳐서 누워만 있다가 일어난 기분이 들었다. 어쨋든 몸은 좀 쉬었으니 푹 잔걸로 하면 될 일이었다. 세안, 양치후에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있는 상태에서 얼굴이 건조하지 않게 재생크림을 대충 바르고 흡수가 채 되기도 전에 모자를 대충 눌러쓰고 정성껏 싸놓은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어두운 하늘아래 가로등 불빛을 통과하는 눈송이들이 가볍게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가는 길을 배웅해주는 듯 더 많은 눈송이들이 날리고 있었다. 예쁘다. 여유있게 나왔으니 5분정도 눈내리는 풍경을 감상해도 늦는 일 따위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캐리어를 차에 싣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가로등과 눈송이들의 콜라보는 정말 환상적이였다. 이렇게 예쁜 겨울풍경으로 시작하게 된 일정은 최고로 멋진 날들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차안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두운 도로위를 달리는 기분이 괜찮다. 신이 한 일 중 제일 위대한 것중 하나는 음악과 노래를 창조한 거라고 생각한다. 음악으로 뇌회로를 자극하여 도파민과 그의 친구들로 센티맨탈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니 말이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 일인가.
혼자 여행하기는 버킷리스트중 하나였다. 버킷리스트를 하나둘씩 달성하다보면 내 인생의 주인공은 몇살이 되어 있을지.. 어쨋든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멋진 일 아니던가.
운전석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전해지는 새벽녘을 만끽하는 행복감이 참 좋은 날. 입김을 불어보는 것도. 찬 공기에 상쾌함을 느끼는 것도. 이런 날 음악에 취해 보는 것도. 새벽녘의 어두움과 자동차의 스피커에서 울리는 음악이 어우러지는 분위기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일도.. 모든게 행복해지는 날이였다.
떠나고 싶었던 건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회사에 입사하고 온전한 월급을 받은 달부터 일년짜리 적금을 넣기 시작했다. 상대측 100프로 과실로 교통사고 보험금이 들어왔을땐 모든 금액을 예금에 넣었고 그토록 좋아하는 옷 쇼핑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전 회사 퇴직금을 받았을때 반을 남편에게 주었고 반은 통장에 넣어두고 필요할때만 조금씩 꺼내 썼다.
나에게 시간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회사에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항상 줄서 있었지만 그것들을 차근차근 해내는 일이 나에겐 가장 중대한 임무였다. 그래야 기회가 왔을때 당당하게 연차를 내고 자리를 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공부를 봐주는 일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수학시험을 보기 전날 큰 아이가 어려워하는 수학문제지를 가지고 끙끙거리고 있을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는 일. 그리고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격려의 말로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일이 필요했다. 울면서 공부를 했던 아이가 다음날 시험을 잘 본것 같다며 전화했을때 피곤함을 뒤로하고 아이의 공부를 봐준 일은 잘했다 싶었다.
가장 싫어하는 집안일 또한 내 몫이 대부분이였다. 정리가 필요했던 곳은 깨끗히 정리하고 내가 자리를 비웠을때 아이들이 찾기 쉽도록 동선을 짜는 일까지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집안은 항상 깔끔해야 기분이 좋으므로 눈에 보이는 곳은 정리정돈이 되어 있어야 했다.
모든 일에 계획이 필요했다. 그래야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상이 비슷한 패턴으로 흘러갔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원대한 계획이 자신을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하루를 꽉 채워 보내는 일이 기분좋고 멋진 날이 되었다. 종종 해내지 못하는 운동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일들은 계획한 대로 흘러갔다.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았지만 해소되지 않던 것들에 대한 답이 필요했다. 해답지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걸 찾는 건 온전한 내 숙제였다. 인생을 조금 더 넓게 멀리 보아야 보일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 있는 곳이 정답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내리는 도로에 점점 쌓여가는 눈을 보며 10시간이 넘는 비행이 기다려졌다. 얼마나 기다렸던 날이였던가. 고전 [북풍의 등에서]처럼 어쩌면 그곳이 북풍의 뒷편만큼 편안한 곳이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해소되지 않던 갖가지 유쾌하지 않던 감정들이 점점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공항엔 눈이 그치고 차갑고 상쾌한 공기만이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