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소리를 내는 일에 대하여
나도 목소리가 꽤 괜찮아서 말이지
분명히 인강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AI젹인 멘트가 귓가에 들리며 의식을 깨운다.
"음식물 건조가 완료되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인강을 잘 듣고 있다가 기억이 희미해지곤 하는 밤이였다. 이대로 숙면뒤에 상쾌하게 아침을 맞이 할 수도 있었는데 새벽에 울려대는 맨트와 음식물이 건조되면서 남긴 쾌쾌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워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새벽에 눈이 떠졌다.
다용도실에 두고 쓰던 음식물 건조기를 실내에 두고 쓰는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신축에 있었던 환기시스템이 구축엔 없어서 이 새벽에 거실창문과 주방창문을 열어 재낀다. 그리고 탈취스프레이를 곳곳에 분사하고 냄새가 빠지기를 기다린다.
차가운 바람이 스미는 새벽. 아파트 곳곳에 불이 켜진 곳이 몇몇 눈에 뛴다. 잠이 달아나 버린 탓에 멀뚱히 냄새가 빠지기만을 기다리다가 글이 잘 써진다는 새벽 아니던가. 쾌쾌한 냄새따위로 시간을 보내기가 싫어져서 감을 잃어가는 글을 조금 써보기로 한다.
정확히 따져보니 결혼생활이 13년째다. 이쯤되면 의리로 산다던 그때인건지 서로 바빠서 대화를 나눌 일이 많지 않아 답답해지면 회사에 있는 남편에게 카톡으로 메세지를 남기곤 한다. 어느 덧 랜선대화는 익숙해져 간다.
신혼 초엔 무조건 참는게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 여겼는데 출산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점점 쌓였던 응어리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십여년 가까이가 되어서야 조금씩 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오곤 했다.
입밖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절대 알지 못할거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어쩌면 내가 얘기하지 않아도 이정도는 캐취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하고 쓸데없는 기대로 감정소비에 더 열을 올린 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지는 법이다. 언제부터인가 내려놓는 연습을 했다. 내려놓는 제일 좋은 방법은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마음이 다칠 일이 없고 그만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어서 삶의 활력을 찾을 수 있다.
활력이 될만한 일들을 떠올려본다. 이를테면 운동하기, 맛있는 음식 먹기, 글쓰기, 일본어 공부하기, 아이들 공부봐주기(이건 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새책 사기, 친구랑 수다떨기, 드리이브, 덕질 등등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수용하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때에 따라서 의견을 어필하는 일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잔소리가 되지 않도록 길지 않게 요점과 타당성에 대한 간결한 몇마디면 된다.
아무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의견을 내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일은 혼자 감정을 삭히며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보다 현명한 일이라 여겨진다.
참는게 미덕이라 여겼던 지난 날들을 돌이켜보면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은 시한폭탄이 되어 버리는 것 같다. 아직 참는게 익숙하긴 하지만 종종 내 목소리를 내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보다 성대를 울리는 목소리가 나쁘지 않아서 말이다.
정붙여 보려는 집은 종종 정을 붙이기 어렵게 만드는 이벤트를 선물해 주곤 한다. 창문을 닫아도 될만큼 냄새가 해소가 되지 않는다. 음식물 건조기를 옮길 곳을 찾아봐야 겠다. 상큼한 감귤향이 나는 향수를 허공에 뿌리고 유쾌하지 않은 냄새를 덮어주기를 바라며 잠을 청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