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내가 한 것들

by 바닷물

이번에 틀어박힌 동굴 속에서 내가 살기 위해 한 일은 잘 먹는 것이었다.

잠이 안 올 때도 먹었고, 영화를 보면서도 먹었고, 그렇게 나는 쉴 새 없이 먹었다.

다만 이전 암흑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직접 해 먹는 음식의 비중이 점차 늘어난 것이었다.

그렇게 내 체중도 겨우내 늘어나고 있었다.


(2/5) 유튜브에서 아문센에 관한 이야기를 보게 됐다.

분명 전에도 봤던 영상인데, 실패의 순간에 목표를 곧바로 수정하고 결국 선원들을 전원 생존 귀환시킨 그의 리더십에 새삼 감탄했다.


그가 실패에 좌절하기보다 곧바로 목표를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은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극 횡단에 대한 목표의식에 매몰되지 않았고, 연이은 실패를 탓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좌절하거나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그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졸업과 취업에 실패한 이 상황에 내가 설정해야 할 목표는 뭘까?


처음에는 또다시 일 년이 늦어진 만큼 취업을 향해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급해졌고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충동적으로 토익스피킹 책을 샀고 실제 시험을 접수했다가 취소하기도 했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 과정이었다.


설이 지나고 이번 달에는 스피닝과 토익스피킹 학원을 등록했다. 이 둘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종강 후 망가진 내 생체시계를 조금씩 되돌리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걸, 조교로 근무하던 영어학원에서 추가 근무를 제안받고 매일 출퇴근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오늘이 그 3일째인데 벌써부터 쉽지 않다. 어제까지만 해도 열심히 사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엔 늦잠을 자는 바람에 토익스피킹 학원에 가지 못했다. 내 계획이 벌써 실패한 것 같았고, 내가 정말 이렇게까지 망가졌구나 하는 생각에 슬프기도 했다. 나중에 간호사가 되어서도 내 상태가 나아지지 않을까 봐 불안해졌다. 내가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나 있을까. 스르르, 발목과 무릎 사이, 정강이 언저리까지 늪에 잠기는 듯한 이 느낌. 이것에서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


다행히 오늘의 나는 아문센을 만났다. 계획은 실패할 수도, 언제든 수정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원점으로 돌아와 내게 가장 중요한 것, 지금 나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 떠올렸다. 막상 생각을 시작하자 고민이 필요 없을 만큼 답이 명확했다. 그건 바로 건강이었다. 우울증 단약 및 여타 사건들로 불안정한 나의 정서, 식이, 수면 패턴을 정상화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래서 난 다시 이번 달 계획을 변경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해내도록. 기존 계획은 학원 근무확대 이전의 것이었으니 변경은 오히려 타당하다.

나는 왜 매번 직접 부딪혀보고야 무리한 계획임을 깨닫는 걸까?

무작정 일단 해보겠다는 고집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내일 토익스피킹 학원에 연락해 환불이나 홀딩에 대해 여쭤봐야겠다.

아문센이 혹독한 추위와 생존에 대한 불안으로 지친 선원들을 보살폈듯, 나도 나를 현명하게 챙겨야지.


(2/8) 오늘은 또 나에게 어떤 것을 대접할까?

이렇게 매일 나를 위해 어떤 것을 요리해 줄지, 어떤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을지 행복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더니 인생이 그렇게 허무하고 외롭지만은 않은 것 같다.

요즘엔 매일 직접 요리해 끼니를 챙기면서 나의 요리 스펙트럼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나의 자존감 나무도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


(2/13) 오늘 아침, 드디어 운동을 갔다!

11월 첫눈이 내린 날 꼬리뼈가 부러진 이후로 몇 달간 운동을 미뤄왔지만,

스피닝 회원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하프피티를 예약해 두었기에 오늘만큼은 수업을 빠질 만큼 괜찮은 핑곗거리가 없었다.


운동을 다녀오는 길에 서브웨이에 들러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고등학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짧은 통화가 즐거웠다. 친구들끼리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는 이야기도 나왔는데, 아직까지 친구들과 여행 한 번 가본 적 없는 나로서는 상상만으로 설레는 일이었다. 다들 일정이 맞아서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오면 참 좋겠다.


학원 퇴근길에 버스를 기다리면서 다른 조교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또 어떤 선생님은 나처럼 월수금 근무가 추가되어서 19일에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우리 둘 다 해외살이의 꿈이 있었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거센 한파로 얼어붙던 시기를 지나 봄기운에 살랑이는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학원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 되고 있다.


다시 천천히, 사람답게 살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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