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 세상에서 지워내고 싶다.
마치 그 자리에 원래 아무도 없었단 듯이.
그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걱정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사라질 텐데.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씻지 못할 죄책감으로 돌아와 나를 괴롭힌다.
어떻게 해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존재 자체가 곧 괴로움인 나는 오늘도
목을 죄는 괴로움에 발버둥 친다.
존재의 시작부터 누군가에게 빚을 지며 살아가는
미약한 인간들은
언젠가부터 당연한 듯 스스로 두 발로 일어나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두 발로 대지를 지탱하며 살아간다.
실수와 잘못과 불신과 미움과 두려움 속에서
작은 사랑과 용서와 믿음과 용기에 기대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나는 거대한 사랑에 압도되어
몰염치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갈 힘이
두 다리에 들어가지가 않는다.
그냥 딱, 태초의 무였던 과거로 돌아가
세상에서 나를 지워내고만 싶다.
나로 인해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병들어갈
그런 여지를 모두 깨끗이 지워내서
그들의 싱그러움과 아름다움과 건강을
그 상태 그대로 박제하여
그들이 덜 슬프고 덜 괴로워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