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無

by 바닷물

나를 이 세상에서 지워내고 싶다.

마치 그 자리에 원래 아무도 없었단 듯이.


그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걱정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사라질 텐데.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씻지 못할 죄책감으로 돌아와 나를 괴롭힌다.


어떻게 해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존재 자체가 곧 괴로움인 나는 오늘도

목을 죄는 괴로움에 발버둥 친다.


존재의 시작부터 누군가에게 빚을 지며 살아가는

미약한 인간들은

언젠가부터 당연한 듯 스스로 두 발로 일어나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두 발로 대지를 지탱하며 살아간다.


실수와 잘못과 불신과 미움과 두려움 속에서

작은 사랑과 용서와 믿음과 용기에 기대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나는 거대한 사랑에 압도되어

몰염치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갈 힘이

두 다리에 들어가지가 않는다.


그냥 딱, 태초의 무였던 과거로 돌아가

세상에서 나를 지워내고만 싶다.


나로 인해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병들어갈

그런 여지를 모두 깨끗이 지워내서


그들의 싱그러움과 아름다움과 건강을

그 상태 그대로 박제하여

그들이 덜 슬프고 덜 괴로워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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