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쌍둥이 형제가 다투고 있다. 형은 태권도복을 입은 걸로 보아 운동부일테다. 형제의 싸움은 무척이나 흔한 일이지만, 대사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다. 형은 방해하지 말라고 말하며 화를 내고 동생의 멱살을 잡는다. 동생은, “지는 새끼 이기게 해주는 게 방해냐?”라고 반문한다. 어떻게 (경기에서) 이기게 해준다는 걸까? 해당 장면은 작품의 종반부에 그대로 반복되어 영화를 액자식으로 구성한다.
동생은 우연한 계기로 시간을 되돌리는 법을 터득한다. 숨을 몇 초간 참고 기절하여 정신을 잃게 되면 과거의 특정한 시점으로 돌아간다. 그 이후로 동생은 시험 문제의 답을 암기한 채 시험 전으로 돌아가 고득점을 받는다. 성적이 많이 올랐다며 선생님의 칭찬을 들은 동생은 기분이 좋다. 나아가 동생은 형의 선수 생활에도 도움을 주려고 한다. 형이 상대 선수에게 얻어 맞은 경기를 관전하고는 패배 이전의 상황으로 시점을 되돌려주는 식이다.
그러나 형은 그런 동생이 탐탁잖다. 형은 분노한 채 동생에게 시간 되돌리기를 하지 말라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 평소 동생과 함께 과학 과목을 공부하던 여학생도 그에게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냐고 물어보다가, 답안을 외우듯 답변하는 동생이 컨닝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후 여학생은 동생과 점점 멀어진다. 동생이 시간 되돌리기로 재미를 보는 만큼 갈등 역시 심화 되는 것이다.
동생의 컨닝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여학생의 태도, 시간 되돌리기에 대한 형의 분개를 관통하는 논리는 명료하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지라도, 거기에 내가 오롯이 있을 때만이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것. 철학이 오랫동안 주체성의 문제를 고민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가 아닐까 한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주체 관념에 대한 반론이 꽤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음에도 말이다.
일련의 상황을 통과하며 종반부에 다시금 상영되는 초반부 장면은 여학생과 형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내가 이뤄낸 게 아니라면 무가치하다. 일제의 식민 정책이 외견상, 통계상의 근대화를 이루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 우리 민족의 주권이 없어서 비판받는 것처럼. 돌고 돌아 중요한 것은 결국 내가 나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온 국가 주권, 국민주권, 개인의 권리를 향한 싸움 역시 전부 그런 ‘주인 되기’의 일환이었으니 말이다.
동생의 모습을 보니, 문득 자문하게 된다. “나에게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주어지면, 나는 내가 노력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능력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필자는 그렇게 심지가 굳지도 도덕성이 높지도 않기 때문이다. 필자를 넘어서서 이 글을 보는 모두가 그러한 고민을 한 번쯤 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과연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주체-되기’가 가능할는지.
인디매거진 숏버스 객원필진 3기 최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