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오빠만 좋아한 게 아니다. 동갑도 만나고 동생도 만났다. 인터넷에서 쇼핑하듯 이성을 골라 하루가 멀다 하고 바꿔가며 만났다. 경조증 상태의 내 이야기다.
조증 상태 때는 하루에도 서너장씩 그림을 그렸다.
조증 상태의 나는 그야말로 에너자이저다. 쉴 새 없이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그 와중에 새 취미도 배우고사진을 찍고 쇼핑을 해댄다. 가장 최근의 조증 에피소드* 때에는 카드의 한도 끝까지 질러서 일을 벌여 놓고는 우울증의 보관이에게 그 빚을 모두 떠넘겼다.
비교적 약한 상태의 조증 에피소드를 겪는 내 증상은 시기마다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인다. 에너지가 좋은 쪽으로 넘쳐서 열심히 자기 계발에 몰두하는가 하면 단발성 만남에 빠져서 몸과 마음을 망치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반려동물을 한꺼번에 잃은 지난여름의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이 시기에 나를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말을 한다. '너 같은 애는 처음 봤다'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여상스럽게 말을 건네고 술잔을 내미는 나는 우주최고인싸가 된다. 세상에 두려울 것은 없고 내 존재는 반짝반짝 빛이 나니 내 눈앞의 그누 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나에게 흑심을 품은 이성이라면 더더욱 쉬워진다.
소위 늦바람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자못 보수적인 연애관을 갖고 있던 나는올여름 돌연 방탕한 삶을 체험했다. 내 존재의 밑바닥을 헤짚기라도 하듯 합법적인 테투리 내에서 할 수 있는 대체로 모든 것을 탐닉했다. 그렇게 두 달쯤 시간이 흘렀을까, 병원을 찾은 내게 선생님은 딱 두 가지 질문을 던지셨다.
쇼핑은?
가벼운 만남은?
그렇다. 내가 겪은 일련의 방황은 조증의 가장 대표적인 두 증상이었던 것이다. 나는 분명 내 의지로 내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고 믿어왔는데 그게 단순히 내가 가진 병의 농간이었다니 내심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한들 어쩌랴. 두 달간 그 농간에 놀아난 나는 다시 우울 에피소드로 넘어가는 찰나에 서서 벌여 놓은 일들을 차근차근 처리해야만 했다.
위험한 관계를 정리하고 쌓인 카드빚을 갚고 집안 구석구석 뒤죽박죽 놓인 미술도구 따위를 정리하는 것은 순전히 '우울한 나'의 몫이다. 씻을 힘도 없는 몸을 이끌고 '조증의 내'가 싼 똥(?)을 치우노라면 과거의 나에게 딱밤이라도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 들곤 한다.
그러나 핸들, 아니 브레이크가 고장 난 8톤 트럭에도 좋은 점은 있다. 올여름 나는 위시리스트를 지운답시고 열심히 스냅사진과 프로필 사진을 찍고 다녔다. 자전거를 사서 두어 번 공원에 나가기도 했으며 오래 연락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몰아 안부를 물었다. 조증 상태의 내 시간은 24시간이 아닌 48간쯤 되는 덕분에 눈독 들이던 오일파스텔 사용법을 배우기도 하고 등나무 공예를 익혀 이것저것 라탄 소품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조증 시기에 남긴 프로필 사진 중 일부.
물론 머리색을 파랗게 바꾸고 짧은 커트를 쳐서 복구 불가능한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내게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 '조증인 나'는 때로는 고맙고 때로는 얄미운 애증의 대상이다. 긴 우울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내심 그립기도 한 또 다른 버전의 나를 떨리는 마음과 함께 기다려본다.
*양극성 장애는 유형에 따라 조증과 우울증, 경조증과 우울증을 반복해서 경험한다. 각각의 기간을 우리는 에피소드 또는 삽화라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