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에 대한 고찰 (상)

by 재인

"재인이는 어떻게 생각하냐. 허락하는 거냐." 식탁에 앉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대뜸 질문을 던지셨다. 나는 의자에 겨우 앉으면서, "제가 허락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본인이 행복하기 위한 선택을 해야..." 대답을 꺼내고 있었다.


"맞아요, 재인 씨가 허락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죠."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공기의 흐름을 낚아챘다.

한동안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저녁을 삼켰다.

"그래, 재인이가 이미 말했었지. 아빠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아빠 선택을 존중한다고." 한참 뒤에 무거운 정적을 깬 할아버지 말에 식어가는 전골을 끄적거리기를 그만하고 고개를 들었다. 나의 시선이 마주한 할아버지의 눈은 왠지 내가 반대하기를, 화내고 다 엎어버리기를, 그 여전한 바람을 내게 전하려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고 나의 정신은 5시 반부터 아주 깨어있었지만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일어나서 아침밥도 차려야 하고 밀린 일과 쌓여있는 연락에 응해야 함을 알았지만, 나의 몸은 날카롭게 서있는 정신과 대비되게 할머니의 방구석에 축 늘어졌다. 침대에 누워만 있는 사람들은 체력이 고갈된 것이 아니구나, 마음이 고갈되어 버린 것이구나. 그제야 그들을 게으르다고 속으로 평가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렇게 아픈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순간들이 올 때면 역시나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만 이 알아본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들에 공감을 할 수 있는 내 모습이 어딘가 씁쓸했다.


아무래도 어제저녁이 마음에서 채 소화되지 않은 것 같다. 설마 설마 했지만, 실제가 되어버린 그녀의 존재. 그 극명한 실체로 하여금 지난 24년의 나는 죽음을 마주했다.

어려서부터 외동이었던 나는 늘 엄마랑 아빠 중간에 있었다. 어느 가족사진을 보아도, 나의 왼쪽에는 엄마가, 오른쪽에는 아빠가 있었다. 그 덕에 나는 중간에서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모두 독차지할 수 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마냥 좋았지만, 둘 사이를 잇는 유일한 중간 지점이 되어버린 지금은 그 둘이 나에게 모든 사랑과 관심을 쏟아부은 탓에 서로를 위한 사랑을 남겨두지 않은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제 둘의 대화는 나라는 작은 매체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인생의 절반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은 둘 사이에 내 자리를 만들어 주느라 서로에게 닿은 방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다. 그 중간 자리를 내게 내어주는데 너무 익숙해져 버려 내가 그곳을 떠나가야 할 때가 왔을 때에도, 그리고 떠나가 버린 후에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나의 부재는 그 모양 그대로 공백이 되어 남아 버렸다. 그래도 남아 있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제부로 그 자리는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자리 주인으로서의 나는 모종의 죽음을 맞이했다.


7시가 지나가자 할머니가 나를 깨우러 방으로 들어오셨다. 거실로 나갔을 때는 아침밥이 차려져 있었고, 그녀는 살갑게 나를 쳐다보며 서투른 발음으로 잘 잤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도맡아오던 아침밥이라는 일이 그녀에게 양도되었음에, 그녀가 먼저 내게 살가움을 내보였다는 것에 어딘가 멋쩍고 불편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하이 피치 톤으로 아빠에게 비염에 좋은 우엉을 구해 차를 끓였으니 밥 먹기 전에 한잔하라 말했다. 그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언젠가 아빠랑 한 달 동안 제주도에서 살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아마 그 여름 아빠와 나는 지난 20년의 침묵의 세월을 메꿨다. 우리는 하루 종일 제주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아빠 어렸을 때, 내가 아기였을 때, 아빠가 대학교 다닐 때, 내가 대학교를 다닐 때 (나와 아빠는 대학교 동창이다), 첫사랑과 청춘의 연애 이야기부터 사회 초창기 때, 커리어 이야기를 쉼 없이 나누었다. 이 사람은 아빠라는 두 글자로는 담을 수 없는 다채로운 한 삶이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엇박자로 흘러나오는 엄마 이야기. 아빠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자유로웠다 했다. 자신도 그녀에게 많은 자유를 주려 노력했다고 했다. 같이하지 않아도 각자가 각자의 방법으로 행복할 수 있으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니 엄마와 아빠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고, 영원이 접할 지점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새롭게 등장한 그녀가 아빠랑 같이 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아빠랑 같이 차 타고 근교 여행을 갔다 온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참으로 안타까운 다행스러움을 느꼈다. 시니컬하고 현실적인 감각이 뛰어난 엄마와 비교했을 때 그녀는 사사로움이 없어 보였다. 삶의 이해타산이 지겨워져 버렸을 아빠에게는 그런 단순한 밝음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마음은 아직 엄마 아빠의 빛바랜 기억을 붙들고 있었다.


아빠도 망각의 동물인지라, 방어기제로 이제는 기억 저편으로 꺼트려 버렸겠지만, 분명 엄마 아빠 둘의 온기가 아직 가득한 어느 새벽녘이 있었다. 아빠는 출근을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 침실 화장실에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침실의 불은 꺼져 있었기에, 화장실의 어스름 노란빛만 희미하게 침대 위의 엄마를 밝히고 있었다. 가족의 루틴이 되어버린 5시의 타탁 타탁 준비 소리에 나도 졸린 발걸음을 끌고 침실로 들어와 엄마 옆에 누웠다. 잠결에 엄마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엄마는 가장 포근한 손짓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엄마는 재인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라고 속삭였다. 마침 준비를 마치며 침대 옆 쪽으로 걸어오던 아빠는 잠시 우리를 돌아봤다. "나는 엄마가 이 세상에 세 제일 예쁜데. 재인이는 2등."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회사 다녀올게,라고 말하며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눈에 가시로 찔러도 예쁠 자식보다, 그 자식을 세상에 데려온 아내를 더 예뻐하던 아빠인데.

아침밥을 또 그저 삼켜 내리며 생각했다.


아빠가 그녀를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내게 인사시키고 미국으로 돌아가던 전 날, 나를 서울행 KTX역로 데려다줬다. 게이트 앞에 서서 기차 출발 시간을 확인했다. 15분가량의 시간이 있었다. 기약이 없을 우리의 만남이 현실이 될 것만 같아서 우리는 아무런 약속도 인사말도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 정신없이 흘러버린 3일간의 시간이 너무나도 아쉽게만 느껴졌다. 지난 3일간 내가 느꼈던 불편함과 꺼림칙함과 낯섦과 어색함 그리고 그 어떤 슬픔도 지금 붙잡을 수 없이 지나가고 있는 15분의 아쉬움보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할 수는 없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서로 눈시울이 붉어 있을까 우리는 애꿎은 전광판만 바라보며, 이럴 수밖에 없는 우리를 애석해했다. "고마웠다. 재인아. 또 빠른 시일에 만나자. 엔지니어인데 미국으로 이직해야 하지 않겠어?"라고 언제나처럼 농담을 건네 왔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나 연락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알겠지?" 아쉬움을 감추려는 아빠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좋은 사람인 거 같았어. 아빠도 재밌게 건강하게 아빠의 삶을 살아가길 바라."라고 말하고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떼어 게이트로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면 아빠도 울고 있을 것 같아서 차마 마지막으로 돌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플랫폼으로 내려오며 나는 마음이 구겨지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이라는 죽음의 순간을 똑바로 인지하는 삶이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지난 24년간의 나와 아빠의 관계는 끝이 나버렸다 느꼈다. 그와 엄마 사이의 빈틈은 이제 그녀와 그녀의 가족으로 새롭게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이 고통이야말로 유일하게 이 관계의 실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어느 봄 학기 철학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학기가 끝나갈 즘에 실존주의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사르트르가 말하길, 죽음만이 실존에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라는 교수님의 말이 이상하리 만큼 뇌리에 박혔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죽음의 편재성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우리 주변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고, 모든 순간이 사실 마지막 순간임을 극명하게 인지하는 삶을 살아내기에는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하다. 그 구겨지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 그것이 철학이라는 것이 감명 깊었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에서, 구겨진 마음을 부여잡은 순간 앞에서 나는 살기 위해 망각을 받아들이겠다 생각했다. 죽음을 정중하게 애도하고 아픔을 곱씹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망각을 받아들이겠다. 살기 위해서. 극명한 실존 상태가 아닌 적당한 실존 상태로 흐릿하게 살아가겠다. 망각이라는 인간의 비루한 인지적 한계를 축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살기 위해서.


철학은 죽음을 연습하는 것, 망각은 우리를 살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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