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너무 많이 노출시킨 것일까, 다음날 아침 지독한 숙취라도 느끼는 것 마냥 살아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것이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취약성 숙취 (vulnerablity hangover)라는 것인가. 취약하고 또 취약하다. 취약성을 끌어안으려 발버둥 치는 것이 괴롭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로도 충분할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는 아닌 것이라고 수백 번 머리로 되뇌어 본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나의 집 방향으로 가까워질수록 옆에서 말을 걸어오는 그의 목소리는 흐릿해지고 머릿속 나의 목소리만 메아리친다.
극한 스트레스 상황 속 우리가 손톱을 뜯고 다리를 떨고, 입술을 깨무는 이유는 조금이나마 스스로를 그 상황에서 방해하려는 것이다. 이를테면 몇 주전 이직을 위한 기술 면접을 진행했다. 나는 내가 자신감 넘치고 차분하게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면접이 끝나고 그제야 눈에 들어온 내 손 등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손톱에 할퀸 자국들은 내가 얼마나 숨 막히는 긴장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오늘은 너네 집 쪽으로 가자."라고 그가 말해왔다. "그래." 나는 표정이나 목소리 톤 변화 없이, 또 한치의 망설임 없이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나의 손등을 꼬집기 시작했다. 집에 가까워지는 내내 점점 선명해져 가는 손톱자국.
나는 그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책을 같이 읽기도 하고, 우리가 둘 다 좋아하는 허무스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고받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 대한 많은 데이터를 노출시키고 또 축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사실 나의 집, 공간의 모양이나 그 안의 사소한 물건들 하나하나 치명적인 데이터겠지."라고 그가 말한 적이 있다.
그 문장을 듣자마자 몇 주 전 그가 스치듯 한 말이 떠올랐다.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최초에는 외적인 모양새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겠지. 그 데이터를 처리한 후, 다음 학습 단계로 넘어가게 되면 맛이나 향과 같은 데이터를 수집하겠지."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참으로 그 답다고 생각했다. (그는 데이터 엔지니어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그의 말이 나의 귀에 도달했을 때 나는 또 손톱으로 나의 손가락을 할퀴고 있었다. 나는 하나의 데이터 클러스터가 되어 벌거벗은 채 읽히고 처리되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산책로 옆 풀 구덩이에라도 당장 들어가 숨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와 똑같이 나는 그의 부엌 한편에 서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온몸을 작은 공으로 웅크려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집이란 그 사람에 대한 치명적인 데이터인 것이다. 그의 공간에 그만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에 대한 데이터를 그만 수집하고 싶었다. 그가 나를 집 앞으로 데려다주던 그날 밤, 그는 나에 대한 얼마나 치명적인 데이터를 수집하고 처리한 것일까, 그 절대적 공포에 나는 나 스스로를 방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또 손톱으로 내 손등을 꼬집고 있었다.
그런 나를 발견한 그는 내 손을 조심히 감싸며 네 스스로를 소중히 대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가 우리 집 쪽으로 가자는 것에 대해서, 나의 데이터를 그렇게까지 수집하고 싶은 이유가 뭘까. 그 데이터로 인해 나에 대한 어떤 학습을 하려는 걸까.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그를 미워하기도 했다. 취약성을 끌어안지 못한 모진 마음이 이렇게나 추한 것이다. 그는 단순히 어두운 밤 내가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마음이 불편한 진심 어린 배려심뿐이었을 텐데. 취약함은 사람을 이렇게나 방어적으로 또 공격적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취약함에 너덜너덜 해진 스스로에 나는 놀랐다. 나는 가진 것이 없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가 고작 "편의"나 "재화"보다 강한 사람이고 생각했다. 가진 것이 없는 내가 좋았다. 그렇게 약간의 불편함이 있어도 겉보기가 초라해도 어찌어찌 살만한 집이면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집다운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마지노선에 있는 집에 살고 있었다. 멋지고 화려한, 안락한 집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나 자신이 좋았다. 나는 내가 그런 사사로운 기준과 평과들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아니, 착각하고 살았던 것일까?
날 것의 나를 노출시키고 평가의 재단에 올라서야 할 때가 되니 나는 너무나도 괴로웠다. 사르트르의 말이 떠올랐다. 타인은 지옥인 것이다. 타인 앞에서 우리는 나약하고 또 지독히 나약하다.
반지하 방, 작은 아파트, 외각의 동네에 사는 사람, 그것으로 수집되고 처리되는 하나의 데이터로 존재하는 사람들. 외모나 성격 어딘가가 비뚤어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본인이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여겨온 사람들. 그래서 실제의 본인을 보여주기가 극도로 공포스러운 사람들. 그럼에도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노출하며 살아내는 사람들. 그렇게 하루하루 취약성을 끌어안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예술가이다. 무대 위로 날것의 자기 자신이 내던져짐을 받아들인 사람들. 그들뿐이 진정한 예술가라는 생각이 든다.
절대적 공포 (Absolute Terror)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결계를 AT 필드라고 한다. 그가 좋아하는 에반게리온이라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용어이다. 슬쩍 보기엔 뻔하디 뻔한 외계 생명체를 싸우는 로봇 이야기 같겠지만 사실은 살아감, 관계를 맺음, 그리고 그것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취약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애니메이션이라고 나는 느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대사가 있다. "너는 내 안의 너이고, 나는 너 안의 나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치명적 대미지를 받아들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하나가 되려는, AT 필드를 내려놓고 절대적 공포와 맞서 싸우는 이야기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의 참으로 별난고 못난 부분들을 노출시키면서, 그 날 것의 모습으로 타인이라는 지옥에 들어갈 수 있냐는 질문을 내게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는 나를 집으로 초대함으로써 본인의 치명적 데이터를 노출시키고 본래의 모습으로 나라는 지옥을 맞이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잘것없는 나의 보통의 집이 초라한 게 아니다. 철저하게 선별적인 데이터로만, 연습하고 준비한 모습으로만 무대에 스려는 나의 모습이 실망스럽고 실로 초라한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준비가 다 되어서, 완벽한 모습이어서 타인과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마땅히 소속감을 느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너무나도 두렵고 고통스러운 취약함과 함께하는 하루하루 속에서 조금씩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짐을 통해 아름답고 고통스러운 타인과의 관계를 이루고, 관계가 있는 삶을, 인간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도 그에게 닿기 위해 참담하게 보잘것없는 나의 본래의 모습으로 낱낱이 벗겨지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음미하겠다. 아마도 몇 번이 곤 손등이 할퀴어지는 순간들이, 절대적 공포와 맞서 싸우고 지고 또 싸우는 절절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완벽하지 않은 모습으로, 아무것도 준비하지도 연습하지도 않은 채 아무런 결과도 예상하지 못하는 무대로 나를 던져버리겠다. 취약함을 끌어안은 끝의 찬란한 이어짐, 나눔과 함께함, 용기, 예술 그리고 살아 있음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기쁨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