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사실을 알렸다. 근무시간이었기에 아이메시지로 임태기 두줄의 사진을 그에게 보냈다.
원래도 특이한 사람인건 알았지만, “The baby is gonna be a gemini!”라고 답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둘 다 퇴근하고 얼굴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 그는 약간 설레고 신나는 표정을 한 채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걱정을 털어놓았다, 나 조차도 어린애인데 내가 애를 키울 수 있을까 하고.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나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신뢰를 보여줬다.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I thought it would be okay just as is. That there would be something of me left in this world.”라고 수줍은 고백을 하듯 나에게 말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자연스럽게 지난 몇 줄을 같이 되짚어 보다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이전의 애인들이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을 일이었다고 그도 나도 격한(?) 동의를 했다. 그랬다. 실제로 지난 애인들과는 달랐다. 여태 나는 섹스 앞에서는 적이라도 마주하고 있는 여전사 마냥 방패에 철옷에 언제든지 상대를 무찌르고 뛰어나갈 준비가 돼있는 태도였다. 그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낙원에 떨어진 한 마리의 가녀린 사슴 같은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회사에서 저녁을 먹으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지 말자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이제부터는 맛있고 건강한 거 잘 챙겨 먹자며 내 손을 잡았다.
임태기에 두줄을 마주한 것은, 어느 8월 중순 수요일이었다.
늘 그렇듯, 아침 일찍 눈을 떠서 회사로 걸어가던 중 논리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삶에 대한 짜증을 느꼈다.
회사로의 길은 왜 이렇게 멀며, 이마로 내리쬐는 햇볕은 또 왜 이렇게 강렬한 거며, 몸뚱이는 왜 이렇게 무거운 건지.
여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삶에 대한 찐득한 무력함과 혐오가 온몸을 퍼져나갔다. 분명 낯선 것이었던 이 감정은 금방 친숙한 것이 되어 마치 늘 이런 감정을 느꼈다듯이 나는 무엇을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이며, 언제까지 이렇게 지긋지긋해야 하는지,라는 생각을 되뇌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어제저녁에도 늘 하듯이 팀원들이랑 퇴근 후에 회사 근처 강가를 러닝 하는데 누가 내 발목에 쇠사슬이라도 차 놓은 것같이 발이 안 떨어졌다. 다른 팀원에 비해 뒤쳐지는 스스로를 보며 느꼈던 어제의 자멸감이 다시금 내 몸에 퍼져나갔다. 몸이 고장 난 건가, 정신이 고장 난 건가 눈썹을 찌푸린 채 회사에 도착했다.
회사에 도착하고 나는 이상한 두통과 매스꺼움을 느꼈다. 두통을 모르고 살던 나는 꽤나 당혹감이 들었다. 급하게 네이버 검색창에 나의 증상을 나열하고 엔터를 누렀다. 모든 결과에 임신가능성이 적혀 있었다.
나는 콧웃음을 치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바로 회사 병원에 가 임태기를 샀다.
회사 화장실에 들어가 결과를 기다리는 1분간 나는 '아, 드디어 나에게 설마설마하는 일이 실제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건가? 하긴 여태까지 살면서 운이 너무 좋았지.' 이런 이상스럽게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지갑을 공용자전저 바구니에 넣어 놓은 채로 반납한 2시간 뒤에 그것을 깨닫고 '설마설마 누가 주어 갔겠어?'라는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반납 장소로 뛰어갔을 때 내 지갑은 고스란히 그 바구니에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나를 두렵게 한 '설마설마'의 상황은 나를 늘 비껴갔고 나는 그런 오만함으로 살아왔다. 이번의 설마도 나를 비껴가리라, 나는 자신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주한 두 줄.
헛웃음이 나와 잠시 화장실 문에 얼굴을 처박고 웃었다. 침착하자, 이제 어떡하지?
일단 마음을 추스르고 자리로 돌아왔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추슬러지더라. 오히려 임신이 가능한 건강한 몸을 가졌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 나를 찾아왔다. 내가 이렇게 긍정적인 인간이었던가, 하는 웃음도 나왔다. 여러 번 몸뚱어리를 가혹하게 굴려 잘 보살피지 않은 덕에 생리를 오랜 기간 잃었던 적도, 불순이었던 적도 많았기에 나의 마음 한편에는 늘 내가 난임이나 불임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말인지 처음 이 국면을 맞이했을 때는 안도감이 지배적인 감정적 반응 중 하나였다.
초기에 입덧으로 땅바닥에 누워만 있었던 중, 그는 나의 편의를 위해 많이 애써줬다. 왜 동물이 짝을 이루어왔는지, 이렇게나 의존적이고 나약한 나의 모습을 보니 전 진화과정이 납득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와중 중국에서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방문했다. 주로 그의 집 방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던 한 마리의 나무늘보였던 나는 나의 자취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신기하게도 입에 댄 적도 없던 음식이 자꾸만 생각났다. 그러다가도 조금만 내 예상과 빗나간 맛이면, 롤러코스터에서 떨어질 때 느껴지는 내장이 뒤집히는 것 같은 매스꺼움이 몰아쳐 왔다. 서있기도 싫고 앉아 있기도 불편하고 누워도 썩 유쾌하지 않았다. 땅바닥을 구르면서 끙끙거리기도 했다. 역시나 혼자는 무리일 거 같았다. 그도 그걸 느꼈는지, 부모님께 하루빨리 말해서 같이 사는 게 좋지 않겠냐 제안했다.
여태까지 우리는 동거에 대해서 결사반대 해 왔다.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두 사람이었기에, 그 개인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절대적 존중이 있었다. 최소 우리에게 있어 (사실 그 어떤 애인관계도 마찬가지라 감히 단정하고 있었지만) 동거만큼 그 관계를 빠르게 단절시키는 것이 없다 여겨왔다. 합리를 중요시하는 우리에겐 필요가 없었더라면 동거는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을 것이다. 철저한 필요에 의해서, 그 어떤 낭만적 감정도 열정적 정렬도 없이 우리는 빠르게 삶의 바운더리를 허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의 어머니가 저녁을 해주시겠다며 집으로 초대해 주셨고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응했다. 집 앞 공원 근처로 데리러 나온 그와 함께 어떻게 이 소식을 전할지 고민했다.
“Just tell her that she is gonna be a grandma, like in a lighthearted way.” 내가 말했다.
“I don’t think she’s gonna get it.”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저녁을 먹기 시작했는데, 그가 말할까?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자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그는 중국어로 내가 알 수 없는 여러 말을 반복했다. 그녀는 나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그가 엄마가 축하한대, 날 거 먹지 말라는데 익힌 반찬 위주로 먹어,라고 말한 후 어머니와 대화를 이어 갔다.
몇 분 뒤 여동생이 집에 돌아왔다. 나랑 그는 밥을 아직 먹고 있었고, 현관문을 열어주신 어머니가 동생에게 뭐라고 말했다.
동생은 방에 짐을 두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Congragulations. I can’t be happier for you two. Why didn’t you tell me earlier?” 이러면서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를 살짝 쳤다.
눈물을 흘리다니, 나는 이 정도의 환영과 축복을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수줍게 앉아서 고맙다만 반복해 말했다. 임신을 했다는 것은 축복받아 마땅한 일이구나. 주변사람들의 행복 속에 아이가 생기고, 태어나야 마땅한 것이구나라는 당연한 진리를 처음으로 마음으로 느꼈다. 아직 실감하지 못해 불안과 불만 투성이었던 스스로에게 처음으로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용기를 느꼈다.
“I was having such a bad day. But you made it so much better. Really, so happy for you.”라고 밥을 먹으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던 그녀였다.
그날 어머니와 여동생은 중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선물이라도 사 줄 수 없었던 게 미안하다며 내게 돈봉투를 쥐어주셨다. 그리고 엽산을 4통이나 챙겨주셨다. 그 엽산은 사실 여동생이 임신을 준비 중이었기에 특별히 처방받은 약이었다.
그의 가족분들이 알게 되자, 모든 것은 확정이 된 셈이었다. 그는 내게 언제 나의 가족에게 말할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심저로부터 극한 공포를 느꼈다. 마치 양아치 남자친구랑 사고 쳐서 임신사실을 알려야 하는 중학생이 된 것 마냥, 나는 움츠려 들었다. 그뿐일까 나는 내 지인 누구에게도 이 상황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렇게 속이 타드러 가지 못해 나는 일본어 회화 수업을 빌미로 처음 보는 강사님들에게 속내를 털어 냈다. 혼전임신에 대해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변 여성인 친구들은 결혼과 출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부터 해서 산부인과에 가도 내가 어떤 증상이 있는지, 앞으로 어떤 것들을 주의해야 하는지 의사 선생님도 내 말을, 나도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하소연까지. 그렇게 처절하게 외로웠다 나는. Shame and isolation go hand in hand. 떳떳하지 못함의 벌은 가혹한 고립인 것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이 결과가 내가 표면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과 삶의 태도와 너무 모순된다는 것, 그리고 그 모순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날이 되어서 엄마에게 꺼내 놓았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나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답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였어도 지금 상황인 사람을 답 없다고, 한심하다고 생각할걸? 겉으로는 그렇게 자기 주도적 인척, 인생의 모든 것을 계획하고, 금욕과 단련하는 척하더니.” 아침밥을 먹다가 들은 엄마의 이런 말에 나는 밥알이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누구보다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엄마까지 그렇게 말할 필요 없어.”라고 꾸역꾸역 답했다. 엄마도 나에게 비수를 꽂았음을 느꼈는지,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엄마가 처음부터 이런 반응이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어쩐지 배가 좀 나와 보이더라."라고 가볍게 대답했다. 그때는 엄마 마음속에 임신중절이라는 옵션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설득시킬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당황했지만 침착한 반응을 보였다. 며칠간 같은 대화가 계속 반복되고, 끝내 나는 중절수술에 대한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 엄마는 최후의 수단으로 내 마음에 비수를 꽂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딸의 인생을 복귀시키고 싶다는, 그 간절함은 나도 이해한다.
나도 수천번 중절수술을 할지 고민을 했다. 자다가 갑자기 내 인생이 끝나버린 것 같아서 눈물을 쏟으며 혼자 끙끙거린 적도 있다. 그러다가 언젠가 낳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중절수술이라는 비용을 택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결국 중요한 선택 앞에서 고려하지 말아야 할 매몰비용의 늪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미 몇 주나 고생을 했는걸? 이미 병원에 쓴 비용이 있고, 조금씩 준비한다고 산 물품들이 있다는 것이 나를 자꾸 합리화시켰다. 나의 마음은 통곡스러웠다, 조금이라도 빨리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간은 흘렀다. 시간이야말로 가장 큰 매몰비용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아서, 규탄스러웠다. 그러다 혼자서 자기 합리화를 하기에는 정신승리에 역부족임을 느꼈는지, 만나는 친구들마다 일찍 아이를 낳는 것이 오히려 인생에 좋을 수 있다는 논리를 계속해서 외쳤다. 이 친구가 갑자기 미쳤나,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직 대학생인 친구를 붙잡고도,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는 친구를 붙잡고도 나는 절규했다. 나에게 동의해 줘, 내가 좋은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는 자그마한 위안이라도 줘,라고 나는 울부짖었다. 나는 참으로 서글펐다. 축복받지 못한 임신을 했구나, 내가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말하지 못할 선택을 해버렸구나, 나의 아이가 수치, 후회, 절망의 산물이 되었다는 것이 서글플 만큼 미안했다. 엄마도 말했다, 축복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내 뱃속의 무언가가 축복받지 못하는 것이 내 마음을 이렇게 괴롭히는데, 나의 엄마는 축복받지 못하는 나의 상황이 얼마나 개탄스러웠을지, 그 마음을 이해한다.
임신을 하게 되면서 한편으로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해방감을 느꼈다. 숨통이 탁 트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오랜 기간을 강박 아래 살았다. 굉장히 가혹하고 각박한 틀 안에 스스로를 몰아넣으며 살았다. 사소하게는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는지,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 어떤 취미활동이 허용되는지에 대한 것이었고 거시적으로 보자면 스스로가 거추장스럽다고 느껴질 만큼 욕구에 대한 자제와 절제로 옥죄며 살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자유롭기 위해서, 스스로를 필요에서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결핍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 참된 해방이라 생각했다. 그런 강박으로 사람을 잃기도 하고 건강을 잃기도 하고,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나는 이 삶의 방식을 놓는 것이 많이 두려웠다. 임신을 하고 내 몸이, 내 정신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나는 그 두려움에서 스스로를 놓아줄 수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편안함을,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끝내 허용하게 되었다. 호르몬의 변화로 나는 급격하게 피곤함을 느끼거나, 말도 안 되는 식욕과 식탐을 느끼기도 하고, 무기력하기도 했다. 그것이 한 아이의 집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면 나는 늦잠을 자도 되고, 낮잠을 자도 되고, 마음이 가는 대로 먹어도 되고, 남는 시간에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느긋하고 안락한 삶의 가능성을 나는 맛보게 되었다. 자신에게 가하고 있었던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 자해로부터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느긋느긋 회사로 걸어가는 어느 날 아침 햇살을 맞으며 나는 이 자유에 대한 짜릿함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처음으로 나에게 찾아와 준 손님에게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처음 든 생각 중 하나는, 9월 중순에 꽤 험한 등산이 예정되어 있는데, 어떡하지? 와 11월 말에 마라톤이 예정되어 있는데 어떡하지? 였다. 그 둘을 포기할 마음이 나에게는 일절 없었다. 아니, 나에게는 임신을 함으로써 그 어떤 것도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아이를 위해서 희생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어떻게 해서라도 하고 싶었던 일을, 계획되었던 일들을 끌고 간다. 막연한 낙천으로, 나는 건강하니까 할 수 있어, 어떻게 되겠어?라는 한없이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임신 10주 즈음에 나는 일본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에 올랐다. 무려 3일간 12시간씩 등산을 하며 겨우 정상에 올랐다. 약간의 암벽을 타야 했던 길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비가 오는 와중에도 나는 강행했다. 엄마가 내게 중절수술을 권할 때 수백 번도 반복했던 논리가 이 부분이었다.
"진심으로 아이를 소망하고 간절하게 바라왔던 엄마들이 어떤지를 한번 봐봐. 조금만 이상 있으면 바로 병원 달려가고, 조금이라고 위험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무리 사소해도 조심하는 게 엄마의 마음인 거라고." 나는 조금의 반박도 못한 채 침묵해야 했다. 그 말이 백번이고 맞았다. 나의 삶의 어떤 부분도 맞바꾸고 싶지 않은 채 그저 일어난 해프닝으로만 여기고 있는 나에게 엄마가 될 수 있는 자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아빠가 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안다. 일본은, 내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출산 환경이 열악해서 임신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분만실을 예약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시설에서 적절한 비용으로 분만을 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분만 비용도 700만 원이 넘는다. 산후조리라는 개념도 없다. 그래서 이미 수차례 마음이 갈팡질팡하면서 분만실 예약의 시기를 놓쳤고 어렵게 찾은 곳을 방문해서 예약금을 내야 하는 것이 10월 4일 토요일 10시였다. 이것도 이미 여러 번 산모의 모국어가 일본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퇴짜를 맞은 후였고, 이 병원도 이 부분에 대해서 우려를 많이 했기에 전화로 예약할 당시 나에게 무슨 리스닝 테스트라도 하는 것 마냥 쓸데없는 말을 빨리했다가 어렵게 말했다가 하면서 나의 이해력을 시험했다. 이 모든 과정이 나를 너무 지치게 했다. 언어를 잘 모르는 해외에서 외국인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더 이상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굉장히 커다란 한 실체가 있는 두려움과 피로로 다가왔다. 그래서 10월 3일 금요일에 그에게 내일 병원 예약에 대해서 상기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당일 아침 9시 반이 될 때까지 우리는 나갈 준비도 하지 않았다. 다른 분만실을 찾는 것이 불가능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을 그가 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의 병원예약을 잊어버렸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도 이 임신과 출산이 높은 우선순위가 결코 아니다. 이를 곱씹으며 중절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또 찾아보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둘 다 강하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자연히 생긴 일을 거스를 마땅한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 새로 만들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이미 만들어진 것을 없앨 이유가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자연의 섭리를 아무런 적극성이 없이 그저 물 흐르듯 받아 드린 채 또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한 아침, 아니, 정확히 10월 12일 아침,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최종합격했다는 이메일과 함께 오퍼레터가 도착했다. 어느 정도 결과를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상당한 연봉과 혜택이 적힌 오퍼레터를 읽고 나니 도파민이 미친 듯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 중 오퍼레터에 수습기간이 6개월이라는 부분에서 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나의 예정일은 절대로 그 수습 기간 도중일터였다. 드디어 임신중단을 적극적으로 선택할 타당한 이유를 찾은 거 같아 묘상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자연을 거스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된 것에 부끄럽지만 나의 마음은 들떴다. 나는 그에게 최종합격 됐음을 알렸고, 그는 환한 미소로 축하를 거듭했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수습기간 도중에 출산을 하게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마이크로소프트는 Diversity & Inclusion을 회사의 어떤 경영 프린시플보다 높은 우선순위로 두고 있기에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그럼에도 최근 거대 테크 기업들의 구조조정과 어쨌든 수습기간에는 어떤 이유를 붙여서든 계약을 만료시킬 수 있다는 점이 그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기에 중절을 하겠다는 나의 선택에 힘을 실어 줄거라 믿었다.
"Not sure why a job can suddenly change everything."
라는 그의 말 한마디에 나는 잠시 넉을 잃었다. 그는 절대적으로 나의 선택을 존중할 사람이었다. 그저 정말 진심 어린 호기심으로 내게 반문해 온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회사 네임 벨류 따위가 인생의 다른 중대한 문제를 결정짓는 요소가 전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굉장히 들떴던 나의 마음이 부끄럽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답을 찾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회사 타이틀이 뭐라고 갑자기 어떤 결정을 할 수 있는지, 그 허영심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나보다 훨씬 멋진 엔지니어였고, 능력도 출중하지만 그에게 회사의 이름은 이직을 하는 조건에 조금도, 티끌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나는 여태껏 그의 그런 부분을 존경해 왔기에 사실 대단한 이름을 가진 회사라는 이유로 지원을 하고 합격을 한 스스로가 어쩔 때는 부끄럽기까지 했다. 나는 무슨 허영을 쫒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안타깝게도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합격 소식을 알리자마자 전화가 왔다. 그녀와의 통화 때문에 많이 울었다. 네가 그렇게 확실하게 원했던 커리어가 이제 막 시작하려 하는데, 원하는지도 모르는 어떤 것으로 왜 계획하고 원했던 것을 잃을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냐고. 아이는 언제든, 몇 년 뒤에도 언제나 가질 수 있는 옵션이라고. 자신도 너를 갖기 전에 한 번의 중절수술을 했었다고. 요즘 젊은 애들은 얼마나 똑똑하게 예정일까지 계산해서 계획임신을 하는데, 라며 거듭 나를 생각한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 취급했다. 그녀 말에도 나는 아무런 부정도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이쯤 되니 이 문제는 더 이상 아이를 키우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의 기대를 저버릴 것인가의 문제가 되었다. 그것이 나를 너무 혼란스럽게 만들어 눈물이 자꾸 나왔다. 누구의 기대를 저버리는 게 덜 고통스러운지로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선택을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이 기준을 중축대 삼으려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아이가 있는 재인의 삶, 아이가 없는 재인의 삶의 긍정 부정을 따지지 않았다. 그것 어느 쪽 이어도 진심으로 상관이 없을 거같이 느껴졌다. 나는 그저 나의 선택으로 내가 앞으로 그와 나의, 또 나와 엄마와의 관계를 좋게 나아갈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싶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엄마는 내게 한국행 비행기표를 사라고 끝까지 고집했다. 한국에서 수술을 하고 몸조리를 제대로 하고 돌아가라고.
나는 마지막까지 비행기표 잔여석을 확인했다. 결제는 하지 못했다. 망설임에는 이유가 있다. 처음부터 그랬다. 처음 임신사실을 알게 된 그날부터 나는 섣불리 중절하고 싶지 않았다. 막연하다면 막연한 느낌이었다. 이 결과값을 정녕 원치 않았다면 나는 그 누구보다 이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를 안다, 내 삶을 어떠한 대충이나 운명 같은 것에 맡길 생각은 어려서부터 눈곱만큼도 없었다. 철저한 노력, 의도한 방향성으로 나는 내 삶을 쌓아왔다. 그렇기에, 이 결과값은 내 마음 심저 어딘가에서 허용했던 삶의 가능성이었던 것이라는 논리가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합리적으로 납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절 수술이 가능한 13주 마지막 날을 향해 나아갈 때 나는 정신이 분열될 거 같은 혼란에 빠졌다. 비행기 표를 구매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면, 자던 와중에 어린아이가 방 앞을 뛰어가는 허영 같은 것도 보였다. 그러다가도 그 작은 것을 내가 직접 놀아주고, 귀여워해줘야 할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가 너무 낯설어 역시나 이 길은 나의 길이 아니라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길 가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으며 눈을 못 떼기도 했다. "내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 모든 무력한 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라는 에드리 프롬의 사랑의 기술의 한 대목을 되뇌며, 나도 모르게 무력한 것들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내가 확실한 대답을 정하게 된 것은,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한 확고한 대답이 없다는 기사를 본 후였다. 나는 아이를 원해! 나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 두 부류보다도 원하는지 안 원하는지 모르겠어! 가 훨씬 큰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내가 ‘지금’ 원하지 않는 건지, 그렇다고 몇 년 뒤에 원하게 될지, 아이가 있는 삶에 대한 어떤 확신은 없었고 그것이 시간이 흘렀다고 생길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이가 있는 삶을 살아보지 않고는 절대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미지의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스스로를 단두대에 던졌다. Leap of faith. 심사숙고에 숙고를 다한 후에도 갈리는 문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pros and cons를 나열하는 것은 정신분열, 심적불안정 만을 야기한다. 이럴 땐 한쪽으로 스스로를 과감히 기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 비행기표를 사지 못했다고, 내가 하루빨리 엄마가 되어 드디어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되는 날이 기다려지지 않냐고 장문의 카톡을 남긴 채 나의 선택에 영원히 머물렀다.
"그래서 태명은 뭔데?"라고 몇 주 뒤 나와 그를 방문한 엄마가 말했다.
"우리끼리는 농담으로 나또라고 불러."
임태기로 확인하기 전 주말, 그가 아침이 준비되었다고 불러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눈앞이 까매지면서 쿵하는 소리를 들었다. 눈을 떠보니 땅에 자빠진 나를 붙잡고 있는 그가 있었다. 가끔 저혈압으로 너무 빨리 일어나거나 하면 흔히 겪는 것에 내가 발을 잘못 디뎠을 뿐이라 생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침을 먹는데, 낫또 포장지를 열자마자 대장이 꼬일 것 같은 매스꺼움을 느껴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참 이상하다, 그렇게 좋아하던 낫또인데. 매일 먹던 낫또인데. 더위 먹어서 입맛이 바뀌었나 하고 말았던 것들이 임태기 두줄을 확인하고 주마등처럼 스쳤다.
이때 일을 엄마한테 말하면서, "그걸 계기로 임신임을 알게 되어서 나또라고 불러."
"태명은 원래 좋은 뜻이어야 하는데."라고 말을 흐렸다.
그러게. 복덩이, 선물, 뭐가 되었든 사랑스럽고 귀엽고 축복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을 태명으로 하던데,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지. 엄마 될 자격이 없다 또 다시금 확인받은 기분이었다.
엄마가 할머니에게 나의 동거사실을 알렸다 했다. 아직 임밍아웃은 하지 않았다 했다.
"나 걱정하지는 않아? 임신할까 봐.." 이렇게 말하니,
"전혀, 오히려 할머니는 나를 걱정하더라."라고 엄마가 답하고 잠시 후 덧붙였다.
“나 딸 하난데, 나 외롭진 않을까 봐.”
누구보다 나를 생각해 주는 엄마도 누군가의 딸이었다. 그래서 안도감이 들었다.
엄마 친구 민선이 아주머니의 남편분이 암으로 돌아가셨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엄마가 전화 버튼을 눌렀고, 수화기 너머로 민선이 아주머니의 통곡소리가 들렸다.
“공부 못하고 그래도, 하나 더 낳을 걸, 남편 닮은 새끼 하나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야. 얼굴만 닮는 게 아니더라, 소름 돋게 남편이 내게 해줄 것만 같은 말을 민선이가 해준다고.” 그 말을 듣고 예전에 그와의 대화가 생각나다. 아이를 놓아주지 않기를 바란 그에게, 최악의 상황까지도 고려하고 하는 답이냐고 물었다. 우리 둘이 건강하고 행복하면 당연히 아이가 있는 것도 좋다고 느껴지겠지만 최악의 경우 내가 아프거나 내가 떠나버렸을 경우에도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느끼냐고 물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은 아이기에, 당연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키울 거 같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었을 당시는 잘 와닿지 않았지만 그는 나보다 훨씬 일찍 사랑 그 저편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20대 중후반이라는 어린 나이에 출산과 육아를 시작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그중에는 김수민이라는 아나운서가 있었고, 그녀의 유튜브 채널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녀가 자신의 어떤 것도 아이와 맞바꾸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무너지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다. 그녀뿐 아니라, 이전의 모습과 이전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여성들의 혹독하고 지독한 우울증을 목격했다. 나도 나의 삶을 사랑했고, 나의 꿈과 나의 젊음 그 어떤 것도 아직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작게는 예정된 등산도 마라톤도, 크게는 유럽으로 이직하는 것 미국에서 석사공부하는 것, 그 어떤 것도 나는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나의 삶은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을 거고, 뿌리째 흔들릴 것이고, 그리고 나는 무너져 곤두박질 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을 내려놓기로 했고, 다가오는 위대한 변화를 기꺼이 몸소 받아내리라 생각했다. 오히려 가볍게, 될 대로 되겠지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