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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Roland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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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Apr 19. 2024

4월 20일 요츠야역

쌤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월등히 많아졌다. 밤이 다가올 때면 집으로 향해야 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고 그는 그런 나를 잡아줬다. 그의 존재가 숨 막혀 올 때 즈음 나는 육체적 안락함과 정신적 피폐, 정신적 안락함과 육체적 피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집으로 돌아갔다. 최선의 선택이란 없었다. 차악을 택할 뿐.


그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그의 생활 패턴 중 몇몇 특징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그는 해가 진 후에야 연구실로 출근을 해서 해가 뜨기 직전에 퇴근했다. 

“가능하면 다른 학생들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학교에 불편한 사람이라도 있어?”

“아니, 이제는 아는 사람 거의 없는데. 그냥 사람 소음도 피하고 싶고 햇빛도 피하고 싶고.”

실제로 그의 방 안 커튼이 열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별생각 없이 했던 추측이었지만 그의 대답으로 그 이유를 확인받았다. 

한적한 등산로거나 러닝 하기 좋은 드넓은 공원이 아니라, 그와 같이 직장인과 학생으로 붐비는 요츠야 근처를 걸어 다니다 보면 종종 그가 인간에게 감지하고 표출하는 깊은 혐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휴대폰을 하느라 앞사람과 부딪히는 사람, 자전거를 인도에서 타는 사람이라도 발견하면 그는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며 혐오감을 표현했다. 본인은 타인과의 어떤 접촉 어떤 피해에서도 벗어나고자 끝없는 노력을 하는데,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배신이라도 느끼는 것 같았다. 그가 모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모습은 참 그 다운 신사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끝에 돌아오는 배신에 대한 분노는 참 그 답지 않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가 베푼 것에 대해서 마땅히 베풂을 받기를 기대하는 것인가? 어느 인간이 그런 임의의 기준을 이해해 준단 말인가.


한 번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큰 오토바이에서 엔진 소리가 나서 나도 모르게 이 소리가 그를 자극할까 그를 쳐다봤다.

“That is music to my ear.” 그의 말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사회적 스트레스 요소에만 반응하는 것인가. 오토바이 엔진이 하나의 멜로디인데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여학생들이 까르르 웃는 것, 길거리에 남학생들이 모여 큰 소리 내는 것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였다. 하지만 또 루카스나 내가 큰 소리로 웃거나 남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을 법한 장난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본인도 같이 동참하며 용인해 주었다. 그에겐 모든 걸 다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에 대한 기준이 굉장히 뚜렷해 보였고, 자기 사람에게 모든 박애와 용인을 퍼다 준 나머지 인류에게 베풀 어떤 티끌만큼의 애정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집에서 몇 날 며칠을 보내기도 하는 날들이면 나는 부지런히 일을 하기도 하고, 일과 관련된 개인 공부를 하기도 하고, 독서와 일본어 공부 등에 열중했다. 그런 나를 옆에 두고 그는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니코틴 패치를 즐기고, 니혼슈를 마시며 종종 낮잠을 자곤 했다. 나는 최대한 그에게 일상적인 것들로만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럼에도, 나 딴에의 진지한 노력에도, 거스를 수 없이 본능과 같이 그라는 우물을 파고드는 질문을 계속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가 왜 때문에 개별 인간들에게는 넘치는 애정과 희생을 보이면서도 인류랄지 사람 전체에게는 경멸에 가까운 감정을 갖는지. 마이클의 어떤 부분이 거슬리는지, 루카스와 원준이의 관계가 건강하다고 생각하는지. 어머니에 대한 염증과 아버지에 대한 동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의 빛과 소음에 예민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렸을 때 왕따의 기억이 지금 인격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 생각하는지, 그 이외에 다른 트라우마가 있는지.


“한 달 전에 내가 슌네 집에 놀러 간 날에 너는 마이클네 집으로 보드게임하러 간다고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를 데리러 왔었잖아.”

“응. 나는 솔직히 그 보드게임 모임에 환멸을 느껴. 오해하지는 마, 나는 그 누구보다 루카스를 아껴. 그가 원한다면 뭐든 할 수 있어. 스스로와의 약속도 어떤 신념도 저버릴 수 있어. 그렇다고 그가 전략적 인간인지 모르는 건 아니야. 그는 하고자 하는 게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도 그것이 실행되게 해. 그것이 주변 사람들을 죄책감으로 엮는 것이라도. 그의 ‘추진력'의 대가는 나와 원준이가 지불하고 있는 셈이지. ”

“죄책감?”

“보드게임 모임이라는 게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루카스가 계획하고 강행하는 그리고 그가 이상화한 우정의 체화 그 자체야. 거기에 임하지 않는다는 것은 배반을 의미하지. 그런 식의 상당한 죄책감으로 원준이나 나를 엮어두려 해.”

“근데 그때 일찍 그 자리에서 나온 이유는 루카스 때문이 아니라 마이클 때문 아니었어?”

“마이클은 마땅히 묻지 말아야 할 질문, 마땅히 하지 않아야 할 말을 몰라.” 마이클이 그에게 어떤 방자한 물음을 던졌을지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마이클과 단둘이 회사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을 때 그가 내게 한 말, 그 말의 어투에서 그 보드게임 모임에서 쌤이 어떤 종류의 공격을 받았을지 어림짐작이 갔다. 마이클은 쌤은 뭘 하고 지내냐고, 졸업할 생각은 있냐고, 졸업하고는 무슨 일을 하려 하는 거냐고, 나와의 관계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마치 쌤에겐 생각이라는 것이 없다는 듯한 어투로. 물론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나 또한 쌤의 일상을 지켜보며 그런 생각들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쌤은 본인이 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어떤 것들 때문에 마이클과의 만남에 그렇게 강한 거부감을 들어냈구나. 마이클 한 명을 떨어뜨린다고 그것이 숨겨질 거라 생각한 것인가, 나의 샤를.


“원준이도 루카스에 대해서 너랑 똑같이 생각하고 있어?” 나는 다시 루카스로 대화 주제를 돌렸다.

“응. 원준이와 루카스의 갈등이 사실 가장 심하지. 알다시피 원준이는 가능하면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 해. 그렇기에 루카스가 죄책감까지 씌우지 않으면 사실 얼굴보기가 엄청 어려워. 원준이의 친한 친구로서 그게 미안하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이 만드는 그가 밉기도 한 거지.” 

“루카스는 본인도 우울증으로 정신과 상담도 받고 약도 먹는다며. 원준이가 어떤 심리 상태일지에 대한 고려 및 배려를 왜 하지 않는 거야?”

“루카스는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게 무조건 옳은 것이기 때문에. 그가 원준이가 친구를 가끔 만나는 게 건강하다고 믿으면 그것이 정답인 것이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몇 년째 상담을 제발 받으라고 말해 왔어. 루카스는 본인이 나아질 수 있었다는 이유로 그 방법이 나에게 맞는 유일한 방법이라 고집해.”

나는 역시나 나 혼자만이 쌤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가 말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저 눈을 응시한 채 잠시 함구했다.

“나는 내가 혹시 자폐증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전문적으로 진단을 받아볼 생각은 없고?” 그는 내 눈을 피했다. 루카스가 여태 실패했듯이 그는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 않아 보였다. 

“모르겠어. 나도 알고는 있어. 내게 극심한 무드 스윙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다운된 상태로 보내. 근데 오히려 그것을 다행이라 느껴. 가끔씩 찾아오는 업된 기분은 결코 반갑지 않아. 올라간 기분 조만간 곤두박이칠 것을 의미하기에,  기쁨은 한상 불안과 슬픔을 동반해. 아마 나의 이런 모습을 이해해 주는 것은 루카스뿐일 거야.”

듣다 보니, 확실히 그를 잘 모를 때는 그가 단지 과묵하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자세히 들어다 보면 그에겐 벗겨지지 않는 우중충함이 있었다. 그러다가 무지개 같은 어떤 희귀한 기회가 찾아올 때만 그의 해맑은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을 잠시 볼 수 있었다. 그 순간들은 쌤이 루카스와 맥주를 마실 때라던가, 집에서 나와 단둘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볼 때 정도였다. 그가 수업에 무관심했던 것도, 깊은 대화에 임하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뇌 속 즐거움 스위치가 너무 오래 꺼져있어 삶의 의지가 너무 희미해져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덧붙인 설명이 어떻게 자폐증을 의심하게 된 건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웠다. 오히려 그가 설명하는 증상들은 경계선 성격장애에 더 가까워 보였지만 그가 그런 병명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루카스는 어떤 이유로 상담을 받고 있는데?”라고 말하며 주변에 정신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스쳤다. 

“처음에 브라질에서 일본으로 왔을 때는 가족들은 아직 브라질에 있었거든. 갑작스럽게 완전히 변한 생활과 외로움 등으로 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았어. 약을 복용하고 상담도 하면서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그럼에도 쌤은 각자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 본인의 해결방법을 강요하는 루카스를 부담스러워했다. 정신건강은 보드게임이 아니다. 본인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강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문득 자신의 중지에 있는 타투로 시선을 옮겼다. 

“내 중지에 있는 타투가 무슨 뜻일 것 같아? 사실 나는 어느 순간 이래로 한 번도 진심으로 즐겁다고 느껴본 적이 없는 거 같아.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담담히 말하는 그의 모습에, 이런 상태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계속 함구했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에게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 이 타투를 받았어. 일부러 잘 보이는 손에.”


樂. 즐길 락. 흥이 넘치는 그런 신나는 즐거움보다는 평온한 안락함을 연상시켰다, 그에게 있어서는. 고통이 끝남에서 오는 평온. 끝남의 가능성에서 느껴지는 해방감 혹은 자유.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끝일 수 있다는 안도감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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