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Roland 28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인 Oct 24. 2024

9월 17일 시나가와역

오늘이 바로 모두가 반쯤은 가기 싫지만 반쯤은 기대하던 이즈 여행날이다. 어느 때와 같이 루카스의 강제인 죄책감 게임으로 성행되었기에 마이클, 리타와 내가 일해야 하는 금요일에 출발하게 됐다. 우리 셋은 시나가와 역에 일찍 집합해 오전 미팅을 끝내고 신칸센에 올라타서도 일을 계속해야 했다. 모두가 어쩌면 예상한 대로 원준이가 늦잠을 잤기에 키아나와 원준이는 제시간에 신칸센에 타지 못했고 어느 때와 같이 그 때문에 화가 나 있는 루카스를 달래며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 여행에서 벌어질 일들은 반년 전 신년파티 때 예고되어 있었다. 반복되는 행동 패턴, 쌤과 원준이와 루카스의 서로 주고받는 무거운 관계의 짐, 그 역학이.


그러니까 신년파티 때 지진과 끝없는 스위치 사이에는 쌤과 쌤의 우울증이 있었다. 저녁이 끝나고 나는 테라스에서 카즈와 둘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카즈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고 코로나 시작과 함께 닌텐도 주식을 많이 사둔 게 신의 한 수였다는 등의 입담으로 나의 흥미를 끌고 있었다. 쌤은 그의 말에 처음에는 적절히 반응을 하며 틈틈이 웃기도 했다. 머지않아 쌤의 말수는 적어지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졸려서 방 안으로 들어왔고 둘은 한참을 밖에 있었다. 카즈는 곧 루카스를 불렀고, 루카스와 쌤은 오랜 시간을 밖에서 꽤나 큰 소리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쌤은 내내 울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그 마음의 짐을 루카스가 힘겹게 짊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루카스가 주관한 이번 여행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노고스러운 일에서 그는 스스로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었다. 멋진 숙소를 골랐지만 실제 예약은 마이클이 했으며, 메뉴를 선정했지만 장을 보고 불을 지피는 것은 쌤은 몫, 설거지와 뒷정리는 알렉스 및 우리의 책임이었다. 술을 나른다거나 하는 일에 대해서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루카스가 모두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리지만 결국 땀을 흘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었다. 쌤이 요리 손질을 위해 잠시라도 고민을 하는 틈을 보이면, 루카스는 바로 노는 노동력이라 간주하고 “Common, help me out man.” 책망하는 눈빛으로 장바구니를 가리켰다. 쌤은 바로 미안하다는 몸짓으로 그의 명을 따랐다. 나는 그의 교묘한 권력질을 단번에 알아채 버렸다. 나의 온몸이 그에 대한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숙소는 총 3층으로 된 오션뷰의 멋스러운 오두막이었다. 2층에는 두 개의 방과 널찍한 다이닝과 커다란 한 텔레비전 앞에 넓은 소파가 있었다. 부엌에는 요리를 손질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카운터와 고급 조리도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3층에도 두 개의 방과 바비큐를 할 수 있는 넓은 테라스, 남자 여자 온센이 각각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루카스는 저녁에 필요할 숯을 사러 나갔다. 키아나와 원준이는 1층의 가장 넓은 방에 들어가 버렸고, 나와 마이클과 리타는 다이닝에 자리를 잡고 일을 마저 했다. 리타는 신칸센을 기다리는 플랫폼에서도 캐리어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채 일을 계속했었다. 마이클은 어김없이 그녀의 회사가 블랙이라는 농담을 했다. 


“수영하러 갈 사람.” 한 시간 정도 지나 루카스가 현관문을 들어오면서 외쳤다. 나는 그를 멀뚱히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즈까지 와서 수영을 안 한다고?” 나는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 노트북으로 눈을 내렸다.

그 말이 끝나게 무섭게 알렉스, 케인과 쌤이 모여 나갈 준비를 했다. 그들이 해변가를 가로질러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을 창가에서 바라보았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웃옷을 훌렁 벗어던지는 그들과, 천천히 비키니만을 남긴 채 겉옷을 벗는 케인. 그들은 한참을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겼다.


“왜 수영 안 해?” 창문 밖을 바라만 보는 리타를 향해 물었다.

“추워서 별로 안 당기네. 너는? 아, 맞다. 너 수영할 줄 모르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응. 물에 발이라도 담그러 갈래?”

“그래.”

우리는 그들이 있는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이 여행은 언제 기획된 거야?” 내가 물었다.

“8월 초인가? 쌤이 너한테 물어봤을 때일걸?”

“쌤은 나한테 8월 말에 물어봤는데. 그때는 엄청 가볍게 물어봤어. 확답을 받지도 않았고.”

“그래? 쌤이 단톡방에 너 온다고 너 부분 숙소 값까지 지불한 지 꽤 됐는데.”

“그래?”

“그나저나 이제는 사귀기로 한 거야?”

“응?” 나는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쌤 저번에 만났을 때 그런 말 하던데. 정확하게 물어보고 아니면 확실하게 정리할 거라고.”

“언제 만났는데?”

“유월이었나.”

“아. 그게.” 나는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정리가 안 돼 눈알만 굴렸다. 

“루카스랑 알렉스, 케인 다 그렇게 알고 있을걸?” 

“나는 그때 분명히 거절을 했는데.”

“진짜?” 그녀의 놀란 얼굴에는 많은 궁금증이 피어올랐지만 입 밖으로 그 길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나는 나의 속도가 존중받고 있지 못하고 느껴. 난 그의 선택을 온전히 존중하려 했어. 그가 나를 그만 만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까지 말했는걸.” 쌤이 왜 이들에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두지 않았는지 짜증이 났다. 일부러 모호하게 둔 것일까. 다른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말할 기회가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나는 사실 전 연애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정말 오래 만난 사람이랑과의 이별에서 아직 치유 중…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꽤 혼란스러운 눈을 하며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쌤은 그런 얘기 전혀 안 하던데…” 그녀가 말을 흐렸다.


“그나저나 원준이는 늦게 일어났는데도 결국 왔네?” 내가 주제를 바꿨다.

“아참. 너는 단톡방에 없구나. 아침에 원준이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아무래도 불참일 거라 신칸센 타기 이십 분 전 즘에 말한 거야. 원래 올 생각이 없었단 걸 의심하고 있었던 루카스는 그 메시지를 보고 거이 이성의 끈을 놓았지. 처음부터 오지 않겠다 말을 왜 못 하냐고, 너는 늘 그런 식이다, 그런 식이니까 친구가 없는 거라고 까지 말하더라. 이렇게 까지 노력하는 자신과 쌤과 마이클에게 미안하지도 않냐고 한참을 메시지 폭격을 했지. 그래서 결국은 원준이가 늦게라도 가겠다 한 거지.”

“루카스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다 성인인데.” 

“그러게. 원준이는 애초에 이 여행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 했어. 처음 여행 얘기가 나왔을 때 단톡방에 개인적인 건강 상의 이유로 이번에는 어려울 거라 했는데 루카스가 그렇게 은둔하니까 정신이 더 병드는 거라고 키아나도 있는 방에서 엄청 길게 메시지를 보냈지.”

“가스라이팅인 거 모르나. 우정 맞아?” 원체 루카스가 맘에 안 들었던 내가 말했다.


다시 숙소에 돌아왔을 때 수영을 하러 갔던 이들이 모두 샤워를 마치고 2층 거실에 앉아있었다.

“보드게임 할 사람?” 루카스가 물었다.

마침 원준이가 방에서 나왔고, 약간의 망설임 후 긍정의 침묵을 보였다. 나는 쌤 쪽을 바라보며 할 거냐는 눈빛을 보냈고,

“던전 오브 드래건만 아니면 할게.”라고 쌤이 말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루카스, 원준, 마이클, 알렉스 다 같이 쓴웃음을 보였다. 이전에 쌤이 루카스의 추진력에 대가를 본인과 원준이가 치르고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루카스의 자신감의 배후에는 그가 실행한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강한 집념이 있다. 자신이 이상적이라 여기는 상황들이 실제로 실행된 것은 그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증거라기보다 그의 억척스러운 고집임을 직시하지 못했다. 그 무지의 상태가 그를 카리스마 있는 영웅으로 만든다. 그것에 지친 쌤과 그것에 대항하는 원준이는 루카스 입장에서 자신의 우정, 그 헌신에 대한 배신이다. 

“Alright. No Dungeons and Dragons.” 

루카스는 비교적 간단한 보드게임을 골랐고 우리는 소파에 둘러앉았다. 

“Has anyone played Wavelength?”

알렉스랑 키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처음이니까 내가 설명을 해 줄게. 간단히 말하자면 마음을 읽는 게임이야. 일단은 팀원 중 한 명을 골라. 그 사람을 초능력자라 부를게. 초능력자는 과녁판을 돌려서 과녁의 위치를 무작위가 되도록 해. 그리고 카드를 하나 뽑아. 그 카드에는, 이를테면 ‘뜨거운’, ‘차가운’과 같이 상반된 의미를 가진 두 단어가 제시되어 있어. 그러면 이제 초능력자가 과녁판에서 뜨거움을 왼쪽 기준, 차가움을 오른쪽 기준으로 과녁이 있는 위치에 해당하는 예시를 말하는 거야. 지금 과녁이 뜨거움으로 11시 방향을 하고 있으니까, 음… ‘회사 생활 2년 차’ 이런 예시를 제시할 수 있는 거지. 그러면 나머지 팀원들은 그 예시를 가지고 과녁의 위치가 어디 일지를 맞추는 게임이야. 두 팀이 경쟁을 하는 거고, 먼저 10점에 도달하는 팀이 우승. 간단하지?” 루카스의 ‘회사 생활 2년 차'라는 예시에서 어김없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2년 차면 열정이 1년 차보다는 식었지만 그래도 아직 배움과 도전을 계속할 시기란 건가.

“마이클 보면 정말 차가움 쪽에 과녁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라고 알렉스가 말했다.

“마이클 아직 1년 차인데 뜨거움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 원준이도 동의했다.

“아냐, 근데 리타를 봐봐 4년 차인데 얼마나 열정적이야. 아까 캐리어 위에 노트북 올려놓고 일했다니까?” 케인이 말했다.

“맞아, 맞아. 이런 식으로 팀원들끼리 의논을 해서 초능력자의 마음을 추리해 보는 게임이야.”

“팀은 어떻게 나눌까?” 케인이 말했다.

“커플을 갈라놓아야 하지 않을까?” 알렉스가 말했다.

“맞아. 커플이 같은 팀이면 너무 쉽잖아.” 케인이 알렉스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근데 첫 게임이니까 일단 임으로 팀을 가르자.” 루카스가 말했다. 임의로 정한 팀은 이러했다. 케인, 원준, 나, 쌤 한 팀. 키아나, 리타, 알렉스, 마이클 한 팀. 루카스는 심판.

케인이 나를 보며 말했다.

“쌤이 초능력자 하면 되겠다. 네가 그의 마음을 잘 읽어낼게 분명하니까.”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쌤이 초능력자 해.” 원준이도 합세했다.

쌤은 과녁을 돌리고 카드를 한 장 뽑았다. 

“Nature v.s Nurture” 그가 카드를 읽었다. 그리고 한참을 과녁판을 쳐다보더니,

“Wine.”이라는 단어를 제시했다.

“오.” 원준이는 그럴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I mean, it can totally be both!”라고 케인이 외쳤다. 나는 알코올중독자다운 답이라고만 조용히 생각하고 있었다.

“와인은 어쨌든 제조 방법이 엄청 중요하잖아. 좋은 포도를 엄선하는 것도 중요하고. 적합한 품종을 좋은 토양 조건 아래에서 가꿔야 하는 거니까 ‘nurture’ 일거 같아.” 원준이가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꼭 질 좋은 와인만 있는 건 아니잖아? 집에 오래된 포도에서 이미 알코올 맛이 나던데?” 내가 말했다.

“그걸 와인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냥 발효된 포도인거지. 와인 생산과정뿐 아니라 수집하는 사람들만 봐도 보살피다는 느낌이 더 강한 거 같아.” 케인이 말했다.

“그런가.” 나는 전혀 납득하지 않은 채 답했다.

“쌤이 평상시에 와인을 좋아해?” 원준이는 내게 질문했다.

“음…” 갑자기 내게 집중되는 이목에 나는 당황했다.

“그러게. 쌤이 와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하겠다.” 케인도 내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말했다.

“그러게. 쌤은 와인을 좋아하지. 술이라면 다 좋아하니까. 근데 특별히 와인을 좋아하는 거 같진 않는데.” 나는 내가 뱉고 있는 말이 아무런 영양가가 없다는 걸 느끼면서도 주저리주저리 중얼거렸다.

“원래 와인은 일절 안 마시다가 너 만나고 와인밖에 안 마시는 거 같던데.” 루카스가 끼어들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처음 만난 날에 와인을 마시는 내게 핀잔을 주던 그이지만 어느 순간 누구보다 와인에 관심이 많고 고급 와인을 늘 구비해두곤 했다.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30초 이내로 답을 내려주세요.” 루카스가 말했다.

“옛날에 쌤이 낮술 할 때 이건 그냥 자연의 포도주스일 뿐이라고 한 적이 있긴 했어.” 그와 오키나와에서 페트병에 와인을 몰래 넣어 버스 안에서 마시면서 이건 자연히 알코올이 발생한 포도주스일 뿐이야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래? 그럼 그게 맞겠지!” 케인이 ‘nature’ 쪽으로 과녁의 방향을 기울였다.

“답을 공개하겠습니다.” 루카스가 말했다.

그의 답은 민망할 정도로 원준이와 케인의 답에 가까웠다. 


보드게임의 열기가 식어갈 즘 리타가 배고프다며 점심을 먹지 않겠냐 했다. 루카스는 점심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러 부엌으로 성큼 걸어갔다. 리타, 쌤 그리고 알렉스는 그를 따라갔다. 마치 누가 역할이라도 정해준 것처럼. 원준이와 키아나는 자연스럽게 소파로 자리를 옮겨 텔레비전을 켰다. 나는 짧은 한숨을 쉬고 테이블 위에 어질러진 보드게임을 치웠다. 마이클과 케인이 옆에서 돕다 소파로 합류했다. 나는 부엌으로 발을 옮겼다. 쌤은 샐러드 재료를 손질하고 있었다. 토마토를 한입 크기로 자르고 있었다. 나를 보자 칼질을 멈추고 나를 올려보었다. 그러고는 토마토를 내게 먹여주려 했다. 나도 모르게 그 손을 쳐냈다. 떨어지는 토마토를 루카스도 알렉스도 리타도 보았다. 


밥 준비를 다 한 리타가 할 말이 있다고 쌤을 불렀다. 둘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키아나는 내게 쌤이 어디에 갔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하자 그 이외의 안건은 없다는 듯 바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녀였다. 얼마 후에 케인이 내게 와 1층 현관 벤치에 쌤과 리타가 있다고 내게 말해줬다. 나는 묻지 않았는데. 


케인도 키아나도, 그 누구도 나의 친구가 아니었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그들은 쌤의 친구였고, 나는 쌤의 친구였다. 누구와의 대면도 쌤의 관계성 아래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 꺼림칙했다. 쌤과 나의 관계로 대화를 시작해야 했고, 쌤의 행방은 내게서 찾았고, 나의 편의는 쌤의 책임이었다. 그렇게 엮어있는 상태로부터 나는 투쟁을 벌이고 싶어졌다. 나는 쌤과의 분리를 갈망했다. 분리는 불안을 야기한다. 내게 뻗은 그의 손길을 모르는 척했다. 그의 흔들리는 동공에서 느껴지는 깊은 불안을 나는 완벽히 무시했다. 


메인디시인 생선 구이가 완료되어서 나는 점심을 먹자 하려고 리타와 쌤을 찾으러 1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에서부터 언성이 높은 중국어가 들렸다.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미 나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조용해지는 둘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올라가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점심을 먹고 몇은 방에 들어가 낮잠을 취했고 몇은 저녁 식재료를 사러 나갔다. 쌤은 자처해 점심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돕겠다는 모든 이들을 거절했다.

“It’s all good.”라는 말과 함께.


저녁시간이 되어서 우리는 다시 다이닝 테이블에 모였다. 루카스가 부엌에서 엄청 큰 샴페인을 가지고 왔다. 그는 한 번에 샴페인을 터트려 창문밖을 향하게 했다. 

“Cheers to my good friend Wonjun who finished his master's, and Kiana who started her phD, and Micheal and Alex for starting their career.”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나는 이 축배가 졸업 발표를 하지 못한 쌤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다른 사람들은 쌤의 상황을 모르는 것일까?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은 그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저녁식사가 진행됐다. 


저녁을 먹고는 불꽃놀이를 하러 해변으로 나가기로 했다.

모두 작은 폭죽 스틱을 하나씩 집어 들어 불을 붙였다. 리타와 마이클은 서로를 향해 불을 가져 공격하며 뛰어놀았다. 루카스도 그 술래잡기에 참여했다. 키아나는 조용히 원준이의 스틱과 겹쳐 사진을 찍었다. 케인과 알렉스는 해리포터 시늉을 하며 서로에게 주문을 외웠다. 불꽃을 중앙으로 두고 둘이 짜기라도 한 듯이 주문을 외우며 왼쪽으로 같이 돌기 시작했다. 알렉스와 케인의 장난스러운 놀이가 퍽이나 사랑스럽다 느꼈다. 술에 취한 알렉스는 케인의 등에 안겼다. 케인은 그를 그대로 올려 어부바를 하고 뛰었다. 난 그들을 보며 나와 은우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안정적이고, 서로가 서로에 대한 두터운 신뢰와 세월에도 계속되는 지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짙어지는 관계. 나는 또 당연하듯 쌤과 단둘이 남겨진 게 불편했다. 나는 그의 쌍을 이루는 무언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느낌이었다.

“산책할래?” 그가 물었다.

“그래.” 

“아까는 무슨 이야기했어?” 리타와의 대화가 생각나 물었다.

“아. 엄마.”

“엄마가 왜?”

“리타 부모님이랑 우리 부모님이랑 친하잖아. 엄마가 리타 어머니에게 내가 연락이 안 된다고 말했나 봐. 엄마는 그런 말을 왜 하는 건지.”

“걱정이 많이 되시나 보지. 나도 연락 안 되면 엄마한테 전화 엄청 와.”

“엄마는 늘 나를 속박하려 해.”

“속박이라...”

“리타도 내 안부를 대신 전하는 게 신경 쓰이나 봐. 알아서 잘 좀 하래.”

나는 별말 없이 걸었다. 그가 갑자기 전 속력으로 뛰어갔다.


“사랑해!” 그가 바다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리고 돌아서서,

저번에는 너무 작게 말해서 못 들은 척했지?”라고 작게 외쳤다.

 나는 여전히 못 들은 척했다.


밤이 되어 숙소로 돌아오니 클럽이 되어있었다. 은은하면서 현란한 조명에 루카스는 본인 취향의 브라질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추고 있었다. 다들 술에 취해 흥에 겨워있었다. 그러다 하나둘씩 온천에 몸을 녹이러 올라가거나 잠을 청하러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몇 시인지 알 수 없는 몽롱한 무렵이었다. 어느새 나와 루카스만 남았다.

“쌤 잘 지내는 거 같아?” 루카스가 물어왔다.

“글쎄.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요즘은 무슨 생각인지 잘 모르겠어. 왜 또 졸업을 유예한 건지.” 그가 말했다.

“이번에 실수했으니까 다음엔 확실히 하겠지.”

“무슨 실수?” 그가 음악의 볼륨을 낮추며 말했다.

“졸업 발표를 못했다는데?”

“우리 학교 졸업 요건에 졸업 발표 없는데?” 

“응?”

“아니, 작년 말에 갑자기 정신적 문제로 좀 쉬어야 할 거 같다며 졸업을 미룬 거야. 나는 잘했다고 생각했어. 드디어 정신과 상담도 받고 제대로 문제의식을 가지겠구나 했지. 근데 전혀 쉬지도 않고 그렇다고 연구를 착실히 하지도 않고 그냥 등산이나 다니면서 한 학기를 보내더라고.” 그는 마치 내를 그 나태함에 대해 탓하는 것 같았다.

“졸업예정이 작년이었어?”

“몰랐어?”

“전혀 몰랐는데.”

“당연히 알거라 생각했는데. 그럼 쌤이 지금 뭐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대학원 다닌다고 생각했지.”

“대학원생 중에 그렇게 시간 많고 아무 때나 랩실에 가는 학생을 본 적이 있어?” 루카스의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한 점이 많긴 했다.

“그건 어찌 되었든. 난 너무 걱정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아. 이 상태로 지속되면 안 될 거 같아.” 그가 덧붙여 말하며 화장실에 가겠다고 일어났다. 

시간이 고무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가 한 말들이 여태까지 쌤과의 모습과 겹쳐지며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는 루카스가 다급히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쌤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전 27화 9월 4일 요요기우에하라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