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갖지 않은 것
해 질 무렵 다다른 진주역.
겨우 6월 초인데 뭐 이리 후덥지근하냐.. 지구를 많이 괴롭힌 탓에 인류는 올여름도 각오해야 했다.
임관식을 마치고 뿔뿔이 흩어졌던 소위들. 이제 다시 모일 시간이다. 4박 5일 간 가족들과 회포도 많이 풀었으니, 이제 다시 앞으로 가야지. 그렇게 저마다 한아름씩 꿈을 안고 교육사령부 정문으로 향했다.
캐리어를 질질 끌고 도착해 보니 광활한 석양이 온 사방에 드리워 있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던 길, 소위 계급장을 달았던 대연병장을 지나고, 부사관 때 썼던 숙소를 넘어 앞으로 2달간 묵을 곳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다시 교육생 신분.. 바꿔 말하면, 모든 게 점수화되고 줄 세워지는 냉혹한 숫자의 세계로 재진입했지만, 1등과 상장에 눈멀었던 예전과는 달리 나의 가치관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얼마 전에 들은 노래의 가사 두 줄로 인해.
할 수 있다면 세상을 나는 덧칠하고 싶어
처음부터 갖지 않았는데도 가슴이 아파
- <구르는 바위, 너에게 아침이 내린다> 中
일본의 전설적인 록밴드, 아시안 쿵푸 제너레이션의 대표곡 중 하나다. 느닷없이 이 노래를 들먹이는 이유는 단순히 '노래가 좋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저 두 문장만으로 나의 정신적 가치관을 새로이 정의해 줬기 때문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면, 처음부터 그걸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원래 자기의 것을 빼앗긴 것마냥 우리는 아쉬워하는 게 참 많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하나. 왜 그러고 살아야 하나. 나는 그런 세상을 나만의 색깔로 덧칠하고 싶어졌다.
나는 또 항공통제 특기를 받았다.(12화 참조)
거길 떠날 때 다들 여기 절대 다시 오지 말라고 여러 번 만류했었고, 나도 그때만 해도 안 올 거라고 했기에.. 많이들 미쳤냐고 했다. 마치 <오징어 게임>을 해봤음에도 다시 게임장에 들어온 성기훈에게 사람들이 그런 놈이 여길 왜 다시 기어들어와? 라고 했듯 질문세례를 받았으나, 내 맘이다.
2년 전 벌벌 떨면서 들었던 초급과정 소개.
지금은 마음이 한결 차분하다. 부사관 때 이미 배운 부분도 있었지만 애초에 그때처럼 경주마가 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뭔가에 목매고, 혈안이 되고 싶지 않았다. 군번을 3개 가지는 동안 내가 가장 싫어했던 장교의 모습 중 하나다.
그래서 이전과 다르게 성적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나는 객관식 문제의 답을 골라내고, 주관식 문제의 빈칸을 채우러 온 게 아니다. 항공통제장교로서, '통제사'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여기에 다시 왔다.
그 본분을 망각해 밑줄 그은 것만 공부하고, 시험점수와 등수에 연연하고, 이걸 실제로 어떻게 써먹을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장교씩이나 되어 여기 2달이나 죽치고 앉아있을 필요가 있나? 장차 작전요원으로서 실전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진심을 다해 공부한다면 성적은 따라올 것이고, 나머지는 하늘의 몫이다.
그렇게 1등을 해서 그때처럼 학교장님의 대령상을 받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단지 그뿐이다. 상을 못 받으면 통제사가 아니게 되나? 장교가 아니게 되나? 세상이 무너지나? 전혀요. 아무것도 변하는 거 없고, 아무도 신경 안 쓴다. 제발 쓸데없는 데에 힘 빼지 말자.
많이 달랐던 2년 전, 상장을 위해 '쟁취'를 운운했던 나는 2달 동안 한시도 저 마음이 흔들렸던 적이 없다. 그렇게 내 속에 나만의 색깔이 오밀조밀 재조직되어 물감의 형태로 흐르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다 보면 우리 분야 특성상 그 내용에 따라 현장에 가야만 알 수 있는 부분도 많았기 때문에 서두르거나 집착하지 않았다. 스스로 필요한 만큼 공부하고 충분히 고민했다고 판단되면, 주저 없이 책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예전처럼 코로나19로 인해 외출금지 같은 건 없었지만 일과 후 내가 향한 곳은 항상 부대 도서관이었다. 이 녀석, 자기 혼자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이거 봐라? 일명 '뒷공부' 하러 가네 이거.
안타깝게도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책을 읽으러 가는 길이었다. 교육생 딱지를 떼면 이렇게 각 잡고 독서할 시간을 없을 것 같아서 더욱 부지런히 책을 빌리러 갔다.
무더운 여름, 시원한 냉동고 같은 도서관에 들어설 땐 늘 기분이 좋았다. 책장에 꽂힌 무한에 가까운 숫자의 책들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신성해지는 것이 어느 성전에 온 듯했다.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녀 보면 눈이 딱 마주치는 책이 꼭 있다. 그럼 다가가서 몇 장 들춰보고 마음이 내키면 그대로 방까지 가는 거다.
그래도 종류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골고루 읽으려고 노력했고, 나는 그중에서 자서전을 가장 좋아했다. 웬만한 자서전 저자들은 내가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 사람과 내가 원하는 시간에 얼마든지 독대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글귀를 잊어버리기 싫어 한 문장씩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게 조금씩 모이자 독후감이 되었다. 그 흐름에 조금만 더 몸을 맡겨 보니 어느새 자기 전에 일기까지 쓰고 있었고, 자연스레 글은 내 일상에 스며들고 있었다.
처음부터 갖지 않은 것에서 벗어나 길가에 멈춰 섰더니 새로운 나를 발견한 것이다. 놀라웠다. 저 멀리 울창한 숲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내 마음속 호수에는 형형색색의 물줄기들이 생기 없이 고여만 있었다.
글을 쓰는 건 내 호수의 물이 고이지 않도록 휘저어 주는 것이었고, 책을 읽는 건 그 호수에 신선한 강줄기 하나를 틔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들이붓고, 뒤섞이고를 반복하자 나만의 호수는 좀 더 다채롭고 선명해졌다.
어느덧 다양한 색깔이 뒤섞여 꾸덕해진 나만의 물감으로, 그동안 타의와 무의식, 고정관념으로 인해 잘못 칠해왔던 부분들을 유쾌하게 구석구석 덧칠해 나갔다. 다시 색을 입히고, 다시 정의된 세상에서, 다시 눈을 떠보자.
평가, 성적, 등수, 상장, 성과, 심사, 진급, 선발..
이런 글자들은 이제 덧칠해져 보이지 않게 됐다.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내게 없던 걸 탐내지 않는다면,
뭐든지 욕심 대신 진심으로 임한다면,
분명 자연스레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목말라 갈구하지 말자.
오만촉광의 소위 계급장은
오색찬란한 빛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