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에 새어든 햇빛
그리워질 진주 혁신도시, 충무공동.
과거 부사관 교육생 시절, 코로나19로 인해 코빼기도 못 봤던 곳이다. 주말 아침이면 콜택시를 타고 나가 한여름밤의 별무리를 보며 돌아왔던 2달. 진주는 그 단어 그대로 빛나는 곳이었다. 좋은 곳 하나 또 알고 간다.
그렇게 나만의 색깔로 세상을 물들이던 '프로덧칠러' 군번 3개 김 소위. 이제 그 도색작업을 마치고 '작전가능교육'을 또! 또! 또! 받으러 대구기지로 향했다.
우리 다시 만난 거라 그 골목길 어귀에서
지난여름 그날처럼 나는 또다시 설레이고
- 버스커 버스커 <골목길 어귀에서> 中
그 골목길 어귀에 들어서니 보이는 중앙방공통제소, MCRC. 겨울에 이곳을 떠났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반년 만에 또 왔다. 같은 얼굴, 같은 안경, 그러나 다른 계급장과 함께. 8월의 대구는 가히 명불허전이었다. 무더위를 뚫고 온 신임소위들이 우르르 MCRC로 줄지어 들어간다.
어! 뭐야! 필승~!
수상할 정도로 아는 사람이 많았던 김 소위. 나도 반갑게 그 손을 잡고 부둥부둥하고 싶었으나 교육생이 그러고 깝치는 걸 누가 보면 썩 보기 좋지는 않을 터. 반가운 마음을 억누르고 차분하게 악수를 나눴다. 회포는 이따 밖에서..!
그렇게 부장님께 교육입과 신고를 드렸고, MCRC 작전요원이 되기 위해 3달 동안 치열하게 연마할 시간이다. 진주를 거쳐 부사관에서 장교가 되었으니, 이제 이곳을 거름 삼아 '통제기사'에서 '통제사'가 될 시간이다.
여전히 성적이나 등수에는 연연하지 않고, 오직 통제사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피지컬을 탄탄히 하고 싶었다. 다만 득도를 했던(지난 화 참조) 진주에서 생각지 못했던 게 있었는데, 지금 산출되고 있는 성적이 비단 나 본인만의 성적이 아니라는 것.
무슨 말이냐면, 같은 특기에서 부사관으로 근무해 봤으면서 생짜 신입으로 온 동기들에게 성적이나 기량에서 밀린다면, 그건 단순히 나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뜨겁게 몸 담고, 계급장이 바뀐 지금도 자부심을 갖고 있는 '부사관'이라는 신분 자체를 욕 되게 할 수 있다.
저봐, 부사관 하다 왔어도 장교는 또 다르다니까~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그릇된 관념을 박살내고, 증명하고 싶었다. '역시 부사관들 중에 저런 실력자들이 있다니까' 라는 소리가 나오도록. 기본 골자는 오직 실전만을 생각하되, 눈에 띄는 성과도 만들어 내기로 결심했다. 그것도 아주 압도적인 수치로.
이건 내 앞길을 위한 게 아니라, 지나온 길을 위해서다. 내가 신세 졌던 분들을 조금이나마 빛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 나의 손에 쥐어진 양날의 검.
초급과정 1등도 양날의 검.
군번 3개도 양날의 검.
이게 어느 쪽으로 휘둘러질지 모르니 부담스러웠다. 넌 하다 왔으니까, 넌 다 아니까, 넌 다른 애들 좀 도와줘. 하며 충분한 연습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때가 많아 좀 억울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우리 기수는 인원이 엄청나게 많아서 교관들이 하루 종일 달라붙어도 다 커버하기 벅찼기 때문이다.
나도 부사관을 뭐 5년, 10년 하다 온 것도 아닌데.. 나도 한창 배워야 할 교육생인데.. 비공식 조교 역할을..? 그러나 우리 동기들 전체가 잘 되기 위해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하는 것이 맞지. 몇 명만 특출 나게 잘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못하는 것보다, 평범하더라도 다 같이 중간 이상 할 수 있는, 튼튼하고 끈끈한 기수가 되어야 한다.
나도 잘 모르지만 동기들 앞에서 뭔가를 설명해야 했고, 나도 잘 못했지만 교관님들 하는 걸 보고 얼추 흉내 내서 우군기와 가상적기들을 모사해 동기들의 모의훈련을 도와줬다. 내가 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지만 열중해서 달려드는 동기들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틈이 없었다. 일단 그냥 가는 거다.
같은 교육생끼리 서로 뭔가 가르치는 건 리스크가 크다. 자칫 새 도화지와도 같은 신임소위에게 잘못된 개념부터 주입될 수 있고, 처음 잘못 생긴 습관은 바로잡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교관님들 뿐만 아니라, 부사관 때 알고 지냈던 장교 선배님들, 그리고 베테랑들이신 준위 분들께도 조언을 구하러 다녔다.
그래도 발품을 팔면 팔수록, 맨땅을 헤딩을 박으면 박을수록 점점 보이는 게 있었다. Teaching is Learning이라는 말이 있듯, 자꾸 가르치면서 나도 내 지식들이 실시간으로 엮여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인공지능의 딥러닝 느낌? 동기들이 나를 계속 학습시켜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르치다가 말문이 막히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내 이해가 덜 됐다는 뜻이었다. 그럼 또 체크하고. 병사 시절 대대장님께서 어떤 참모 한 명에게 뭘 알려주시다가 '말로 브리핑을 해봐. 그럼 뭘 모르는지 바로 나온다니까' 했었는데. 아, 그게 그 말이었구나. 시간과 신분을 관통하는 깨달음이었다.
그렇게 잔근육을 계속 키워나가니, 묵직해서 휘청거렸던 그 양날의 검이 어느새 제법 컨트롤할만했다. 붕붕 휘둘러 보니 뭐 하나 팍 부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점점 커져가는 몸집만큼 2스타 소장상이 걸려있는 최종평가일도 다가오고 있었다. 후회 없이 잘 치러 내 지나온 길을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 중요한 날에도 어김없이 동기를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도 내 평가 직전까지 최대한 감각을 끌어올리고 싶었는데, 긴장되고 예민한 그 당일마저도 그놈의 넌 해봤으니까.. 넌 잘하니까.. 회의감에 멘탈이 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에서 말했듯, 다 같이 잘하는 거? 너무 좋다. 그러고 싶다. 도와주기 싫은 게 아니라, 나도 교육생인데 오늘만큼은 내 시험 준비 좀 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나. 어떻게 시험 당일까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여기는 열심히 하는 자를 대하는 방식이 도대체 왜 이 모양인가.
아무래도 특기 잘못 골랐다. 내가 미쳤지, 여길 왜 다시 와서 이 고생을. 지나온 경력으로 왜 역차별을 받아야 하나. 내가 뭘 다 알아? 나도 여기 와서 처음 배운 게 얼마나 많은데. 에휴, 그냥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갈걸. 뭔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길..
시간은 다가오고, 마음은 불안하고, 근데 손은 내 동기의 평가를 도와주고 있고. 모든 게 원망스러웠던 나는 양날의 검을 든 채 심연 속으로 힘 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렇게 툭 튀어나온 입에,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최종평가 직전 세팅을 할 시간. 훈련용 서버에서 평가가 진행될 전장과 몇 가지 참조선을 그렸고, 내가 가상적기로부터 보호해야 할 자산의 좌표를 입력하고 있었다.
화면 밖에서 작전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평가관님이 오셨구나 싶었는데, 다름 아닌 여자친구였다. 두리번두리번 무슨 일인고 했더니 아직 안 오셨지? 하며 '평온'이라는 액상 청심환 하나를 삐죽 내밀었다. 이거 하나 주려고 나 때문에 여기까지.. 웃음이 났다.
작전실은 지하에 있었지만, 순간 햇빛이 새어 들어오더라. 챙겨준 청심환도 하나 쭉 들이키니 정신이 돌아왔다.
과거부터 고질적으로 잘못된 습성인데, 뭔가 세상이 억까하는 기분이 들면 모든 걸 원망하며 하염없이 심연으로 추락해 버린다. 그날 여자친구가 햇빛을 쬐어주지 않았으면 그 양날의 검은 내 쪽으로 고꾸라졌을 것이다.
그래, 사람들이 내 마음을 몰라주면 뭐 어떤가. 여기 항상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 그렇게 내 안에 가라앉았던 양날의 검. 햇님과 함께 한 손씩 움켜쥐고 올바른 방향으로 휘두를 수 있었다.
Picture Clean!
텅 빈 전장은 다음 페이즈로 가는 트리거가 됐고 더 이상 양날의 검이 아닌, 앞쪽으로 예리하게 다듬어진 칼을 챙겨 다음 전장으로!
우리는 오산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