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태양을 일곱 번

그 기억들이 마치 중력처럼

by 재룬

네. 저 맨 오른쪽에서 세 번째. 안내책자도 보내드릴 테니까 그쪽으로 자리 잡으세요~ 내일 봐요~


임관식 전날 핸드폰을 돌려받은 후보생들이 전화로 거의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바로 저마다 가족들을 행사에 초대하는 모양새다. 나도 바쁘게 전화를 돌리고 장교교육대대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이했다.


일시: '23. 5. 31.(수) 11:00
장소: 공군교육사령부 연병장


안내책자 속 이 날짜가 정해지기까지의 과정도 파란만장했지.. 참모총장님 주관으로 진행되는 행사다 보니 이번 주 총장님의 일정이 확정되기까지 우리의 임관식도 대롱대롱 앞뒤로 진자운동을 했다. 그래서 이 무렵, 가족들의 원성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평일에 하는 행사라 직장에 휴가를 내야 하는데, 그 날짜를 정해주질 않으니 답답하셨을 것이다.


물론 행정상으로는 6월 1일부터 소위 계급을 단 것으로 처리되지만, 임관식은 최대한 빨리 할수록 좋다. 얼른 후보생 딱지를 떼고 소위 계급장을 달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임관식 이후 부여되는 임관휴가가 더 길어지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시로, 월요일에 임관식을 하면 일요일까지 6박 7일 동안 쉬고, 금요일에 하면 2박 3일만 쉬게 된다. 우리는 딱 중간인 수요일, 오케이! 4박 5일. 만족스러웠다.


나는 이걸 지난 부사관 임관식 때는 코로나19로 인해 못 나갔었다. 임관식을 마치고, 빛나는 계급장을 달았음에도 다시 부사관교육대대로 돌아가는 기분은 참.. 대신 이번엔 가족들 앞에서 늠름한 장교로 임관해 그 길 그대로 고향으로 떠나는 휴가. 소위 계급장만큼이나 내가 목 빠지게 고대하던 것이었다.


그동안 애지중지 주름을 다스려온 정복을 옷걸이에서 살살 빼냈다. 더 이상 흙 묻은 전투복도 땀에 절은 체련복도 아닌, 멀끔한 정복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하지만 계급장은 아직. 임관식 때 부모님께서 양쪽 어깨에 직접 달아주실 거라, 감질났지만 아직은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참아야 했다.


부사관 임관식 때는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무관중으로 진행되어 후보생들이 셀프로 미리 어깨에 계급장을 달고 임관식을 했던.. 그런 슬픈 사연을 이제야 씻어낼 수 있게 됐고, 그때와 또 다른 점. 지난번처럼 실내체육관이 아닌, 교육사령부 연병장에서 임관식이 열린다.


푸른 잔디가 우거진 연병장 쪽에 다다랐다. 우선 단상 쪽이 아닌 저-기 뒤쪽 끝 대기하는 구역에서 입장 대형부터 갖췄다. 저 멀리 객석을 보니 임관식을 보러 온 사람들로 바글바글 붐볐고, 저기 우리 가족이 있다는 생각에 코끝이 시려왔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줄 잘 맞추고, 집중해야 했다.


앞으로~ 갓!


사전에 약속한 구령에 맞춰 일제히 발을 뗐다. 딛고 있던 콘크리트를 지나, 러닝트랙을 넘어 한발 한발 느껴지는 연병장의 잔디. 오늘따라 더 푹신해 발걸음에 온 촉각을 곤두세웠고, 절대로 구두나 정모가 벗겨지는 일은 없어야 했기에 조심조심 걸었다. 고개는 들고, 어깨는 펴고, 눈만 바닥을 흘기며 앞사람과의 간격을 유지했다.


중간쯤 오니 기수들이 정렬하여 깃발을 참 많이 들고 있었다. 양 옆으로 펄럭이는 깃발들을 가로질러 가족들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예행연습을 하며 못 박아둔 잔디 속 작은 표식 위로 무사히 안착했다.


발걸음을 멈추고, 군가가 멎고 나니 가족들의 환호가 온 연병장을 뒤덮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눈시울이 붉어지는데, 그 속에 서서 바라본 모든 장면들은 꿈같았다. 너무 아름다워 마치 한 폭의 그림 속 세상에 들어온 느낌. 도무지 현실이라곤 믿기지 않는 풍경이었다.


임관식에는 필승! 하며 경례하는 부분이 많다. 그동안 숱하게 해 온 경례라 우리에겐 간단한 동작일지 몰라도, 우리 자녀들이 씩씩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각 맞춰 경례하는 모습을 처음 본 가족들께서는 그 모든 '필승!'마다 우오오오~ 하며 박수갈채를 쏟아부어 주셨다.


드디어 부모님께서 직접 계급장을 어깨에 달아주시는 시간이 왔다. 안내방송에 맞춰 관객석의 가족들께서 우르르 일어나 우리 쪽으로 다가들 오셨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가족들의 위치가 잘 안 보였는데, 그러다 저 멀리서 뛰어오는 우리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짧지 않은 거리였음에도 엄마는 한달음에 달려오셨고, 목이 메인 엄마는 나를 안아주시며 연신 내 등을 두드리며 눈물을 흘리셨다.


수고했다.. 수고했어..


엄마도 참, 이 좋은 날에 말이야. 뒤이어 능청스럽게 걸어오던 아빠와 형 덕분에 나는 울지 않을 수 있었다. 함께 먼 길 와주신 형수님, 사촌형, 삼촌. 그리고 부사관 동기 2명도 와줬다. 신분은 달라졌어도 동기는 영원한 동기지. 내 주변이 북적북적한 것이 참 든든했다.


회포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우선 부모님께 소위 계급장을 하나씩 손에 쥐어드렸다. 엄마, 아빠 손으로 드디어 내 어깨에 올려진 오만촉광(五萬燭光)의 소위 계급장. 나 만큼이나 가족들도 함박웃음이 피었다. 부모님 모두 건강하실 때 이런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 뿌듯했다. 오늘만큼은.. 나도 효자..?


창! 공에! 섰노라 섰노라 악!

우! 주로! 가노라 가노라 악!

우! 리가! 펼치리 펼치리 악!

우레의! 포효 속에! 뛰어든! 학사!

창공 찢어 날으라!

명예 정의 충성 필승 아~악!


우리 공군 학사장교만의 임관 구호다. 마지막에 아~악! 하며 녹색 잔디를 딛고 정모를 푸른 하늘 위로 힘껏 던져 올림으로써 임관식이 종료되며, 그렇게 탄생한 신임소위들은 주말까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안긴다.



여기서 3달 동안 숱하게 들었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배운 그 사람들의 정체. 그 속에 섞여 있을 땐 몰랐지만 장교로서 공식적으로 그 '국민'이라는 사람들의 실체를 마주하자, 내가 존재하는 이유, 군대가 존재하는 이유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환한 얼굴로 우리를 보며 우레와 같은 환호와 찢어질 듯한 박수를 받으면서 든 생각이 있다.


여기 다 우리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다.


군대는 오로지 국민, 국민, 국민만을 위해 존재한다. 다른 건 그다음이다. 분명 그런 걸 기대하시기에 지금 저렇게 웃으며 갈채를 보내주고 계신 거다. 헷갈리지 말자. 군대는 오로지 국민만을 위해 존재한다. 이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한다.


과거 병사, 부사관으로서 군 생활을 나름 몇 년 해왔지만, 딱히 심도 있게 고민해보지 않은 부분이다. 그동안은 적과 싸우는 법만 눈에 들어왔지, 그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오늘에야 들여다보게 됐다.


7년 전 이등병을 달던 날부터, 군번이 3개가 된 오늘까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걸 생각해 본 적 있는지. 지구가 태양을 일곱 번 감싸안는 동안, 나는 모든 마음을 중력처럼 끌어당길 수 없었는지.


'넬' <지구가 태양을 네 번>.

이 노래가 이제 다르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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