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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S May 30. 2024

20th.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J. M 바스콘셀루스

빨리 철이 들어야 했던 이들을 향해 전하는 위로와 격려

[나를 키운 팔할의 책] - 마지막...



# 20.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 J. M 바스콘셀루


기질탓이겠으나, 내가 이해 못하겠는 문화 중의 하나는 '쿨'이라는 단어를 멋지다고 해석하고, 애절한 사연들에 대해서 '신파'라고 폄하하는 것이다. 감정적인 동요가 디폴트옵션이었던 나라는 인간은 애초부터 추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쿨'함이 멋있음의 척도일 때, 나는 처음부터 멋있음과는 거리가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나의 기질을 부끄러워했었다. 아버지는 팔남매 중의 장남이다. 그리고 나도 장남이다. 장남들에게는 일종의 강인해야한다는 사명이 기본값으로 부여되는 듯하다. 더구나 1980년도에 초등학교(엄밀히 말하면, 국민학생)에 다녔던 세대라면 이해할 수 있겠으나, 당시는 제법 남성다움이 칭송받는 분위기였다. 여기저기서 주먹다짐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고, 남자가 돼서 운다는 것은 여기 저기서 놀림받는 일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을 잘 믿고, 잘 공감하고, 눈물이 많은 나라는 인간은 철저하게 내 본 모습을 숨기는 연습을 자연스럽게 했던 거 같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씨름부 활동을 했었고, 중학교 때는 '유도'를 배웠다. 우울한 감정에 휩일 때는 오히려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책은 일부러 지적이고 관념적인 철학책을 읽었다. 눈물이 날 때는 최대한 참다가, 만약 울어야 한다면, 사람들이 안 보는 곳에서 홀로 울었다.


나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라는 책을 고등학교 2학년 때 읽었다. 사실 이 책의 존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소년 중앙이나, 소년 동아같은 잡지에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주인공 '제제'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등장했다. 책을 자주 읽던 나라는 인간이라면, 이 책 또한 자연스럽게 읽는 것이 당연한 이야기겠으나, 나는 제법 오랜 시간 이 책을 거부했다. 그건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셈이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일정 부분 내가 일부러 읽기를 피했다는 생각이 든다. 왠지 이 책을 읽으면, 나는 내가 숨기고 싶었던 눈물 많은 모습을 들키게 될 거 같다는 그런 직관적인 느낌을 갖지 않았을까. 그렇게 피하다가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야간 의무 자습을 하고 있을 무렵에 이 책을 펼쳐서 읽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브라질의 국민 작가 J.M. 바스콘셀로스(1920~1984)가 1968년 발표한 소설이다.어려운 가정에서 학대받으며 자라는 어린 소년 제제가 나무를 친구 삼아 대화하고, 그를 감싸주는 비밀친구 뽀르뚜가 아저씨를 만나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 성장소설이다. 주인공 '제제'는 나이에 맞게 천진난만하며 장난기가 심하지만, 또 한편 나이에 맞지 않게 마음 씀씀이가 성숙하다. 겨우 5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여기저기서 혼나고, 매를 맞는 장면은 요즘에는 소설 속의 장면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1980년대를 초등학생 시절로 보낸 이들에게는 제법 동질감을 느끼는 일화들이었다. 아마도 당시의 수많은 어린이들은 '제제'와 자신을 동일시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후, 198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다.


이 '제제'라는 어린 주인공은 감수성이 참 남달랐다. 누군가가 준 돈으로 더 가난한 흑인 친구와 빵을 나눠먹고, 슬퍼하는 엄마에게는 ‘슬플 때는 서로 아주 세게 껴안으면 심장이 다시 따뜻해지는 법’이라고 다독여준다. 또 동생에게 싸구려 장난감이나마 마련해 주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겨우 5살짜리 어린아이가. 그래서 이 이런 녀석이 살아가는 방식은 참 많이 외롭다. 너무도 빨리 얼른이 되어버린 이 녀석은 자신의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다. 가족조차도 이 어린 녀석은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로 수용받지 못한다. 그래서 이 어린 녀석은 제제는 가족이 아닌 정원에 있는 라임 오렌지나무에게만 마음을 털어 놓으면서 함께 자란다. 이건 어린아이 특유의 순수한 상상력의 발현일 수도 있지만, 너무도 외로운 존재의 살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어린 녀석은 장난을 치다 발을 다친다. 그때 포르투갈 사람인 뽀르뚜가 아저씨가 제제를 의사에게 데려가 치료해 주었다. 이후 둘은 낚시 여행도 같이 떠나는 등 급속도로 친해진다. 제제는 그를 친아버지처럼 여기며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 어린 녀석은 뽀르뚜가 아저씨를 통해 자신의 모습 그대로로 수용받는 행복을 경험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불행은 언제나 그렇듯 갑자기 일어난다. 뽀르뚜가 아저씨는 기차에 치여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어린 주인공은 누군가를 잃은 상실감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뽀르뚜가 아저씨를 통해 알게 되고, 한없는 슬픔을 경험한다. 그 충격으로 죽을 정도로 아픈 뒤 결국 회복하게 된 어린 제제는 마음속에 기르던 라임 오렌지나무를 자르게 되고 점차 어른으로 성장해 가게 된다.


제제가 라임 오렌지나무를 자르는 장면에 대한 해석이 나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 사람들은 이 장면이 제제가 어린 순수성을 잃게 된 슬픔의 장면으로 해석하는 거 같다. 그러나 내게는 더이상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아야 하는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는다는 제제의 선언으로 느껴졌다. 왜냐면 이 어린 주인공은 뽀르뚜가 어저씨로부터 온전히 수용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아저씨를 잃은 것은 너무도 아프지만, 이제 그 아저씨를 모르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이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희망의 이야기로 읽힌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저씨를 기억하며, 자신 또한 그러한 어른이 되어가겠다고 결심하는... 작은 새가 떠나가고, 철이 들어야 됨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는 어른이 된 주인공이 뽀루뚜가 아저씨에게 쓴 편지가 있다. 그 부분을 읽었을 때가 고등학교 2학년 가을이었다. 학교에서 의무 자습을 10시까지 해야하는 그 시절, 거칠고 거친 남자 고등학생들로 가득찬 그 교실에서 나는 사정없이 울었다. 사람들 앞에서 우는 것을 극도로 피해왔던 나라는 인간이 철들고 나서, 처음으로 우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울컥하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지금도 이 작품은 내게 눈물샘이다.


그 이후부터였을 거 같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눈물 많은 모습을 그냥 보였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비웃으면, 그 사람과 내가 그냥 인연이 아닐 뿐이라고 생각했다. 쿨한 모습 따위를 연기하지 않았다. 그냥 이 세상 어딘가에 그냥 내 모습 그대로를 수용해줄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믿었고, 여전히 눈물 많은 모습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다행히 나는 그런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에서


* 누나는 그 순간 그 자리에는 더 이상 아이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어른이었다. 그것도 아주 슬픈 어른, 슬픔을 조각조각 맛보아야 하는 어른들뿐이었다.



* 아빠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빠의 눈은 슬픔으로 굉장히 커져 있었다. 눈이 커지고 커져서 방구 극장의 스크린만 해 보였다. 마음의 쓰라림이 너무나 커서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그런 눈이었다.


* 넌 큰 인물이 될 거다. 요 녀석, 네 이름은 주제라고 지은 것도 우연이 아니라니까. 넌 태양이 될 거야. 별들이 네 주변에서 빛나게 될 게다.


* "아저씨, 제가 어렸을 땐 제 속에 작은 새가 있어서 그 새가 노래한다고 생각했어요. 요즘은 작은 새가 정말 있는지 의심이 간다고요. 어떤 때는 마음속으로 얘기도 하고 보기도 하면서 소리 내어 말한단 말이에요."

"제제, 그게 뭔지 아니? 내가 자라고 있다는 증거란다. 커가면서 네가 속으로 말하고 보는 것들을 '생각'이라고 해. 생각이 생겼다는 것은 너도 이제 곧 내가 말했던 그 나이.."

"철드는 나이 말인가요?"

"그땐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서 생각이 자라고 커서 우리 머리와 마음을 모두 돌보게 돼. 생각은 우리 눈과 인생의 모든 것에 깃들게 돼."

 "작은 새는 어린애들이 여러 가지 일들을 배우는 걸 도와주려고 하느님이 만드신 거예요?"

" 그래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는 그걸 하느님께 돌려 들여야 해. 그러면 하느님은 그 새를 너처럼 영리한 다른 꼬마에게 넣어 주시지. 아주 멋진 일 아니니?"            


"내 작은 새야 훨훨 날아라. 높이 날아라. 계속 올라가 하느님 손끝에 앉아. 하느님께서 널 다른 애한테 보내 주실 거야. 그러면 너는 내게 그랬듯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겠지. 잘 가, 내 예쁜 작은 새야!  

      

* 이 병은 결코 비어 있지 않을 거야. 난 이 병을 볼 때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될 거야.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거야. 내게 이 꽃을 갖다 준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나의 학생이라고.


* 아픔이란 가슴 전체가 모두 아린, 그런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죽어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 팔과 머리의 기운을 앗아가고, 베개 위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 나는 흰 꽃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어루만졌다. 난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밍기뉴는 이 꽃으로 내게 작별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밍기뉴도 이제 내 꿈의 세계를 떠나 현실과 고통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었다.            

 *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라니까요. 당신이랑 같이 있으면 아무도 저를 괴롭히지 않아요. 그리고 내 가슴속에 행복의 태양이 빛나는 것 같아요."


* "예, 죽일 거예요. 이미 시작했어요. 벅 존스의 권총으로 빵 쏘아 죽이는 그런 건 아니에요. 제 마음속에서 죽이는 거예요.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은 언젠가 죽어요."


* 나의 사랑하는 뽀르뚜가, 제게 사랑을 가르쳐 주신 분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구슬과 그림 딱지를 나눠 주고 있습니다.

사랑 없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제 안의 사랑에 만족하기도 하지만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절망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 시절, 우리들만의 그 시절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먼 옛날 한 바보 왕자가 제단 앞에 엎드려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물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사랑하는 뽀르뚜가, 저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영원히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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