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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S May 21. 2024

19th. 쿠오바디스 -헨릭 센케비치

선택의 순간 나의 기준점.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를 키운 팔할의 책]

# 19.  쿠오바디스 – 헨 센케비치


군대(801 정찰대)에서 첫훈련에서 낙오한 이후로, 부대 전체에서 제일 체력이 약한놈 취급을 받으며, 괴롭힘을 제법 당다.  악물고 버티고 버티는 생활이었다.


그러던 중, 나를 눈여겨 본부 중대 고참으로부터 본부 중대로 내려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일병 2개월 때 받았다. 교회를 갈 때마다 만났던 그 고참은, 본부 중대에서 군수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속한 부대는 훈련을 주로 하는 3개의 전투 중대와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본부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본부 중대에서 필요한 인력이 생기면, 전투중대에서 데려가는 형태였다. 어디나 나름의 힘듦은 있겠으나, 워낙 전투 중대의 훈련이 특수부대답게 괴롭다보니, 본부 중대로 가는 것은 군생활이 편해지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나는 고민을 하다가, 그 제안을 거부했다. 그건 아마도 이번에 소개할 책의 영향 때문이었던 거 같다.


누군가에게 어떠한 책이 의미 있는 책이 되느냐의 여부는 이유가 다양할 것이다. 어떠한 책은 책 자체가 지닌 뛰어난 문학성만으로 의미 있는 책이 되기도 하고, 어떠한 책은 독자에게 결정적인 위로나 도전을 주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책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책은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은 이유이지만, 특정한 구절이 뇌리에 박힌다든가, 또는 책을 읽고 난 다음에 어떠한 결정적 장면이 강력한 잔상으로 남아서, 결과적으로 중요한 책이 되기도 한다.


내게는 [쿠오바디스]가 후자에 속한다. 폴란드 태생 작가 센케비치는 네로가 통치하던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초기 기독교인들이 어떠한 박해를 받았는가를 [쿠오바디스]를 통해서 너무도 실감나게 표현해 내었다. 그는 한참 오래 전인 로마시대의 이야기 안에,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메시지를 담었다. 그렇게 주변 강대국들의 압제 아래 놓여있던 조국 폴란드 민족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했고, [쿠오바디스]로 190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폴란드의 자존심으로 불리게 된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쿠오바디스]는 아주 훌륭한 서사와 구성을 지닌 뛰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재미있게 읽은 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내게는 그냥 그뿐인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의 한 장면이 너무 강력하게 잔상으로 남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잔상은 더욱 더욱 또렷해졌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과도 관련이 깊은 장면이다. [쿠오바디스]는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라틴어이다. 소설에서는 ‘쿠오바디스 도미네’라는 베드로의 말로 표현되어 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조금 더 고전적으로 표현하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가 될 수 있겠는데, 교회에서 오래 전부터 전승된 이야기이다.


로마의 광기어린 지배자인 네로는 예술에 대한 비뚤어진 집착으로 로마에 불을 지르고, 이를 감상하며 시를 짓는 만행을 저질렀다. 분노한 로마시민들의 모습에 뒤늦게 놀란 네로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기독교인들의 짓으로 덮어 씌었다. 그리하여 대규모의 기독교인 탄압이 로마에서 자행되어, 많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도들의 간청으로 지도자인 베드로는 로마를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하는 중이었다. 로마를 등지고 떠날 때, 그에게 자신의 구세주가 로마를 향히 걸어가는 환상이 보인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네가 버리고 가는 어린 양들을 위해,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간다.”


베드로는 떠나던 발걸음을 돌이켜, 다시 로마로 가서 포교를 하다가, 자신이 사랑하는 이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


모르겠다. 왜 이 이야기가 이토록이나 강한 잔상으로 남았는지... 그런데 이 잔상이 본부중대로 오겠냐는 요청을 듣고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이러한 적용이 무리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런 상상들이 내 안에서 줄기차게 반복되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네가 버리고 가는 2중대를 위해,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2중대로 간다.”


결국, 나는 전투중대에 계속 남는 선택을 했고, 내게 제안되었던 자리는 나보다 훨씬 체력이 좋았던 친구에게 돌아가서, 그는 나름 편하게 군생활을 했다. 그리고 나의 현실은 매일 욕을 얻어먹는 삶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나는 악으로 버텨가며, 특수부대를 제대했다.


그 이후부터 여러 선택의 갈림길이 있을 때마다... 거의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처럼 [쿠오바디스]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더 힘들고, 괴롭고, 아픈 길로 나를 이끌었는데... 이것은 마치 자기학대와 같은 양상으로 정도가 심해졌다. 능히 더 편한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힘든 길을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그러면서 성장도 했지만, 그게 하나의 강박처럼 나를 갉아먹었다.


학교를 그만두기 1년 전, 학교의 내부고발 반대하며 단식을 14일하고 있었다. 내부고발자라 불리는 이가 담임하던 2학년 4반의 새로운 담임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학교측으로부터 받았다. 그는 반아이들이 담임 지지하는 성명을 내도록 종례 때마다 유도하고 있다고 했다. 고민이 되었다. 나를 아는 모두 이들이 반대했다. 당시 나는 2학년 수업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식의 이유가 그 반의 담임과 관계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애매하다는 거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날 거절하기로 생각하고, 학교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네가 버리고 가려는 아이들을 위해,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네가 감당하지 않으려는 곳으로 간다.”


꿈에서 깼다. 마음이 아렸다. 다음날 담임을 맡겠다고 했고, 학교는 그에 따른 행정처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정의를 말하는 동료교사의 자리를 뺏은 학교의 앞잡이가 되었다. 이 사안을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았다. 수 많은 기사의 댓글에서 온통 지탄받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전까지 선택의 갈림길에서 힘든 길을 선택했을 때는 마음이 불편하고, 기쁨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힘들기는 하지만, 마음이 버틸만 했다. 어떠한 차이가 있었을까. 그 차이를 고민할 새도 없이, 격랑가운데 휩쓸려서 시간을 보냈고, 이 친구들을 졸업시키고 2주 후에 나도 교직을 떠났다.


시간이 한참이 지난 지금, 이제 나를 흔들었던 사건에서도 거리를 둘 수 있게 된 시점에서, 그 차이를 조금이나마 알 것같다. 정찰대에서의 힘든 길을 선택한 것과 교사를 그만 두기 1년 전 사건에서 힘든 길을 선택한 것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를...


나는 전투중대를 사랑하지 않았다. 지긋지긋했다. 그런데도 그곳을 떠나서 조금 더 편한 곳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전투중대에 있었던 것은, 훈련이 힘들어서 도망친 비겁한 놈이라는 사람들의 뒷담화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을 뿐이다. 그러나 학교를 그만두기 1년 전의 선택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거 같다. 방법을 모르겠지만, 아이들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었다. 그게 현명했는지는 모르겠다.


베드로의 순교를 비극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순교는 비극이 아니다. 베드로는 감히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쿠오바디스]에서..


* 선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악한 사람들도 사랑해야 한다. 악한 사람들로부터 악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힘에 의해서이다.


* 화려한 의상 밑에는 대부분 깊은 흉터가 감추어져 있는 법이지요.


* 이번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사람이 미치광이들 틈에 끼어있으면 자신도 서서히 미쳐갈 뿐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치광이의 광기에 점점 도취된다는 거야.


* 선량하고, 온유하고, 정의로우며, 가난하고, 순결하게 살라. 그것은 이 세상에서 평화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죽은 뒤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함이니.

 

* 그대들의 사랑에는 죄가 없소.


* 베드로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저 밝은 빛이 보이느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자리우스가 대답했다.... (중략)... 마치 누군가의 발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사도는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늙은 사도가 흐트끼는 소리로 말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나자리우스에게는 들리지 않았으나, 베드로의 귀에는 온화하면서 슬픈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내 어린 양들을 버렸으니,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간다.”


* 이 도시와 이 세상에 축복을!


* 바울의 설교대로 너는 내세의 낙원에서 그리스도와 만날 것을 믿고 있으니 나중에 그리스도에게 내 말을 직접 물어봐 주지 않겠냐? 내가 보석이나 값비싼 작품 따위를 가지고 있어도, 금발의 에우니케를 안고 있어도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 들여 줄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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