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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S May 15. 2024

18th. 시지푸스 신화 -알베르 까뮈

추상을 비판하려면 추상을 닮을 필요가 있다.

[나를 키운 팔할의 책]


#18. 시지푸스 신화 – 알베르 카뮈


나는 카뮈를 동경한다. 뭔가 카뮈는 이름 자체도 예술가스럽다. '카뮈'라니.. 이렇게 예술적이고, 아름답고, 지적인 이름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다보니, 내 아이디는 계속해서 camus가 포함되어 있다.


대학 시절 우리나라 최고의 평론가인 교수님 수업에서 호되게 난도질 당한 적이 있다. 좋아하는 글을 발표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 수업에서 내 발표가 대학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발표 끝 무렵 이상한 사족을 내가 덧붙인 게 화근이었다. "미흡한 발표지만, 나이를 생각해서 귀엽게 봐주세요."


귀엽지도 않은 놈이 귀엽게 봐달라고 해달라고 말한 것이 문제였을까. 이 말이 끝난 이후로 나는 20분 가까이 교수님으로부터 실랄한 비판을 받았다. 나의 문장이 졸렬하며, 인식이 편향되어 있고, 깊이가 없다는 등의 난도질이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수업을 듣던 사람들 나보다 상황을 더 민망해했다. 대부분 나를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못본 척했다.


 곤혹스런 수업의 마지었다. "미흡한 발표지만, 나이를 생각해서 귀엽게 봐주세요라니. 너 나이가 몇인데, 이런 표현을 하는거야. 스살? 맞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너보다 어린 나이에 랭보는 시로 대가를 이룬 후에 은퇴를 했어. 네 나이 때 김승옥은 소설가가 되었어... (20대에 활동한 작가들을 몇몇 더 이야기하였으나, 기억은 안남)... 나이를 생각해서 귀엽게 봐달라고.. 이런 쓸데없는 표현을 쓰기 전에 다른 작가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찾아 봐."


그 괴로운 시간을 견딘 후, 자리로 돌아오면서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그래도 주위의 몇몇 사람은 충분히 들릴만한 목소리였다. "교수님 나이에 카뮈는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이 독백이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나름의 반항이었었다.


카뮈는 문학사에서도 손꼽을 만한 천재이다. 이 천재와 내가 결이 다르다는 것을, 47세가 되어서는 완벽히 인정하게 되었으나, 20세의 나는 마치 내가 카뮈처럼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책의 끝부에 있는 작가의 연보를 읽으며, 작가와 매번 지는 경쟁을 해왔다. 카뮈는 40대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2명의 작가 중 한명이다. 역대 최연소 수상자는 정글북을 쓴 '키플링'이다. 노벨문학상은 이제 작가가 이른 업적에 기반하여 수상하는 결향이 강해지고 있기 때문에,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40대에 수상한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임이 분명하다.


 나는 카뮈의 저서 중에서 <시지푸스 신화>를 제일 좋아했다. 먼저 읽었던 것은 <이방인>이었지만, 내게는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후에 읽은 <시지푸스 신화>가 너무 좋았다. 그때 읽었던, 낡은 그 책 제목은 <시지푸스 신화>였는데, 이후에 다른 책들을 보니 프랑스어의 마지막 자음은 묵음처리를 해야해서 <시지프 신화>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 읽었던 책이 인상적이어서 그냥 <시지푸스 신화>라고 한다.


<시지푸스 신화>에서는 카뮈가 평생을 거쳐 집착했던 주제인 부조리의 개념이 그리스 신화의 일화를 바탕으로 설명되었다. 신의 저주에 의해 영원히 산 밑에서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삶을 살아야 했던 시지푸스의 운명이 부조리함이라 이야기했다. 인간 또한 이러한 부조리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이며, 이러한 부조리의 상황 속에서 인간은 어떠한 삶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기술해 간다. 그리고 그 최선의 선택은 그 반항은 자살이 아니라 그 부조리로 가득한 지저분한 삶을 끝까지 이어 나가는 것임을 밝힌다.


우울한 성향을 지닌, 사색적인 인간이 종종 그렇듯이 세계는 내게 불편하다. 이러한 불편한 세계에 대해서 느끼는 이러한 심정을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걸 표현하면, 나는 더욱 이상한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것은 이러한 심정을 훨씬 더 희석해서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 조차도 사람들에게는 이해못할 생각을 품고 있는 몽상가로 불리기에 충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세계에 대한 불편한 생각들은 사람들과 나눠지지 못하고, 내 안에서만 증폭되기 일쑤였다. 나는 이러한 불편감을 무엇이라 불러야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러한 불편감을 정확히 이야기해주는 책을 만난 것이다.


영원히 산 밑에서 위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 되는 삶. 기껏 온 힘을 다해서 정상까지 바위를 올렸지만, 곧 다시 산 밑으로 굴러내리고, 그 바위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와야 하는 시지푸스. 그가 느껴야 했던 심정이 저절로 이해되었다. 그 분노, 답답함, 좌절, 무력감, 순응심 등이 혼합된 그 무엇인가가 지금 나의 심정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시지푸스 신화>의 구절구절은 내 영혼에 박혔다.  


온 힘을 다해서 바위를 산꼭대기에 굴려 올렸다. 그러나 산꼭대기가 뾰족해서 바위는 올려놓자마자 바로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진다. 시지스는 반대편 골짜기부터 바위를 끊임없이 굴려 올려야 한다. 내가 애써서 만든 무엇인가가 매번 무의미해지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이 얼마나 가혹한 형벌인가. 이 얼마나 부조리한가.  


카뮈는 부조리를 깨달은 사람은 자살하거나 극복하거나 두 가지의 선택만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이 부조리를 깨달은 이상, 이 문제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결국 자살을 택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의 나라는 인간을 오히려 지켜줬다. 그래 일단 부조리를 깨달았다. 자살이라는 선택은 문제가 극복되지 않았을 때 선택하면 될 것이다. 이것저것 시도해보자. 이러한 시도들 이후로 자살이라는 선택은 뒤로 미뤄졌다.


카뮈가 제시한 해법은 “삶에 대한 이유를 신이나 가족, 국가와 같은 외부적인 요인에서 찾지 말고 삶 그 자체로 받아들여라”였다. 가족에서도 국가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는 않았지만, 신에서도 찾지 말라는 그의 요구는 내게 어려웠다. 나는 카뮈처럼 강한 사람도 아니고, 신의 위로가 없어도 될만큼 내 삶은 단단하지도 않았다. 기독교 신앙을 떠나기가 어렵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수용하기도 어려워서 부표처럼 떠돌기 시작하는 회색인 인생이 자연스럽게 확정되었다.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카뮈와 그렇게 다른 삶을 결정했다.


그래도 카뮈가 고맙다. 카뮈 덕택에 실존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실존주의 철학을 공부했다. 실존주의는 '본질보다 실존이 우선한다'는 하나의 명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카뮈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실존해서 얻는 것들을 살아갈 이유로 삼는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즉, 실존하기 때문에 경험하게 된 사랑, 우정, 신앙 등을 살아갈 이유로 삼지 말고, 실존 그 자체를 살아갈 이유로 삼으라고 한다. 인생은 시지푸스의 형벌처럼 무의미한 작업을 반복으로 가득차 있다. 이때 시지푸스는 자신이 애써 올린 바위가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질 때, 그 굴러 떨어진 바위를 다시 굴려 올리기 위해 산정상에서 내려와야 한다. 기꺼이 산정에서 굴러 내려오는 결단과 실행이 바로 그 부조리함에 대한 저항의 실천이 된다. 부조리함으로 가득찬 운명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형벌에 지지하고, 기꺼이 그 무의미한 운명에 지지않고 끝까지 저항하며,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까뮈가 소개한 부조리를 깨달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두 번째 방식이었고, 나는 이 방식을 붙잡고 있다.


카뮈의 책들을 읽는 과정에서 그의 일기장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찾았다. "추상을 비판하려면 추상을 닮을 필요가 있다." 아, 이거구나. 내가 싫어하는 무엇인가를 비판하려면, 그 대상을 조금은 닮을 필요가 있는 것이구나. 그렇게 나는 세상에 적응하고 있다.

  


[시지프스 신화]에서..


*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 오직 인간적인 언어로 된 것만 이해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내 손에 만져지는 것, 나에게 저항해 오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이해하는 것이다.


*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물음 중에서도 가장 절박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어떤 경험, 어떤 운명을 살아낸다는 것은 그것을 남김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놓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다.


* 정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이 규율, 불속에서 통째로 단련해낸 이 의지 그리고 정면 대결에는 무엇인가 강력하고 비범한 것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무게를 혼자서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 부조리는 인간의 극단적인 긴장, 고독한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지탱하는 긴장이다.


* 의식을 차린 순간, 인간의 정신은 깨어나고 싶어한다. 정신은 하늘의 구름을 알고 별빛을 바라보며 바람의 촉감을 느낀다. 하지만 세계와는, 자연과는 달리 몸안에 갖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과의 단절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때론 알고 싶은 세계는 커녕, 자기 자신조차도 알수 없어, 자신에게 조차 이방인이 되고 만다. 바로 이 시점부터 부조리는 시작된다. 혼란과 단절, 불일치와 모순이 시작되는 것이다.  


*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그날을 똑같은 작업을 하며 사는데 그 운명도 시지푸스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만 부조리하다. 신들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 반항적인 시지푸스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넓이를 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 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푸스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푸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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