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7학번이다. 학생운동의 막바지 시절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학에서 운동권 선배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가난하면서도, 부르조아의 삶에 동경을 지니고 있는 그런 욕망이 가득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에 비해 교회에서는 나를 늘 걱정스럽게 보았다. 대학생이 되어, 위험한 사상에 물들어있는.... 그렇게 나는 언제나 회색인이었다. 그건 신중함의 결과라기 보다는, 그냥 나의 우유부단한 습성 때문일 것이다. 다만, 속해 있던 학회(참교육실천교사모임)에서 프린트물로 잔뜩 나눠줬던, 지금 보면 의식화 교육같은 자료들을 읽으며, 오히려 운동권들의 주장에 대해서 더 거부감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나는 대학생 시절 내내 운동권이 아니었다.
그런데 47세가 된 나를 보건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좌파로 보일 듯하다. 지금은 정치에 대한 혐오가 높아서, 그냥 무정부주의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해석해야 할 여러 상황이나 자료들을 접했을 때, 아직까지는 보수계열의 주장보다는 진보계열의 주장에 더 공감이 가는 편이다. 운동권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던 내가, 그 스펙트럼은 다르겠으나, 운동권의 주장에 공감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책의 영향 때문이었다.
[분노의 포도]는 위대하다. 일단 한번 읽기 시작하면, 그 압도적인 분량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수월하게 읽힌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미국이란 나라의 위대함은 돈과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미화하지 않고, 처절하게 직시하는 시선에서 온다고 느꼈었다.
[분노의 포도]는 대공항으로 대규모 실직이 벌어진, 미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나는 이 소설을 통해 노동자의 삶과 고뇌에 대해서 그 어떤 의식화된 자료들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는 노동자들을 단순히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또한 절대적인 선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냥 고통당하면서도, 인간다움을 서로 배워가는 그런 존재들로 나타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의 아버지의 30대가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좋았다.
[분노의 포도]의 구성은 특이하다. 홀수 챕터와 짝수 챕터가 구분하여, 상이하게 서술이 된다. 즉 한쪽 챕터에서는 사건을 거시적인 상황에서 서술하고, 다른 챕터에서는 미시적인 상황에서 서술한다. 이러한 구성은 자친 사건 몰입을 방해할 수도 있는데, 스타인벡은 이를 너무도 효과적으로 교차하며 연결한다. 실로 엄청난 필력이다. 세상사를 볼 때, 미시적인 안목과 거시적인 안목이 함께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 소설을 통해서 배웠다.
하나고 제자의 자소서를 지도할 때였다. 이 친구는 경제학과를 희망했다. 자소서 내용 중에 '더불어사는 경제' 등의 내용이 매우 거슬렸다. 당시에 유행했던 '사회적 경제' 등의 내용을 차용한 것이라 생각해서, 매우 압박하며 제자를 공격했다. 표현에 서툴렀던 제자는 나의 공격에 한참을 당황하다가,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다. "저는 인간이란 내 옆의 사람이 굶주리고 있는데, 나는 홀로 먹을 것이 있다고 해서 행복해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같이 잘 살고 싶습니다." 충격이었다. 제자가 나보다 훨씬 훌륭했다. 제자의 이 말은 가슴 속에도 새겨졌다. 이 제자는 고대 경제학과를 합격했고, 졸업 이후 로스쿨에 가서, 지금은 검사를 하고 있다. 인간은 더불어 잘 살아야 하는 존재다.
분노의 포도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심정을 상징한다. 모든 사회에서는 이러한 포도가 뜻하지 않더라도, 결실로 맺힐 위험성이 있다. 이럴 때... 미화하거나 숨기지 말고, 또... 그렇다고 자포자기 하지도 말고... [분노의 포도]에서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을 떠올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결국은 가족 공동체다. 가족이 살아야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 [분노의 포도]는 안일한 영혼을 뒤흔들어서.. 진실에 이르도록 돕는다.
버킷리스트를 좋아하지 않지만, 조드 일가의 이동 경로인 66번 도로를 바이크로 따라 일주하고싶은 바람이 있다. 아이가 이제 2살인데, 언젠가 갈 수 있겠지.
[분노의 포도]에서...
* 어쩌면 모든 사람이 하나의 커다란 영혼을 갖고 있어서 모두가 그 영혼의 일부인지도 몰라.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알겠더란 말이야. 그게 너무 분명해서 이게 틀림없이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 이건 확실히 압니다.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난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어요. 난 행운이나 불운 같은 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확신하는 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권리가 없다는 것. 사람은 모든 일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어요.
*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할 생각이 있느냐가 문제죠."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햇다.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아무것도 못해요. 캘리포니아에도 못갈 거에요. 하지만 할 생각이 있다면, 어떻게든 해내겠죠."
* 소유라는 것이 원래 사람을 '나' 속에 고착시켜 '우리'로부터 영원히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 고발조차 할 수 없는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 울음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다른 모든 성공을 뒤엎어 버리는 실패가 있다. 비옥한 땅, 곧게 자라는 나무들, 튼튼한 줄기, 다 익은 열매. 그런데 펠라그라를 앓고 있는 아이들은 그냥 죽어 갈 수밖에 없다. 오렌지가 이윤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검시관들은 사망 증명서에 사인을 영양실조로 적어넣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일부러 식량을 썩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강에 버려진 감자를 건지려고 그물을 가지고 오면 경비들이 그들을 막는다. 사람들이 버려진 오렌지를 주우려고 덜컹거리는 자동차를 몰고 오지만, 오렌지에는 이미 휘발유가 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물에 떠내려가는 감자를 바라본다. 도랑 속에서 죽임을 당해 생석회에 가려지는 돼지들의 비명에 귀를 기울인다. 산처럼 쌓인 오렌지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지켜본다.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 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 간다. 사람들의 눈에는 좌절의 빛이 떠오르고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가 자라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의 포도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분노가 충만하고 그 포도 수확기를 위하여 알알이 더욱 무겁게 영글어 가는 것이다.
* "톰, 넌 이제 뭘 할 작정이냐?"
"케이시가 하던 일이요"
"하지만 그 사람은 살해당했어."
"네, 그는 법률을 어기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어머니, 나는 곰곰이 생각했죠. 돼지처럼 살아가는 우리들 가난뱅이가 있는가 하면 아주 기름진 땅이 그냥 놀고 있고, 혼자서 백만 에이커나 갖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몇십 만이 될지 모르는 건실한 농민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만일 우리가 모두 단결해서 전번의 그 사람들처럼 아우성을 치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했죠. 후퍼 농장 때는 사람수가 조금밖에 안됐지만."
"앞으로 나는 어떻게 네 소식을 알 수 있겠니? 네가 죽더라도 내 귀에는 들릴지 모를거고, 다칠지도 모르잖니. 그걸 어떻게 알게 되겠니?"
"뭐, 케이시가 말한 것처럼 사람은 자기만의 영혼을 갖고 있지 않고, 다만 크나큰 영혼의 한 조각을 갖고 있을 뿐인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뭐냐, 톰?"
"그러니까 자신이 어떻게 될 지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어디에나 있다는 말이 되니까요. 어디에나, 어머니의 눈이 닿는 어디에나 말이죠. 허기진 인간들이 밥을 달라고 소동을 일으키면 거기가 어디든지 간에 나는 반드시 그 속에 있어요. 경찰들이 누군가를 패고 있으면 반드시 나는 거기에 있어요. 케이시가 말한 대로라면 나는 모두가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그 고함 속에 있겠죠. 또 굶주렸던 어린아이들이 저녁 준비가 됐다는 것을 알고 소리내어 웃고 있으면 그 웃음 속에서도 나는 있어요. 그리고 우리 식구가 우리 손으로 가꾼 것을 먹고, 우리 손으로 지은 집에 살게 되면 그때도 물론 나는 거기에도 있고요. 이해하실 수 있나요,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