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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th. 침묵 -  엔도 슈사쿠

기도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침묵에게 기도하고 있는 것인가

by GTS May 04. 2024

[나를 키운 팔할의 책]


브런치 글 이미지 1

#16. 침묵 – 엔도 슈사쿠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학년 2학기 중간고사 기간 중에 입영을 신청했다. 다행히 98년 1월 30일에 입대를 하게 되었다. 대떠나면, 마음의 폭풍이 잠잠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곳에 배치되었다.


1군단 정찰대.. 낯선 이름의 그 곳은 적진을 몰래 침투해 들어가는 특수부대였다. 신병으로 부대에 도착했을 때... 고참들은 내 몰골을 보고 어디서 이런 게 굴러들어왔느냐는 표정을 지었었다. 1주일간의 신병 대기 기간이 끝났고, 처음으로 참여한 훈련에서 지옥을 맛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첫훈련에서 낙오를 했다. 침투훈련을 한다고, 밤새 산을 계속 넘어야 했는데, 마지막에 그만 다리가 풀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일주일간 그전까지 살면서 들었던 욕보다 더 많은 욕을 들었다. 중학교 때 괴롭힘 당하던 공포가 다시 떠올랐다.


그 다음 훈련 때부터 이를 악물었다. 만약 여기서 또 낙오를 하면 내 인생은 끝난다는 생각으로 버텼고, 다행히 그 후로 3개월간은 간당간당하지만, 그래도 훈련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때쯤, 후임병도 4명이 들어왔다. 그리고 가장 큰 훈련이 여름에 있었다. 1사단 수색대까지 산악으로  침투해서 도착한 후, 2주간 수색에 동참하는 훈련이었다. 첫째날을 버티고, 둘째날이 되었다. 온힘을 다했지만, 다리가 풀렸다. 낙오의 결과를 알기에 온 힘을 다해 버텼다.


너무도 힘들어서, 너무도 간절히 기도했다. 왼발을 내딛을 때 ‘예수님’이라고 하고, 오른발을 내딛을 때 ‘힘주세요’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렇게 간절히 간절히 낙오하지 않기를 빌면서, 산을 넘었다. 그러다가 절벽에서 다리가 풀려 밑으로 굴렀다. 밑에 나무가 많아서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결국 낙오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2달동안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며, 후임병들 앞에서 치욕스러운 대접을 버텨야했다. 그러나 그보다 마음이 아팠던 것은 그 후 교회에 간다고 할 때마다 내게 쏟아지던 고참들의 비아냥거림이었다.


“네가 믿는 이 네 훈련을 대신 뛰어주진 않는가보군.”


더 속상했던 것은 이 말에 저항할 언어가 내게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도 간절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그분은 침묵하셨다. 간절한 부르짖음에 대한 침묵... 그것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내게 숙제이다. 이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덕택에 나는 믿는 대로 된다든가, 잘되는 나, 긍정의 힘 등과 같은 번영 신학의 오염에서는 나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고통에 신이 침묵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나를 오랜 기간 방황하게 만들었다.


방향을 잃은 방황은 안타까운 일이겠으나, 그래도 나는 나침반을 만날 수 있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내가 만난 나침반 중의 하나였다. 나는 일본 작가들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끼도 별로였고, 나쓰메 소셰키도 별로였고, 많은 아이들이 읽는 소설들도 읽어봤지만, 영 매력을 못느꼈다. 내게 있어서 일본 소설은 거대 서사가 없는 자의식 과잉이었다. 치열한 거대 서사가 없는 이야기에 나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엔도 슈샤쿠의 [침묵]은 달랐다.


[침묵]은 막부 시대의 일본에 온 천주교 선교사들과 이들이 배교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승을 너무도 잘 아는 사제는 스승의 배교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 또한 선교사가 되어 일본땅을 밟고, 스승을 직접 만나서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는 쇄국정책을 펼치던 일본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스승이 처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에 직면한다. 죽으려면 얼마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떠한 위해도 무섭지 않았다.


그런데 천주교를 박해하는 그들이 내세운 조건은 그를 뒤흔들어 놓는다. 그가 믿음을 지키면, 그의 앞에서 그가 전파한 복음을 듣고 이제 막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 마을 사람들을 고문하여 죽이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밟고 지나가라는 명령- 이 배교의 명령 앞에서 그는 몸부림친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러나 신은 침묵한다. 아무런 말도 없다. 그 침묵 가운데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에게 생명과 같은 신앙을 버리는 선택을 한다.


신은 왜 침묵하는가? 간단하게 그가 없기 때문에, 신이라는 존재는 허상이었기 때문에 라고 하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답은 아니다. 내 인생의 25년 가까이를 철저하게 의심하며 고민했지만, ‘신은 죽었다’, ‘신은 없다’라는 결론은 아니었다. 그런 말은 내게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내게 진실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침묵의 순간이 무섭다. 정말 한치 앞도 안보이는 끔찍한 고통들 가운데 세상은 고요하고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며, 그렇게 세상이 침묵하고 있을 때, 나는 그 침묵의 순간이 괴롭다. 이 침묵을 경험하고 나서, 나는 25이상을 방황하며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회색인으로 살았다.


그간의 여정을 통해, 이제 나의 고민은 침묵에 대해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영역에서, 신의 침묵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영역으로 이동을 해 왔다.


[침묵]에서...


* 인간의 계획이란 얼마나 부서지기 쉽고 덧없는 것인가.


*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 푸릅니다.


* 다만 저는 모키치와 이치소우가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신음하고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죽은 오늘도 여전히 바다는 어둡고 단조롭기만 한 소리를 내면서 철썩이고 잇다는 변함없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뿐입니다. 이 바다의 무서운 적막함에서 저는 하나님의 침묵을 느꼈습니다. 비애에 빠진 인간들의 소리에 하나님이 아무런 응답도 없이 다만 말없이 침묵하고 계시는 듯한 그런 느낌을. 주님께서 그들의 비명도 들으셨을까요? 신음하는 이들에게 그분의 침묵을 어찌 설명해야 합니까?


*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


* 기도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침묵에게 기도하고 있는 것일까.


* 저들에게 고통을 줄 권리가 있나? 그 고통은 신이 아니라 자네만 끝낼 수 있네.


* 사랑의 고통이 얼마나 쓰라린지 이제 알게 될 걸세.


*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 당신은 일본에 마지막 남은 신부님이십니다. 제 고행성사를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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