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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S Apr 30. 2024

21th. 십계명을 읽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저는 모태신앙이었지만, 지금은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신앙인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회색인인 거 같습니다. 떠돌이, 탕자, 잃어버린 영혼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함께 중고등부 시절을 보냈으며, 가장 소중한 친구의 형님께서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 고통 속에서도 제게 편지를 남겼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자.' 이 편지를 몇년간 외면해왔지만, 이제는 이 편지에 가타부타 제대로 답을 해야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성경을 읽으며, 생긴 온갖 종류의 생각들입니다. 글을 쓰는 목적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을 정리하며, 형님의 요청에 정직하게 답을 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스물 하나. 출애굽기 20장 4절~6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도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같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러시아를 여행했던 적이 있다. 곳곳에 보이는 종탑들과 교회당을 방문하는 러시아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면, 한국식의 뜨거운 분위기와는 성격이 다른 신앙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동방정교회는 우리와는 달리 일종의 전통적인 제례의식과도 같은 신앙의 모습을 띤다. 그리고 그 예배의 모습은 그 진지함으로 인해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성물에 대한 경배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개신교에 속한 나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랜 시간 친척들과는 달리 우리 집안만 개신교였던 상황에서 성장한 나는 '우상'이라는 단어가 참 어렵다. 제사를 지낼 때 절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제사 음식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등등 여러 번의 충돌도 있었고, 내 스스로 고민도 많이했다. 지금이야 제사 자체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는 정립이 되었지만, 여전히 해결이 안된 숙제가 있다.


'우상'을 만들지 마라. 십계명의 2번째 항목. 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을까. '우상'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기 때문에 당연히 안 좋은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가,  문학을 전공하면서 알게 되었다. '우상'은 일종의 '상징'이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신을 대신할 상징물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상징이란 관념적인 무언가를 구체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상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한다.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상징물을 적극 사용하고 있었다. 


영적인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실체화하는 상징물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를 성경에서는 '우상'이라고 표현한다. 나의 고민은 왜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는데 분명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상징의 사용을 금지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아래의 서술은 이러한 고민에 대한 나름의 해석들이지만, 정돈이 되지 않은 것이다.


상징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실제적으로 느끼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나, 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상징물의 특성으로 인해 왜곡해서 이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보이지 않는 절개를 매화로 표현할 수 있으나, 매화가 절개의 깊은 의미를 온전히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았던 세계를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시작된 상징이 한 편으로는 눈에 안 보이는 세계의 신비를 눈에 보이는 것이는 세계만으로 제한해 버리는 메커니즘이 반복된다. 


신의 형상이라고 추정되는 어떠한 상징물이 보이지 않는 신을 실제처럼 느끼게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신의 광대한 속성을 이해하는 데에 오려 방해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비트겐슈타인 사용한 '말할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가 여기에 온전히 부합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뉘앙스를 차용할 필요는 있다.


하나님께선 자신의 임재를 쉽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상징물의 유익보다, 자신을 온전히 아는 것(모르는 것은 모르는대로 두는 것)에 방해되는 상징물의 해악이 치명적으로 크다고 여기신 것이지 않을까. 그래서 신을 대신할 상징물을 만들지 말라 명하신 것이 아닐까. 그래서 말할수 없는 신의 형상에 대신할 우상을 만들지 말고, 침묵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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