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그 간극에 대하여
처음 글을 쓰며 즐거움을 느낀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그맘때 아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도 용돈이 생기면 문구점에서 소소한 물건을 사고 그것들을 보물처럼 여겼는데 어느 한 날, 예쁜 공책을 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소설이라는 것을 썼다. 어린 나이에도 앉은자리에서 한 편의 이야기를 -이야기라기엔 도입부였지만, 써내려 가면서 희열을 느꼈다.
그래, 그것은 분명 희열이었다.
하지만 나의 글을 읽은 첫 번째 독자의 냉철한 평가로 인해 나는 그날로 글쓰기를 접어버렸다.
그때 내가 쓰던 글의 내용이 어린아이답지 않은 주제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부잣집 여자아이와 가난한 집 남자아이가 좋아하고, 서로 친구가 되는 이야기)
그 뒤로는 쓰기보다는 주로 읽는 편을 즐겼다. 소설, 에세이, 자기 계발서 등.
그러면서도 내심 글을 쓰는 숙제가 있거나,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 되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내가 쓴 글이 참 좋았다. 잘 썼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시간이 흘렀고, 나는 누구나 그러하듯 시련과 고비를 겪으며 자아를 찾아 헤맨다.
직업을 혹은 결혼을 그 답으로 찾았던 적도 있었다. 원하는 대부분의 것을 성취할 수 있었던 데는 아마도 대단한 운이 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나를 더 내세우고 싶은 자존심이 끊임없이 나를 갉아먹었다.
지금은 나에게 좋은 장점이 되어주고 있는 타로 자격증, 출판, 모임의 장, 전문적 커리어 등 모두 그 일환으로 시작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동화책 연구 모임이라는 것을 시작하면서, 어린이 글을 읽기 시작했다.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큰 감흥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불쑥 ‘나도 쓸 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었다.
처음 일 년은 글을 쓰는 내 모습이 멋있었다. 그래서 왜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려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했다.
내게 글을 글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었으므로.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내가 쓴 글을 누군가 읽어주길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출판을 욕심내기 시작한 것도 어느 하드디스크에서 잠자고 있는 글이 애잔하게 느껴진 탓이다.
글쓰기가 나의 즐거운 취미에서 누군가의 삶으로 들어가는 일이 되는 순간,
잘 쓰인 글을 내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책임감이 생겼다. 나의 취미일 때 글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읽혀야 하는 글이란, 그 사람이 지불한 시간에 대한 가치를 돌려줄 수 있을 때 더 의미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다시,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첫 독자의 평가가 떠올랐다.
그날 ‘왜 이런 글을 써?’라는 날 선 말투와, 표정이 선명하게 가슴을 파고들어 이제는 내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 읽히지 않은 글을 검열한다.
그러면 다시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 걸까? 유명해지고 싶은 걸까? 인정받고 싶은 걸까?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게 분명하다면 나는 이제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거란 거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간극을 줄이는 것은 내 장점이니까.
나는 위기철 선생님의 말씀처럼 작가가 되기보단 작가로 살기를, 작가로 살기보단 작가로 죽는 것을 꿈꾼다.
훗날, 글쓰기가 고되게 느껴지고
글을 쓴다는 허영에 허덕일 때, 다시 이 글을 읽은 내게 힘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