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전 <말의 품격>을 읽고 감동을 받아 <언어의 온도> 책을 구매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에세이를 별로 즐겨 읽지 않아서 <언어의 온도> 속에 녹아있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받지 못한 채로 덮어 버렸다. 그 뒤로 줄 곧 그 책은 내 주변에 머물러 있다가 눈에 띄어 다시금 식탁에, 침대에 책이 따라다니고 있다. 그러던 중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유독 마음을 울리는 문구를 발견하고 가슴이 찡해졌는데, 그 문구인 즉 이렇다. “더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다.” 심지어 이 문구가 바로 그 <언어의 온도>에 나왔었다고 하니 내가 책을 제대로 읽었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책을 다시 읽은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좀처럼 흥미가 생기지 않아서다. 어떤 책을 몇 번이고 읽으면 그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다르다고 하는데, 확실히 그런 것 같기는 하다. 요즘 읽고 있는 어린 왕자만 봐도 그렇다. 작년에 분명히 열심히 읽고 수업을 준비했음에도 올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또 다르다. 각설하고.... 그래서 오늘은 언어의 온도 중에서 내 마음에 들어와 박혔던 그 문장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에세이의 내용은 간단하다. 어느 날 필자가 아팠는데, 할머니가 그걸 보시더니 한 번에 아픈 것을 알아보셨단다. 어떻게 아셨느냐고? 여기서 바로 그 문장이 나온다. "더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다." 감정이입인 걸까. 나는 보기와는 다르게 이곳저곳 아프다. 사실은 신체보다도 마음이 아프다.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냐만, 공황장애를 앓은 지 햇수로는 10년째이고, 특히나 정신적 스트레스에 취약한 편이다. 또, 지나치게 감정이입이 심하다. 사람은 물론이고 온갖 사물과 동물에 감정을 쏟는 통에 마음이 남아나질 않는다. 한 번은 오징어 회를 먹고 나오면서 수조에 갇혀있는 오징어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다. 그날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또 한 번은 강아지한테, 식물한테, 곤충한테도 만물에 연민이 생긴다. 방향이 사람에게로 향할 때는 참 주체 할 수 없어지는데, 대게는 엄마에게로 그리고 나와 같은 정신적인 고통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로 마음이 간다.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 아파하면서도 결국 그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찾는 것이다.
나는 나를 위로하는 것에 서툴다. 어쩌면 더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본다는 말은 지독한 자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내가 '더 아픈 사람'이 되어버리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오늘은 그저 나에게 연민이 느껴지는 날이고, 나에게는 누군가가 필요한 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