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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돌핀 Apr 13. 2021

오늘 또 한명이 떠났다.

연예인의 죽음

나는 연예인들이 처한 상황이 직업 활동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상처입음이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수순처럼 보여서 괴롭고, 그리고 그것의 이유가 악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의 직업활동에서도 유사하게 발생하는 일은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일에서 우리는 늘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상대를 평가질한다. 그 평가질 / 오지랖 / 뒷담화가 서로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좋겠지만, 대체로 그 우월감과 지배력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다. 물론 연예인들에 대한 그 평가라는 것은 익명성의 수천 수만인들에 의한 것이므로 그 스트레스의 강도가 어마어마 할 것이다. 


하지만 큰 일을 하던, 작은 일을 하던, 누구든 밥을 벌어먹으려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평가질에 따른 개인의 고유의 감정과 사고의 영역까지 침범당할 수 밖에 없는 불편한 상황은 언제나 겪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마음의 상처를 누군가에게 말을 해서 이해시키거나, 이해 해주기를 바라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마음 건강이니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을 거의 모를 것이다. 


나도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아내가 당면한 마음의 문제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내가 의견이 달라서 그건 아니지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게 관계 밖에 있는 것이라면 한번 두번 넘어갈 수도 있지만, 관계 내적인 문제라면 늘 상처를 주는 언쟁으로 끝나고 만다. 


누구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가 스스로의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를 털어놓을때, 그가 처한 어려움은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이지, 문제를 이해해주거나,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입장에서 이야기를 듣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제도적 시스템에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운 (혹은 그 수가 너무 뻔히 보이는) 빈칸을 주며 채워라, 맞춰라하는 검토놀이를 위한 명령들이다. 이미 그런거 만들어두었으니 한번 하면 안되? 너 이런거 한다며 평가 받아야지? 같은 것들. 관리주체와 관리의 대상이 아님을 설명해야 하는 입장에서의 고단한 입씨름은 결국 관리의 주체가 승리를 하게 된다. 관리하는 사람들은 채워낸 숫자와 설명으로 평가하고 결국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상처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의 입씨름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 같아보이지만 결론적으로는 그저 들어주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나의 감정적 고양을 진정시키고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끌고 나가기 위한, 말하자면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결국 내 말대로 해 라는 결론을 마주하는 경우가 많다. 몇번 그러고 나면 마음속에는 굳은 살이 생기고 말아서, 상대가 원하는 결말에 언젠가 이르는 것은 결국 시간 문제이고, 나만 그 과정에서 정신적인 괴로움으로 탈수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감정과 말의 주짓수에서 편안할 수 있는가? 아무렴 불가능할 것이다. 단 한가지 직업적 상황에서 내가 가져야 하는 유일한 것은, 이게 노트북을, 휴대폰을 끄면 그들은 나를 침범할 수 없다는 가상의 믿음을 굳건히 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갖지 못했던 저들을 보며, 마치 전쟁터에 특정한 목표없이 날아드는 무심한 총탄들에 오늘도 나는 살아남았고, 그들은 우연히 죽은 그런 참호에 같인 군인들의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들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들은 죽어야 할 운명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 자유 의지가 없는 그 총탄들은 우연히 날아들고, 조금씩 우리는 죽어간다.  그들은 죽어서 이제 그 스트레스를 벗어났고, 나는 살아남아서 언젠가 그들처럼 될 운명으로 하루를 산다. 


그 총탄의 이름은 비존중이라는 문화이다. 기분따위와 입장따위는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 그런  야만적 문화속에 하루하루를 작고 큰 유탄을 맞으며 살고 있다.  높은 자존감이란 방탄유리는 글로만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본 적이 없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사냐고? 간단하다. 우리는 일을 할때, 즐거움을 찾을때 상대를 존중한다는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재료를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하지 않고,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이렇게 상처입고 죽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저렇게 빛나고 예쁜 아이들이 사라질때 우리는 놀란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이 평가질에 아파하면, 다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며, 그것도 견디지 못하냐는 말을 쉽게 한다. 우리는 사무에서도 서로에게 총을 쏜다. 원래 그래도 되는 줄 알고 말이다.  남의 평가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냐고? 그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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