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Style by AK Nov 17. 2023

계이름을 잘 외우던 아이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낸 80년대, 90년대는 지금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 아니었다. 세상은 꽤나 천천히 흐르며 서서히 변화했고, 정보와 지식을 바로바로 접할 수 없는 시절이라 많은 부분 우리는 실제 경험으로 체득하던가, 부모님, 언니 오빠등 인생선배들에게서 배우면서 살던 때였다.  언니 오빠도 없고, 부모님과 살가운 대화 ( 잔소리를 안 하시는 부모님이라)를 자주 나누는 편이 아니었던 나는 세상 물정에  좀 느리고, 잘 모르는 철부지였다.  전국각지, 여러 형편에서 살다 온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대학생활을 하다가 교생실습을 할 무렵 나는 겨우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 2라는 공식이었다.

그전에는 그런 걸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대학 다닐 때 친구들의 가정을 가만히 보니 아빠 서울대, 엄마 이화여대인 자녀들은 대개 이대와 서울대를 갔고, 아빠 연, 고대, 엄마 이화여대인 가정의 아이들은 연, 고대와 이대를 다니고 있었다.


실리콘 밸리의 부모들의 학력은 대단하다. 인공 지능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 사실 박사학위자는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만, 컴퓨터 공학으로 석사를 받은 사람들, 특히 아이비리그나 스탠퍼드의 석사가 흘러넘친다. 대개 부모가 학교에서 만났는지, 같은 학교 출신의 부모가 많다. 그러다 보니 내 학생들의 아이큐도 (엄마 +아빠) 나누기 2 법칙에 따라 장난이 없다. 집중력도 아주 좋은 편이다. 5살 6살 아이들도 45분 레슨을 문제없이 해내니 말이다. 이런 경우, 선생님들의 노고가 훨씬 줄어든다. 금방 이해하고 집중하고 실행하는 아이들. 가르치기 쉬운 학생들이다.


피아노를 갓 시작한 왕 초보자의 경우, 계이름을 외워야 하는 것이 최대 난관이다. 미국은 레슨을 일주일에  한번만 하므로 꼬마들은  계이름을 잊어버리고 레슨에 나타나기 일쑤이다. 나는 어렸을 때 매일 레슨을 받았고, 바이엘로 배우면서 기본 도레미파솔까지 비교적 쉽게 외웠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교습책은 도레미파솔로 시작해 줄곧 그 안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알프레드는 그런 반복이 오래지 않고 빠르게 다음 단계인 솔라시도레미...로 들어가므로 모든 계명을 다 외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미국에서는 솔페이지인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아닌 CDEFGABC로 배우는데, 다행인 것은 이를 이용하여 쉽게 계명을 가려내는 법이 있어 큰 무리는 없이 깨우쳐 간다.


이제껏 계이름으로 나를 힘들게 한 아이들은 없었는데, 요즘 들어 한 아이가 생겼다. 오른손의 CDEFG(도레미파솔)을 그렇게 반복해서 알려주고 물어봐도 아직도 어려워한다. 금방 가르쳐 주고 물어보면 대답하는데 조금 지나면 또 잊어버린다. 물론 계속해 나가면 계이름 읽는 것은 곧 익숙해질 터이지만, 가르치는 당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계이름 외우기를 생각할 때마다 생각나는 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5살에 피아노를 시작했는데 첫 방문에 나는 이 아이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너무 천진하고 귀여운 외모에 한없이 스위트하고 착한 그 첫날의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잘 커 주었다. 아직도 마음 여리고 순수하고 스위트한 아이이다. 지금은 벌써 8학년이 돼서 지난가을부터 피아노를 그만두었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아이이다.


처음 배우기 시작하여 아주 기초적인 손놀림의 레슨이 몇 주 계속되었고, 책의 진도에 따라 왼손, 오른손의 차례로 이 아이에게 처음으로 CDEFG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배운 즉시 이것이 이 아이에게 그대로 입력이 되어 버렸다. 고작 5살이었는데, 물어보는 족족 알아맞혔다. 여행을 많이 하는 가족이라 2-3주씩 여행을 하고 돌아왔을 때 나는 걱정스럽게 다시 계이름을 물어본다.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아이들이 모두 잊어버리고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이 아이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냥 한번 외운 건 머릿속에 그대로 저장되는 가 보다. 그 당시에 하도 신기해서 남편에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B는 그냥 알아. 그냥 기억해. 노력을 안 해도 그냥 알아. 이런 아이는 처음이야".


이 아이는 구글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과 23 andMe의 창업자인 앤 워지스키의 아들이다 역시 부모의 머리가 그대로 유전된 듯하다. 이 아이가 3학년쯤 되었을 때였나? 물리학을 배우고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세르게이의 아버지는 망명한 러시아 수학자로 미국에서 수학 교수로 재직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은 학교를 다니셨고 나사에서 일하셨다. 세르게이 본인은 스탠퍼드 박사과정에 있다가 함께 공부하던 래리 페이지와 구글을 창업했다. 앤의 아버지 스탠리 워지스키씨는 하버드와 버클리를 졸업하고 스탠퍼드 물리학 교수, 어머니는 고등학교 교사이시자 저널리스트셨다. 앤은 예일에서 생물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DNA로 조상과 미래 예견되는 병을 찾아내는 회사인 23 andMe를 설립해 CEO로 일하고 있다. 시어머님이 파킨스씨병이시라 DNA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했다는 말이 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이 회사의 테스트 키트를 가지고 조상을 알아보는 테스트를 많이 하고 있는데, 나와 남편도 조사를 해 보았다. 나는 조상중에 1700년대 어느 때쯤 일본인 조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8% 일본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92/8이라는 단순한 나의 테스트 결과와는 달리 남편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시어머님은 96% 영국, 스코틀랜드, 독일 , 스칸디나비아등 서부와 북부 유럽인인 반면, 시아버님은 레바논, 멕시코 원주민, 스페인, 남부 유럽, 심지어 저기 어디 시베리아 어느 민족까지 모두 섭렵하셨다. 이 모든 DNA가 남편 몸에 뒤엉켜 있다. 다행히 둘 다 암, 파킨슨씨병, 알츠하이머 등 무서운 병의 유전자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나오니 건강 관리만 잘하고 살면 큰 문제는 없겠구나 싶다. 어쨌든 이 23 andMe라는 회사는 이런 일을 하는 회사이다.


물론 이 어마어마한 가족의 학력은 보통 가정이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닌 것은 이제껏 살아온 내 경험치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누구나 한두 가지 잘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있다. 그걸 잘 개발하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이런 DNA를 부러워하는 것보다 나 자신을 잘 들여다보고 내가 더 만족하며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실리콘 밸리에서 피아노를 가르친 지 벌써 18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한번 세대 갈이가 있었다. 처음 가르쳤을 때 부모들은 모두 50대가 되었고 지금의 부모들은 30대 초, 중반부터 40대 중반에 걸쳐있다. 역시 세대는 변하는 것이라 그런지 부모들의 생활 모습이며 삶에 대한 태도도 다르고 학생들도 다르다. 여전히 착하고 예의 바르고 순수하지만, 더 똘똘해졌다. 초등학교 저학년인데도 기기를 엄청 잘 다룬다. 나는 점점 느려지고 있는데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꼬맹이들의 피아노 선생님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