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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Apr 30. 2024

2-5. "주지사가 만나잡니다. 미국 주지사가요!"

2장. 욕심, 가자 더 큰 세상으로!

“뭐? 이낙연 총리가 주지사를 공식적으로 만난 마지막 한국인이었다고?”     


10주년 행사에 주지사를 초청하라는 말도 안 되는 본사의 지시에 나는 그냥 알아나 보자는 심정으로 정해진에게 주지사의 참석 가능성을 타진해 보라고 말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 주지사를 공식 초청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정치적 또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50개가 넘는 일본 기업들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기업 중에 오리건주에 진출한 기업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주지사급 정치인이면 이름도 없는 한국 기업의 일개 공장 10주년 행사에 참석할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나로서는 주지사의 참석이 불가능한 그럴듯한 핑계라도 만들어야 했다. 시애틀에 있는 총영사관에라도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전화를 걸었다.     


“총영사님, 오리건주에 있는 현해원 법인장입니다. 저희가 올해 미국에 진출한 지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나중에 공식 문서를 보내겠지만 총영사님께 미리 말씀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그해 신규로 부임한 외교부 총영사는 반갑게 전화를 받으며 축하의 말을 전해왔다.     


“그런데 총영사님, 제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 10주년 행사에 오리건 주지사님을 초청하고 싶습니다. 총영사님께서 한국 정부를 대신해 공식적으로 초청해주시면 어떨까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총영사님.”     


“아 그래요? 혹시 한국에서는 10주년 행사에 어떤 분이 대표로 참석하시나요?”     


“네, 우리 회사 대표이사님께서 참석하실 예정입니다.”     


“네? 법인장님, 제가 얼마 전에 부임해서 제 관할지역인 오리건 주지사를 예방하려고 연락드렸었어요. 그런데 일정이 바쁘다는 이유로 아예 잠깐의 시간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겨우 한국계 미국 전 상원의원께 부탁드려서 딱 10분 동안 인사만 드리고 왔어요. 우리로서는 도와드릴 방법이 없을 거 같네요. 죄송합니다. 법인장님.”     


당연한 결과였다. 본사에서는 미국 주지사를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나는 주지사를 초청하는 일은 아예 체념하기로 하고 회사가 있는 도시의 시장으로 참석 귀빈의 수준을 낮추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시장과의 면담을 추진하기 위해 정해진을 불렀다.      


“정과장, 주지사는 포기하고 시장이나 만나서 얘기하자. 시장은 저번에도 우리 회사에 무슨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으니까 내가 만나서 얘기하면 행사에 참석해서 축사도 해주실 거야. 그건 어렵지 않겠지?”     


“법인장님, 근데 주지사 말입니다. 아예 직접 한 번 만나서 말씀드려 보면 어떨까요?”     


“야 무슨 소리야? 총영사도 안 만나주는 판에 그 바쁜 주지사가 나를 만나 주겠어?”     


“그래도 시도는 한 번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아는 주 정부 공무원이 있습니다. 그쪽을 통해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며칠만 시간을 주십시오.”     


나는 정해진의 의외의 태도에 달갑지 않게 반응했지만 뭔가 솔깃한 느낌이 들었다. 정해진은 결코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우리와는 달리 미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나오지 않았는가. 미국적 정서라면 우리 중 그 누구보다 정해진이 잘 파악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정해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주지사가 만남에 응해줄 거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며칠 뒤 정해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법인장님 큰일 났습니다.”      


"왜 또?"


“주지사가 만나잡니다. 미국 주지사가 법인장님을 만나겠답니다.”     


정해진은 굳이 ‘미국’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뭐, 뭐, 뭐~~어? 무슨 소리야? 주지사가 나를? 왜? 어디서?”     


“근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지사 혼자가 아니라 주 정부 주요 요직의 국장들이 함께 배석한답니다. 주 정부 국장이면 한국으로 치면 다 장관급입니다. 더 큰 문제는 시간입니다. 1시간 동안 토론회를 열자고 합니다.”     


“야 뭐, 뭐, 뭐라고? 한 시간 동안 토론회를? 정해진 너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야 내가 그 정도 영어가 되냐? 근데 토론은 무슨 토론을 한다는 거야?”     


“네 법인장님, 한국 기업의 미국 투자유치 확대 방안이랑요, 한미 기업 간에 교환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자고 합니다.”     


“야 정과장, 그건 내가 한국말로 토론회 하자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근데 그걸 주 정부 각료가 함께하는 자리에서 영어로 토론회를 한다고? 안 돼, 안 돼, 난 못해!!”     


정해진은 주 정부에 근무하는 지인을 통해 우리 회사를 홍보했고 주지사를 만나 주 정부에 도움이 되는 대화를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주 정부 공무원은 그 내용을 주지사에게 보고했고 주지사는 흔쾌히 만남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곧 있을 선거에서 재선을 위해 외국기업 투자 확대가 필요했던 주지사는 판을 키워 아예 토론회를 제안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미 날짜와 시간까지 확정해 정해진에게 통보해 온 것이다.      


나에게는 이 제안이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영어였다. 일상 회화라던가 내가 운영하는 사업과 관련된 영어는 그나마 들은풍월로 어떻게 해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투자유치와 기업연수에 관련된 고위 공무원들의 전문적인 용어를 알아듣는 일은 보통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토론회를 물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장차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그날 이후 제대로 잠들 수조차 없었다.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던가? 주지사와의 토론회가 한창 준비 중이던 우리에게 또 하나의 비보가 전해졌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우리 회사가 수출하던 제품에는 쿼터제도(Quota System)가 적용되었다. 한국 내수시장 보호를 위해 정부에서 지정한 품목의 수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한다. 문제는 정부에서 그 쿼터를 대폭 축소하는 바람에 당장 우리 제품의 수출물량이 거의 반으로 줄어들게 생겼다는 거다.     


수출물량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건 생산물량이 줄어든다는 말이고 생산물량이 줄어든다는 건 직원들을 불가피하게 해고해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수익 또한 점차 줄어들게 될 것이고 종국에는 대규모 적자를 피할 길이 없다. 이처럼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여러 가지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전쟁, 파업, 천재지변에 국가위험과 제도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는 위험이 언제 어디서건 기업의 명운을 노리며 뱀처럼 도사린다. 하지만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자에게는 그 어떤 위험도 기업을 포기하는 적절한 명분이 될 수는 없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죽음을 각오한 마지막 전투를 마다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의 일이다.     


직원을 해고하고 물량이 감소하는 문제도 큰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성장추세에 맞춰 이미 확보해 둔 대량의 원료였다. 우리가 취급하던 제품의 특성상 일정 기한 이내에 생산되지 않는 원료는 변형이 온다. 비싼 원료의 변형이 오고 생산에 차질이 길어지면 앉은 자리에서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다.     


사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가 부임하자마자 본사의 승인 없이 원료구매를 거의 두 배에 가깝게 늘렸다는 사실이다. 처음 부임 당시 오랜 기간 적자로 인해 위험기업으로 분류된 우리 회사에 대량의 원료를 주려는 미국 현지 회사는 없었다. 심지어 현지 주 공급처에서마저 전년도 물량의 반으로 공급을 줄이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해왔었다. 필요한 양의 원료를 공급받지 못한다는 건 바로 법인의 폐쇄를 의미한다. 그걸 그대로 두고만 볼 수 없던 나는 부임과 동시에 미국 내 메이저 원료공급사를 찾아가 ‘생사여탈生死與奪’의 담판을 짓기로 하고 메이저 업체 대표자와 독대를 신청했다.     


“나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려고 한국에서 왔습니다. 하나는 회사를 죽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회사를 살리는 겁니다. 만일 당신이 우리 회사에 원료공급을 반으로 줄인다면 나는 회사를 죽일 겁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한국 시장의 상당 부분을 잃을 겁니다. 대신 당신이 나에게 충분한 물량의 원료를 공급해 준다면 나는 회사를 살릴 겁니다. 아니 물량을 2배로 늘릴 겁니다. 자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배수의 진을 치며 매우 비장한 표정과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라.’ 나는 당신과 싸우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진정한 파트너로서 당신과 함께 Win-Win 하려고 미국에 온 겁니다. 우리는 한국의 대기업이고 아직 많은 시장 확보의 여력이 있습니다. 결정은 당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의 결정이 우리 회사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습니다.”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지 미국 사장은 털이 부슬부슬한 손을 불쑥 내밀더니 악수를 요구했다. 그리고는 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나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용기가 마음에 듭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저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신이라면 내가 기존 물량의 두 배를 드리겠습니다. 대신 약속한 대로 꼭 한국 시장을 늘려주세요. 그러면 우리는 강력한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원료는 확보되었고 나는 약속대로 꾸준히 시장을 넓히며 현지 원료업체와 강력한 신뢰 관계를 구축해 오고 있었다. 만일 이대로 한국 시장이 무너진다면 회사는 큰 적자와 함께 모든 면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주지사와의 토론회와 물량감소의 위기까지 겹쳐 한 없이 시름 하던 차에 진화식이 나에게 다가와 '의미심장意味深長'한 한마디를 던졌다.     


“법인장님,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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