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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Apr 26. 2024

2-4. 찬란한 날개, 추락은 시작되는가?

2장. 욕심, 가자! 더 큰 세상으로

나의 예상대로 진화식의 항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사에 문제가 생겨 본사에 보고를 한다는 자체로 진화식은 자신의 오만함을 만천하에 알리는 꼴이 된다. 게다가 당장 어디서 정해진과 같은 인재를 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보고 창구를 진화식으로 단일화한다면 진화식은 온종일 보고하느라 다른 업무를 들여다볼 여유도 없어진다. 눈치 빠르고 약삭빠른 진화식이 그걸 그대로 감당할 위인이 아니다. 혹 정해진이라면 모를까.     


“법인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해진 과장을 실지로 그만두게 할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 과장이 정말 사직서를 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진화식은 ‘한 번만’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그리고 ‘한 번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세상 불쌍한 사람의 표정이 된다. 만일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본다면 나는 영락없이 아주 몹쓸 사람으로 보일 것이고 그는 너무나 가여운 한 마리 양처럼 보일 것이다. 이 모든 게 연기라면 그는 정녕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감이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진화식은 자신이 원하는 거라면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아주 교묘하고 치밀하게 그리고 끝끝내 얻어내고야 마는 주도면밀周到綿密함을 보여줬다.     


나는 조용히 두 사람을 다시 한 자리에 불렀다.     


“진화식, 정해진! 내 말 잘 들어. 너희들이 서로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인지 알아? 생각해 봐라. 너희 둘 나이도 동갑인 데다가 그것도 미국에서 만났어. 그뿐이냐? 이 시골 바닥, 이 작은 회사에서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 거 같아? 나 같으면 벌써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을 거야. 너희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 보완관계야. 서로 챙겨주고 위로해 줘야 한다는 말이지. 그리고 나에게는 양쪽의 날개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어느 한쪽이라도 날개가 꺾이면 새는 날 수가 없어. 그건 새의 죽음을 말하는 거야. 나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너희 둘 중 하나라도 안 보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우리는 서로에게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해, 알았어?”     


둘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이 “네”라고 대답했다.     


둘 앞에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의 마음은 늘 정해진 쪽에 가 있었다. 진화식의 차가운 얼굴과 모진 말이 정해진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파리목숨을 살아가는 영주권 없는 설움에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나는 이런 일은 반드시 반복될 거로 생각했다. 정해진에게 더는 그런 괴로움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진화식은 내가 미국에 도착한 그 시점부터 항상 영주권에 대해 강조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영주권을 취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지로 미국 영주권은 세계적으로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미국을 들어올 때 입국심사장에서 영주권이 있는 사람과 일반 여행객 또는 비자로 입국하는 사람의 차별을 당해 본 사람은 안다. 영주권이 미국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영주권은 그야말로 노동이나 여행과 같은 수단으로써의 존재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식별코드와 같은 것이다.     


우리 회사는 다른 회사와는 달리 영주권 취득에 대한 제한 규정이 없었다. 나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영주권을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에 하나 내가 갑자기 미국을 떠나게 된다면 아이들 교육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주권은 나에게 일종의 보험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진화식에게도 마찬가지다. 결국 진화식은 자신이 영주권을 가지기 위해 그토록 나에게 영주권을 강조했던 거였다.      


‘그렇다면 정해진은?’ 진화식의 말대로라면 한 회사에 영주권 신청자가 많으면 신청 자체가 거절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와 진화식에 이어 정해진까지 동시에 영주권을 신청한다면 모두에게 불리한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순간 공자의 가르침 하나가 떠올랐다.      


“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欲 勿施於人”,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라는 뜻이다. 이 의미를 반대로 새기자면, 내가 가지고 싶은 건 반드시 남도 가지고 싶은 게 세상의 이치라는 뜻이다.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정해진은 얼마나 간절히 영주권을 원했겠는가? 그 성격에 말 한마디 못 하고 냉가슴을 앓았을 게 뻔했다. 나는 다시 두 사람을 불렀다.     


“진차장, 영주권 신청하자! 대신 정해진 과장도 함께 신청할 거야. 우리 중에 누가 되고 안 되고는 운명에 맡기는 거야. 진차장이나 나는 한국 회사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정 과장은 오히려 여기서 나가면 다른 방법이 없잖아? 각자 서류 꼼꼼히 챙겨서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이상.”     


진화식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며 나는 속으로 씩 웃었다.     




어느새 계절은 봄을 지나 여름으로 향해 가며 우기 동안 내리던 비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시장의 분위기까지 가세하면서 사업은 순풍에 돛을 단 듯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본사에서 두 번째 감사가 나왔다. 지난해 감사가 미국 법인의 생존이 달린 피 튀기는 전투였다면 올해의 감사는 많은 전리품을 들고 개선한 장수에게 베푸는 연회와도 같았다.      


많은 사업 분야를 두루 경험해 본 나로서는 각 사업장에도 부익부 빈익빈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잘 되는 사업장에는 좋은 인재가 넘치고 예산이 풍부하다. 게다가 분위기까지 좋다. 그런 사업장은 계속 선순환의 고리를 이어간다. 하지만 반대로 부실한 사업장은 어디에도 제대도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들이 모인다. 예산이 부족해 어떤 일을 제대로 추진해 볼 수도 없다. 당연히 직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심지어 사고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라면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려운 사업장일수록 더 유능한 인재를 배치하고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 악순환의 고리를 과감하게 끊어내야 한다. 결국 기업도 하나의 몸과 마찬가지다. 어느 한 곳이 곪으면 그 상처가 퍼져 몸 전체에 이상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미국 법인은 결국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완전한 선순환의 구조로 탈바꿈했다. 그런 공로에 치하하듯 다른 해라면 감사반을 꾸려 반장과 반원을 보냈을 감사에 사내 감사국을 총괄하는 국장을 직접 보내왔다. 감사에 감사국장을 직접 보낸다는 건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먼저 감사에서 잘못을 지적하는 일에 중점을 두지 않겠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연말에 있을 인사에 업무 성격상 사장과 동등한 독립적 지위를 가지는 감사국장의 의견이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의미는 나에게 이번 감사가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건 어쩌면 새로 사장으로 취임한 든든한 나의 후원자 김주환 사장의 특별한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감사국장 송필연은 사장인 김주환과 대학교 선후배 사이다. 나와는 그동안 특별한 친분이 없었지만, 김주환 사장과 막역한 사이라는 공통점으로 우리는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예상대로 감사는 시종일관 우호적이었고 나는 그런 기회를 통해 감사국장 송필연에게 그동안 미국에서 이루어낸 성과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일과 시간이 끝나면 같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미국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송필연 국장과 나는 개인적인 대화의 시간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우리는 서로 너무나 닮은 점이 많았고 공감 어린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마지막 밤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호형호제하는 관계로까지 발전되었다. 나로서는 올 연말에 있을 인사에서 마치 말의 고삐를 양손으로 힘껏 움켜쥔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필연 국장이 나에게 해주었던 말에 나는 더욱 큰 희망을 품게 되었다.     


“어이, President!”     


그는 어느새 인지 모르게 명함에 새겨진 영문 직함으로 나를 호칭했다.     


“올해가 미국 법인 설립한 지 10년째 되는 해잖아? 내가 본사에 가서 얘기할 테니까 10주년 행사를 여기서 거창하게 준비해 봐. 그러면 아마 회장님이 직접 오실 수도 있고 아니면 대표이사님이 오실 거야. 그러면 그럴 때 연말에 있을 인사에 대해 확실히 각인시켜줄 수 있잖아. 현해원 법인장이 미국에서 이룬 성과는 정말 대단한 거야. 본사에서도 사장님이랑 모두 그건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으니까 10주년 행사만 멋있게 기획해 보란 말이야.”     


송필연 국장은 아예 대놓고 나에게 승진에 대한 조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세상이 이렇게 나를 위해 돌아갈 수가 있단 말인가? 사업은 사상 유례없는 호실적을 보이고 있었고 미국 현지의 양 날개라 할 수 있는 진화식과 정해진의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게다가 한국 본사의 양 날개라고 할 수 있는 사장과 감사국장이 합세해서 나의 앞날을 이끌어주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라면 올해 승진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어.’     


흐뭇한 미소가 나의 입가를 맴돈 것도 잠시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우리의 삶이란 게 항상 이 모양이다. 태평한 날이 이어지면 오히려 불안하고, 좋은 일이 있고 나면 반드시 화가 따른다. 무언가를 얻고 나면 그걸 지키기에 급급하고 좋은 자리에 오르면 언제나 도전하는 자의 위협으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하게 된다. 결국 날개를 단다는 것은 언젠가 있을 추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래 가사처럼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며칠 후 한국으로 돌아간 송필연 국장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이, President, 10주년 행사에 대표이사님이 직접 가시기로 했으니까 너 준비 열심히 해야겠다. 야, 근데 중요한 오더가 하나 있어. 10주년 행사에 미국 현지 귀빈들을 최대한 많이 초청하라는 지시야. 특히 주지사는 반드시 참석시켜야 한다니까 지금부터 잘 준비해 봐.”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미국 같은 연방 정부에서 주지사는 대통령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시골에 있는 일개 한국인이 운영하는 공장에 주지사를 참석시키라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 이건 미국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처사다. 이 도시에 시장이라면 혹 모를까, 주지사는 이 정도 소규모 외국인의 행사에 절대 참석할 리 없다는 나의 주장에도 송 국장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통화하는 내용을 옆에서 듣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정해진에게 말했다.     


“야 정 과장, 10주년 행사에 대표이사님이 직접 오신다고 글쎄 주지사를 초청하란다. 어거지를 부려도 정도가 있지. 이게 될 법이나 한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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