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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Jun 28. 2024

4-7. 이름 없는 살생부

제4장. 비극,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


축하 전화 대신 날아든 문자에는 문서 하나만 덜렁 첨부되어 있었다. 그것도 밤새 초조하게 기다릴 나를 위해 친한 동료가 마지못해 보낸 문자였다. 웃음조차 나지 않았다. 아니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5년 전 오랜 투병 끝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던 날도 그랬다. 아무리 오래 아프셨다 하더라도 그렇게 쉽게 가실 일은 아니었다. 울먹이던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도착한 장례식장, 잠자듯 누워계시는 어머니의 싸늘한 주검 앞에서 나는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며 가슴은 억장같이 무너져 내렸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게 현실이라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치 가위눌린 꿈처럼 울어도 울어지지 않았고 입을 벌려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칠삭둥이 천재 한명회를 시켜 살생부를 만들게 하고 살생부에 이름이 오른 자들을 처참하게 살해했다. 하지만 대표이사는 그의 가신들을 시켜 승진자 명단에 나의 이름을 올리지 않음으로써 나를 살해했다. 비록 목숨을 끊진 않았지만 이건 엄연한 살인이었다. 그들은 건실한 직장인으로서의 나의 인격을 살해했고 그동안의 모든 나의 경력을 살해했다.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 두 번의 승진이 남았지만 이제 물리적으로 나는 그걸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보수적인 회사는 다음 승진을 위해 반드시 보내야 할 최소기한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격과 경력이 살해된 직장에서의 나의 꿈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한참 어린 후배들 밑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어찌 고개 들어 큰일을 도모하는 리더가 되겠는가? 인사에서 억울하지 않은 사람 없다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억울함을 넘어 처참한 살인과도 같았다.     


승진자 명단에는 이전 승진이 나보다 늦은 사람들과 나이 어린 후배들의 이름으로 빼곡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단연 현재 대표이사 비서인 서 차장이었다. 같이 근무할 때 막내였던 그는 당연히 나보다 한참이나 승진이 늦었고 나이 차도 많았다. 하지만 대표이사의 권력을 등에 업고 당당하게 승진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런 걸 두 번 죽인다고 하던가? 가족도, 같이 슬퍼해 줄 그 누구도 없이 두 번 죽은 나는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그렇게 뜬눈으로 지새웠다.     






“야, 너 이거 뭐냐? 너 이러려고 나한테 조용히 기다리라고 한 거야? 나한테 제대로 엿 먹이려고? 이게 동기를 인사팀장으로 둔 죄와 벌인가? 내가 이 꼴 볼 거였으면 회사 벌써 때려치웠지, 이 더러운 새끼들아! 동기가 그 잘난 그룹 인사팀장님이신데 나도 그 덕 좀 보자. 지난주 마감한 희망퇴직자 명단에 내 이름 좀 올려주라. 더는 회사를 위해 일할 맘이 없다. 아니, 일할 힘이 없다. 사무실 나가서 직원들 볼 낯도 없고, 이쯤에서 이 더러운 악연 끝내고 싶다. 어차피 희망퇴직 목적이 필요 없는 인간 잘라내는 거 아냐? 이렇게까지 승진을 못 시키겠다는 건 회사에 필요 없다는 얘기잖아. 아니면 꼭 좀 사라졌으면 하는 사람이던가. 이런 식으로 나를 계속 회사에 다니게 하는 건 그냥 고문을 하겠다는 거지, 안 그래? 그러지 말고 나 좀 꼭 잘라주라. 제발!”     


승진자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음으로써 나를 살해한 그들은 사실상의 살생부인 희망퇴직자 명단에는 끝끝내 이름을 올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고문하고 싶은 거였다. '도대체 왜? 내가 무슨 독립투사도 아니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될 것처럼 조용히 지내라며 나를 안심시킨 이유는 완벽한 인격살인을 위해서였을까? 그런데 왜? 현해원이 도대체 뭐라고? 현해원 그까짓 인간이 뭐라고?'     






승진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면 수백 통의 전화로 불이 났을 나의 전화기는 나처럼 오랜 시간 침묵했다. 아니 아예 죽었다. 아침이 되자 오랜 침묵을 깨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1년 후 있을 대표이사 인선에서 재기를 꿈꾸며 열심히 세를 모아가던 김주환 사장이었다.     


“해원아, 어젯밤 늦게 네 소식 들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될 건 안다. 나도 36년 직장생활에 이런 더럽고 치사한 인사는 처음이다. 지난해에도 당연하게 생각했다가 결과가 안 좋아서 설마 올해까지야 하고 방심했던 나의 잘못이 큰 거 같다. 이럴 줄 알았다면 너에게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설마설마하다가 또 큰 죄를 짓게 된 거 같다. 너한테 정말 미안하다.”     


“아니, 사장님께서 왜 저한테 미안합니까? 그리고 죄라니요? 사장님께서 유일하게 저한테 진 죄라면 그건 대표이사가 되지 못한 거지요. 근데 미리 말했어야 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도 나중에 안 일인데 말이야. 너 지난해 말에 잠깐 한국 출장 나왔을 때 나랑 저녁 먹었던 거 기억하지? 그때 2차 호프집에서 네가 했던 건배사가 아마 문제가 된 거 같아. 그걸 옆자리에서 술 마시던 윤 부장이 들었나 봐. 너 그 당시 윤 부장이 대표이사 최측근이었던 거 알지? 우리는 그 쥐새끼가 옆 테이블에 있는지도 몰랐잖아? 근데, 글쎄 그날 우리가 한 이야기를 그 쥐새끼가 다 듣고 대표이사한테 일렀다는 거야. 나는 술을 많이 마셔서 네가 무슨 건배사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말이야.”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김주환 사장이 차기 대표이사가 될 거라는 여론이 지배적이던 그때, 한껏 분위기에 취한 나는 술김에 김주환 사장을 위해 건배사를 제의했다.     


“그룹의 새로운 희망, 김주환 대표이사를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세상에 말도 안 돼! 설마 그 건배사가 한 직원의 미래를 완전히 짓밟을 일이라고? 없는 자리에선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지금이 무슨 제5공화국인가? 만약 술에 취한 그 건배사가 나를 이렇게까지 고문하는 이유라면 그 인간의 옹졸함이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지난해 모두가 승진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마지막에 인사가 뒤집힌 이유가 시기적으로 설명되었다. 하지만 올해는 모든 오해가 풀렸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마지막 보고에서 그가 보여준 그 호의적인 제스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리 그가 옹졸한 소인배라 할지라도 대기업의 간부를 거쳐 대표이사라는 최고의 자리를 5년째 이어오는 사람이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지만, 승진 인사에 이은 후속 인사가 그 모든 걸 증명해 주었다.     


<인사발령 해외사업부(신설부장 서 두 신>     


‘이럴 수가! 주재원으로 뽑은 전 비서는 억지로 법인장을 만들어 미국의 내 자리로 보내더니, 이번엔 모든 사람이 나를 적임자라고 예상했던 해외사업부에 현 비서인 서두신을 승진시켜 부장으로 앉히다니, 이건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들은 나 하나 죽이자고 벌써 몇 년의 계획을 세우고 있단 말인가? 그럼 도대체 그다음은 뭐지?’     


인간에 대한 환멸이 적개심을 넘어 두려움이 되어 나의 소름을 돋웠다. 누군가를 만나는 게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두 번의 실패는 위로받아 마땅하지만 계속되는 실패는 그 사람의 인격이 된다. 위로의 대상이 아니라 기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이런 것일까?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말했다. 말하지 않은 슬픔보다 더 가슴 아픈 슬픔은 없다! There is no grief like the grief that does not speak.”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상황에서 갑자기 작가가 되고 싶다고 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어렴풋이 작가를 꿈꿔보긴 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욕구가 일어난 건 처음이었다. 작가가 되어 이 모든 일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억울함에 대처할 영향력이 없는 내가 미웠다. 부족한 학벌이 미웠고, 힘없는 부모가 미웠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회사만 바라보고 지낸 세월이 미웠다. 더는 이런 나약한 존재로 살고 싶지 않았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 다시는 이런 인격살인의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오직 슬픔을 가진 자만이 슬픔을 다스릴 수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찾아왔지만 나는 낯을 들고 회사에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질 않았다. 다시 이틀의 휴가를 얻어 겨우 마음을 정리한 후 출근과 동시에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님제가 그렇게 못마땅했으면 고칠 점을 알려 주셨어야지요어떻게 단 한 번의 기회도 없이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제가 3, 4년이나 승진이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그 이유라도 알아야 다음을 대비할 거 아닙니까도대체 뭡니까?”     


“야, 현 차장.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인사는 다 저 위에서 하지 나는 아무 힘이 없어. 왜 나한테 그래? 그리고 1년 그거 금방이야. 해외사업부도 신설되고 했으니까 1년 동안 또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결과 있을 거야. 이참에 확실하게 능력을 보여주라고!”     


지금 저보고 그 잘난 비서 서두신 부장님을 모시고 1년을 더 일하라는 겁니까서두신이는 제가 그룹 본사에 있을 때 코 질질 흘리던 막내였습니다승진시험이 저보다 5년이나 늦은 거 아세요? 그리고 저보다 7살이나 어린 거 아십니까그걸 아시고서 저한테 그 밑에서 1년간 열심히 하라는 겁니까그랬다가 서 부장님한테 잘 못 보이면 내년에 또 어떻게 되는 거지요저보고 납작 엎드려서 위대하신 서 부장님을 하늘처럼 모시라 이겁니까? ‘토사구팽 兎死狗烹도 정도껏 하셔야지요저를 아예 솥에 넣고 삶으실 작정이십니까저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 짓 못 합니다지사로 보내 주십시오지방에서 조용히 살게 해 주십시오.”     


“무슨 말이야? 현 차장이 해외 사업은 국내 유일의 전문가잖아. 해외에서 4년간 법인장 했으면 이제 회사를 위해서도 일해야지. 사업계획에도 그러겠다고 썼잖아. 3년 이내에 점유율 40% 달성하고 업계 1위 하겠다고?”     


뭐요씨X! 지금 장난합니까그럼 나를 승진시켜서 부장 자리에 앉혔어야지새파란 후배 새끼는 대표이사 비서라고 서둘러 승진시키고굳이 자회사까지 보내 부장 자리 앉혀놓고 나보고 그 밑에서 또 1년을 개처럼 살라고좋습니다그렇게 발령 내세요. 내가 서두신이 모시고 일한다는 약속은 못 하겠고 이거 하나는 약속할게요올해 안에 대표이사실에서 시체 두 구 치울 각오 하십시오아 참대표이사실까지 갈 거 없겠네어차피 그 인간이 그 인간인데사장님이 나하고 같이 죽읍시다!”               




<P.S>


이것으로 <미국 주재원의 비극> 제4장 「비극」을 마무리하고,

이어서 마지막, 제5장 「부활」을 연재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미국에 거주하던 가족들의 삶을 정리하기 위해 미국에 와 있습니다. 서부의 끝에서 동부의 끝으로 진학하는 딸의 이사를 위해 하루에 10시간씩 운전하는 가운데도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저 자신이 믿기지 않습니다.     


모두 여러분이 그동안 보내 주신 과분한 사랑의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 그때 작가가 되고 싶었던 저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가닿았나 봅니다.

제 글을 구독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5장에서도 최선을 다해 작품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반전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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