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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Jun 25. 2024

4-6. 슬픔보다 더 무서운 슬픔의 전이

제4장. 비극,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


왜 슬픔은 전이되는가? 암이 무서운 이유는 암이 발생한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가장 취약한 필수 장기로의 전이에 있다. 간암으로 10여 년을 투병하던 장인어른이 결국 생각지도 않았던 십이지장 출혈로 하루아침에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결국 나에게서 발생한 슬픔이 아내에게 전이되었다. 우리 가족이 하나의 몸이라면 아내는 가장 취약하고 가장 필수적인 장기다. 아니 딱히 어떤 장기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눈이요 귀요 손이요 발이며, 심장이고 폐였으며 간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문제가 생겼다. 혈압이 200을 넘나들며 심장에 이상을 느꼈다. 어느 순간 심한 두통과 함께 말까지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마음과는 달리 미국 병원은 신속히 움직여 주지 않았다. 속절없이 몇 시간을 허비한 후에야 의사를 만났지만 이미 아내의 얼굴은 뒤틀려져 있었다.      


오랜 기다림과는 달리 아내를 진찰하던 의사의 짧은 진단은 “Bell's Palsy, 안면신경마비”였다. 이어지는 의사의 설명은 더 잔인했다. 마비는 가장 심각한 경우라 할 만큼 나쁘게 왔고 예후 또한 좋지 않을 거라 했다. 전화로 아내의 상태를 설명하던 의사는 “Luckily”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했다. 뇌졸중이 아니라 다행이라 말했지만 나는 그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얼굴에 온 마비는 그 어떤 경우라도 행운이 될 수 없다. 특히 여자에겐 오히려 저주와도 같은 것이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그녀의 마비된 얼굴은 수많은 노력에도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간암 투병 중 똑같은 안면마비 증상을 겪었던 장인을 떠올리며 아내가 말했다.      


“내가 아빠를 너무 미워해서 벌 받나 봐. 혈압에 녹내장 그리고 안면마비까지, 아빠가 앓던 걸 내가 다 물려받네. 왜 하필 안 좋은 거만 모두 아빠를 닮아 갈까?”     


나는 다시 ‘전이 轉移’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슬픔은 전이된다. 아니, 도려내지 않은 슬픔은 전이된다. 슬픔은 슬픔 자체가 아니라 전이될 때 무섭다. 대를 이어 전이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전이된다. 전이되기 전 원발지에서 암을 도려내듯 슬픔도 도려내야 한다. 하지만 슬픔과 아픔은 그 어떤 칼로도 도려낼 수 없다. 오직 다른 차원으로의 승화를 통해서만 도려낼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온 이 고통이라는 암 덩어리를 더는 전이시키지 않아야 한다. 반드시 승화시켜 이 고통과 슬픔의 암세포를 멸절시키리라!’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라.”라고 고려의 승려 보조국사 지눌은 말했다. 넘어진다는 건 단순한 넘어짐이 아니다. 바로 디딜 땅을 잃어버리는 거다. 세상에 유일하게 딛고 일어설 땅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지난해 간첩 이철진이 미국을 다녀간 이후로 나는 점점 나를 잃어버렸다. 디딜 땅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를 잃어버리고 다시 예전처럼 일어서서 걷고 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전의 나로 돌아가야 했다. 실의에서 빠져나와 유쾌함으로 돌아가는 일, 불평과 불만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꿈으로 돌아가는 일, 그것이 내가 딛고 일어설 땅이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다시 딛고 일어나는 내 마음의 땅은 어느새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다시 특유의 쾌활함과 친화력을 되찾으면서 과거의 인연들이 다시 다시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3년 전 거절하던 나를 끝끝내 설득해 미국으로 보낸 당시 본부장은 자회사 전무가 되어 나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당시 인사부장은 같이 일하는 부서의 본부장이 되었고 인사 차장은 잠시 지방 근무를 마치고 다시 인사 차장으로 복귀했다. 모두 내가 겪은 인사의 억울함을 너무나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변호하면서 사장과 대표이사가 가졌던 나에 대한 오해는 하나둘 풀려나갔다. 오해가 풀리자 사장은 급기야 부장 이상이 참석하는 간부회의에 나의 참석을 허락했다. 내 삶의 모든 걸 삼켜버릴 듯 거세게 몰아치던 역풍이 어느덧 미풍으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향긋한 바람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래, 조금 늦으면 어때? 삶은 결국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야. 나는 나의 방향을 믿는다.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그 꿈에 이르게 되겠지. 그래, 다시 꿈꾸는 거야!’     







“법인장님, 헤헤안녕히 지내셨습니까?”     


시애틀 공항을 떠나올 때 출국 수속도 채 끝나기 전, 매몰차게 등을 돌렸던 진화식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래 오랜만이다. 잘 지내? 웬일이야? 그동안 전화 한 통 없더니!”     


아 네법인장님 가시고 나서 혼자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니 너무 바빴습니다요즘은 법인장님이 너무 그립습니다법인장님 계실 땐 늘 묵직하고 든든한 느낌이었는데 요즘은 왜 그런지 너무 허전합니다꼭 남의 집에 서자로 와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구관이 명관 舊官名官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봅니다.”     


진화식은 어떤 루트로 알았는지 벌써 연말에 있을 인사애 대비하고 있었다. 해외 사업을 총괄할 부서가 신설된다는 건 새로운 부서에서 미국 법인의 모든 통제권을 가진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그 부서의 부장이라면 진화식의 운명을 손아귀에 쥘 거라는 건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지금까지의 여론으로 볼 때 해외 사업을 총괄할 부장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나에게 진화식은 미리 선수를 치고 나선 것이다.     


진화식의 그런 뻔뻔스러움에 나는 치가 떨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그가 부럽기도 했다. 어찌 보면 현대사회는 나보다 진화식 같은 사람을 더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단조로운 연기를 보이는 단역배우라면 그는 천의 얼굴을 가진 명연기자였다. 내가 땅에서만 기어 다니는 무능한 쥐라면 그는 필요에 따라 하늘과 땅을 자유자재로 활주 하는 박쥐였다. 만약 정해진 과장의 언질이 없었다면 나는 그의 연기에 또 깜빡 속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화식과는 달리 종종 안부를 묻던 정해진의 말에 나는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다.     


진 차장은 처음부터 아예 손 법인장 집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법인장님 계실 때는 주말은 꼭 지켜 주셨잖아요? 이젠 아주 주말도 마다하지 않습니다손 법인장이 대표이사 비서에 인사과 출신이라 그런지 아주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할 정도입니다. 참 권력이 무섭긴 무서운가 봅니다진화식이 아마 지금 간이랑 쓸개가 없을 겁니다손 법인장 집에다 놔두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거든요손민수 법인장은 벌써 진 차장의 극성팬이 됐습니다저 정도 연기에 안 넘어가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죠뭐라 말씀드리기도 그렇고 참 난감합니다.”     


마지막 인수인계에서 나는 이런 가능성과 수법에 대해 수도 없이 반복하고 강조했다. 아무리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이렇게 쉽게 넘어갈 줄이야. 어쩌면 손민수는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지금은 분명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게 뻔하다. 멀쩡한 인간을 아주 나쁜 놈이라고 해댔으니 말이다. 결국 인간은 직접 당해보지 않고서는 정신을 못 차리는 동물이다. 그런 진화식에게 나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 진 차장 고맙다. 역시 나 생각해 주는 건 너밖에 없다 야! 근데 뭐 하나 물어보자. 너 시애틀 공항에서 우리 가족 배웅할 때 왜 그렇게 빨리 돌아갔어? 우리 보통 손님 보낼 때 탑승수속 마치고 게이트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었잖아 왜?”     


아 네법인장님. 그땐 제가 정말 눈물이 나서 차마 법인장님의 뒷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차 타고 내려오는 내내 눈물이 나서 운전을 못 할 정도였습니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 후로 몇 달 동안 전화 한 통 없었구나!’ 나는 이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해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된 신설 부서 설립계획은 많은 사람의 호응 속에 탄력을 받아 나가고 있었다. 경험한 모든 지식과 노하우를 그 계획서 하나에 온전히 쏟아부으면서 나의 새로운 희망은 점점 그 실체를 만들어갔다. 미국에서의 사업이 미국만의 단편적인 사업이었다면 신설되는 부서의 일은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늘 최초를 지향하는 나에게 승진과 함께 최초의 해외사업부 부장이 되는 기회가 턱 밑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향후 3년간 계획한 대로 사업이 진행된다면 나는 그야말로 이 분야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런 게 바로 가 보지 않은 길이 주는 매력 아닐까?      


모든 법률과 규정을 정비하고 인사와 예산에 이르기까지 이제 신사업에 관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마지막 관문인 이사회 승인까지 성공적으로 통과한 나는 자회사 전무와 함께 또다시 대표이사실을 향했다. 미국에서 갓 돌아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던 때와는 180도 달라진 분위기 속에서 보고가 끝났다. 그리고 마침내 흘린 대표이사의 흡족한 미소에 나는 안도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나를 향해 대표이사가 성큼 다가섰다. 미국에서 돌아와 인사하던 그때처럼 우격다짐하듯 주먹 악수를 들이민 그가 활짝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현 부장그동안 고생했다우리 회사 국내 사업은 만년 2등밖에 못 하는 거 알지해외 사업은 꼭 1등 해라알았지그렇게라도 1등의 한을 좀 풀어보자!”     


악수를 위해 나가려던 나의 주먹이 자동으로 멈춘 대신 허리가 90도로 꺾였다. 이런 행동은 절대 의도된 게 아니었다. 종을 치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도 몰래 반사적으로 일어난 행동이었다. 몇 번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장”이라는 한 단어에 그만 파블로프의 개가 되었다.      


“감사합니다. 대표이사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결과로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표이사님!”     


나는 생각했다.     


‘그래 죽으란 법은 없어. 이제부터 시작이야. 언젠간 나도 저 자리의 주인이 되고 말 거야!’     


액자 속에 있는 <上善若水 상선약수>라는 네 글자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듯했다.     






어느덧 매서워진 겨울바람과 함께 승진 인사발령이 예고된 금요일이 다가왔다. 보통 때 같으면 어울려 술을 마시며 인사발표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벌써 몇 번의 실패를 맛본 나는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고 싶었다. 늘 그렇지만 인사는 기다리는 사람 애간장을 녹이려는 듯 늦은 밤에야 발표하곤 했다. 하지만 그 정보가 어떻게 새는 건지 좋은 결과가 확정된 사람에겐 언제나 발표보다 빨리 누군가에게서 축하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함이 커지는 이유다. 자정이 넘어가자 시계 초침 소리는 마치 천둥이 울리듯 귀청을 파고들었다.     


불면의 시간이 지나 어느덧 토요일 새벽 3시, 쥐 죽은 듯 고요한 새벽, 목탁 소리를 도착 알림음으로 설정해 놓은 카카오톡 메시지가 정적을 깬다.     


“똑똑똑똑 똑또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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