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이야기 4. 절대를 만나다
지난해 11월, 인천에서 시애틀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갔다. 많은 것은 바뀌어 있었다. 철밥통과도 같았던 직장을 떠났고 새롭게 진행하던 사업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세월이 4년이나 흘렀고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쳤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공항 라운지로 가서 독한 위스키를 연거푸 마셨다. 취하지 않고는 긴 비행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반쯤 취한 몸을 이끌고 비행기에 올랐다. ‘지긋지긋한 이놈의 이코노미석’ 속으로 말을 뱉으며 자리에 앉았다. 시애틀로 가는 비행기에는 만다린을 사용하는 중국인들로 가득했다. 알 수 없는 언어들과 아이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비행기의 굉음으로 완성된 오케스트라는 마치 쇼팽의 장송곡(Funeral March)을 연상케 했다. 스산한 더위로 식은땀이 흘렀다. 러닝셔츠 위로 걸쳐 입은 두꺼운 스웨터는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받아냈다. 출발시간이 지났음에도 비행기는 움직일 기미조차 없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손님을 기다린다는 기내 방송이 반복되어 흘러나왔다. 그들이 늦게 도착하는 것보다 시간이 흘러 술에서 깨는 게 더 싫다고 생각하다가 나는 잠이 들었다.
기내에 흐르는 분주한 느낌이 잠든 나를 깨웠다. 승무원들이 기내식을 배급하고 있었다. 캔맥주 하나를 주문해 플라스틱 컵에 부으며 문득 떠오른 단어 하나.
‘소도(蘇塗)’
외부의 그 어떤 손길도 닿지 않는 공간과 시간, 하늘에서의 자유만큼 나는 땅에서 자유를 누린 적이 있는가? 나는 모든 나의 죄로부터 도망쳐 비행기라는 소도(蘇塗)에 머무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나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비행기가 도착하는 그 시간까지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나를 더욱 편안하게 했다. 비록 비좁은 자리에 앉아 몸은 불편할지라도 하늘에 떠 있는 그 시간은 나에게 허락된 가장 큰 자유의 공간이었다. 나는 땅으로부터 출가한 수도승이 되어 사색에 빠져들었다.
10시간의 비행, 속세를 벗어난 그곳, 죄진 자라도 잡아갈 수 없는 소도, 그러나 그 자유의 공간까지도 나를 따라와 괴롭히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있었다. 이 존재는 한시도 나를 놔두지 않았다. 땅과 하늘을 가리지 않았고 꿈과 현실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까지 이 괴물은 존재했고 죽음의 순간에도 나를 떠나지 않을 기세다. 이놈만 생각하면 난 모든 걸 포기하고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이놈만 아니라면 난 삶을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왜 이놈과 만났을까? 이젠 이놈 목소리만 들어도 진저리가 처진다. 한시도 끊임없이 나에게 속삭이는 이놈을 이젠 죽여버리고 싶다.’
“만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하고 그릇도 가득 차면 넘친다. 物極必反(물극필반) 器滿則傾(기만즉경)” - 사마천 <사기>
사람은 육체적 고통이 극에 달하면 의식을 잃거나 심지어 쇼크로 죽기도 한다. 큰 수술 중에 마취에서 깨어나 사망하는 일이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쇼크로 사망하는 게 아니라 육체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몸이 그 고통을 피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정신적 고통도 마찬가지다. 고통이 극에 달하면 몸은 정신을 왜곡하여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 한다. 심지어는 자살을 선택해 몸을 죽임으로써 정신적 고통을 끊으려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정신적 고통의 밑바닥에서 의식의 깨어남을 경험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자신을 밑바닥까지 끌고 간 것들이 주변의 환경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생각임을 체험으로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정신적 고통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철석같이 자기라고 믿고 있던 에고(ego)의 껍질을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한순간에 벗어던지는 것이다.
비행의 중간지점에 다다라 나는 다시 사색에 빠졌다. 모두 잠들어 기내는 조용했고 기류도 안정적이었다. 비행기의 엔진음만이 세상의 바탕인 듯 침묵처럼 흘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의식의 멈춤을 경험했다. 비행기의 엔진음과 시간은 서로 짝을 이루어 끊임없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나의 의식은 더 이상 그 흐름을 따르지 않았다. 모든 것은 흘러갔지만 의식만은 멈추어 그 흐름을 모두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흐르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멈추어 그 흐름을 보는 것이 진리임을. 우주의 모든 것이 변해가고 확장해 가도 이것만은 멈추어 그것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몸은 늙고 죽어도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온몸에 전율과 환희가 넘쳤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멈추어 있음. 그 멈춤이라는 바탕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니, 모든 것을 빨아들여 매 순간 사라지게 했다. 그 바탕 위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 창조되고 있었고 창조된 모든 것은 어김없이 사라졌다. 그 바탕은 우주 만물 모든 것을 존재하게 했고 또 사라지게 했다.
그렇다면 지금껏 이토록 나를 괴롭혀온 이 존재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매 순간 모조리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왜 우리는 괴로워하는가?
위 질문에 대한 저 나름의 해답을 끝으로, 다음 화에 <미국 주재원의 비극>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그 고해에서 늘 동시를 살아가는 인연으로 우리는 만났습니다. 그 인연에 감사하며 여러분의 삶이 고통에서 놓여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