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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Nov 22. 2024

2-1. 불법 이민자, 영주권의 유혹

<소설 영주권, Green Card> 2장. 불법 이민자 되어


“아니 사장님, 약속이랑 틀리지 않습니까? 지금 회사를 그만두라면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말밖에 더 됩니까? 아니면 저더러 불법 이민자로 살라는 겁니까? 같은 동포끼리 이건 아니잖아요. 3년 동안 영주권만 바라보며 개처럼 일했습니다. 저 이대로는 억울해서 절대 그만 못 둡니다.”     


“그러게, 행실을 똑바로 했어야지. 자네에 대해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나 알아? 나는 그 말 차마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아. 어쨌든 난 자네랑은 일 못 하겠으니 그리 알아. 두말하기 싫으니까 귀찮게 굴지 마.”     


한국인 사장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소에서 영무에게 제공한 조건은, 2년간 미국 전문대학에서 자동차 정비를 배운 뒤 정비소에 정식 취직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 2년 동안은 수업이 없는 시간을 빌려 정비소에서 일을 배우되 보수는 주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한국에서 오만 정이 털린 영무는 한국을 떠나기 위해서 그 조건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생활하며 2년간의 학업을 마친 영무는 약속대로 정비소에 취업했다. 하지만 1년간의 실습 기간이 끝나자 정비소 사장은 영무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영주권을 지원하겠다던 애초의 약속을 깬 것이다. 해고 사유는 우습게도 사장에게 잘못 전달된 소문 때문이었다.     


모아 놓은 돈만으로는 유학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영무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주말 시간제 근무를 했다. 유학생 신분으로는 취업할 수 없는 약점을 이용해 저렴한 시급을 제공하고 불법적으로 고용하는 형태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동안 영무가 현금을 훔친다는 거짓 누명이 씌워지고 있었다. 영무는 2년간 성실히 일했을 뿐 현금을 훔친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 그런 거짓 누명이 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했다. 어느 날 편의점 사장이 같은 교회를 다니던 정비소 사장에게 넌지시 일렀다.     


“차 사장님, 혹시 영무가 캐셔 일을 보나요? 현금을 관리하냐고요?”     


“아니요, 우리는 현금 거래가 많지 않아요. 그리고 접수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영무가 현금을 만질 일은 없죠. 근데 왜요?”     


“아니 이상하게 영무가 주말에 일하는 날이면 꼭 돈통에 현금이 모자랍니다. 큰돈도 아니고 아주 기분 나쁘게 조금씩 안 맞아요. 아무래도 영무가 현금에 손을 대는 거 같아요. 돈이 부족하면 말을 하면 될 텐데 왜 그런 푼돈에 손을 대는지 모르겠어요.”     


그날 이후 정비소 사장은 영무가 현금에 손을 대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경계했다. 그리고 저렴하게 쓸 수 있는 1년 동안은 영주권을 빌미로 영무를 부려 먹은 후 이제 와 해고를 통보하고 나선 것이다. 영무에게는 3년간의 노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순간이었다.     


“사장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저 자신에게 부끄러울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소문만 믿지 마시고 제 말을 좀 들어주세요.”      


미국은 고용주에게 한없이 관대한 나라다. 아무 이유 없이도 언제든 종업원에게 해고 통보를 할 수 있다. 영무가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정비소 사장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렇게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 비단 영무 혼자만이 아니었다. 한국인 고용주들은 영주권에 취약한 유학생들을 상대로 이런 수법을 심심찮게 써 왔다.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을 지급하며 그들의 약점을 이용한 뒤 막상 목돈이 들어가는 영주권 지원 시점에 이러한 일을 핑계로 직원을 해고하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불법 이민자가 된 영무는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어떻게 떠나온 한국인가? 영무는 미국에 도착해 영주를 찾아 헤매던 기억을 떠올렸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영주가 보낸 21번째 편지에 적힌 주소로 찾아갔다. 그곳은 대학교 근처의 스튜디오형 아파트였다. 경비원을 설득해 어렵게 문을 두드린 아파트에 영주는 없었다. 편지에 적힌 주소를 보며 재차 삼차 확인했지만, 그곳에 영주는 살지 않았다. 심지어 영주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무는 거의 매일 그 아파트를 찾아 영주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한 달이 되도록 영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살지 않는 게 분명했다. 영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다닐만한 학교를 찾아 또다시 많은 날을 헤매었지만, 영주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마치 자기를 피해 꼭꼭 숨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영주 하나만을 생각하고 미국으로 건너왔건만, 그녀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고 그에게 남은 건 이제 힘겹게 모은 생활비 조금과 월세방 한 칸, 언제 멈춰 설지 모르는 작은 차 한 대와 불법 이민자 딱지뿐이었다. 지금이라도 어딘가에서 불쑥하고 나타날 거 같은 영주를 떠올리며 영무가 생각에 잠겼다.     


‘너를 버린 그날부터 저주는 시작되었다. 5개월이나 된 가여운 생명을 한 점의 연민도 없이 버린 차가운 부정(父情)으로부터 저주는 시작되었다. 벌은 모두 네가 받겠다고 했지만, 벌이란 네 것 내 것으로 딱 자를 수 없는 거지. 벌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내리는 거야. 모든 인간은 스스로 벌하며 살지. 그래 이 모든 게 벌이라면 다 내가 저지른 일의 대가야. 그 벌의 끝이 무언지 내가 다 받을게. 그 벌로서 나의 죄가 사하여진다면 나 무슨 벌이라도 받을게. 영주야, 너 지금 어디 있니? 그저 먼발치에서라도 네가 씩씩하게 사는 모습 보고 싶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너를 데리고 지구 끝까지라도 도망치고 싶다. 너와 그 아이를 위해 이 생명이라도 바치고 싶다. 제발 날 용서해라 영주야! 널 찾기 전엔 난 절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내 앞에 나타나 주렴, 영주야!’     




미국 내 불법 이민자 1,300만 명, 영무는 그중 한 명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불법 이민자도 큰 문제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일부는 가짜 사회보장번호(SSN : Social Security Number)를 불법 매수해 회사에 취업한다. 고용주는 그들이 불법인 줄 알면서도 채용한다. 그들의 저렴한 노동력은 미국 내 소위 3D(Difficult, Dangerous, Dirty) 업종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다. 영무가 정비소에서 잘려 불법 이민자가 됐다는 소식을 들은 편의점 사장이 영무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영무야, 정비소 차 사장한테 네 얘기 들었다. 듣자 하니 무슨 오해가 있었나 봐? 아무튼 당분간 우리 편의점에 와서 일 좀 도와줘. 그래도 네가 일할 때가 제일 좋았던 거 같아. 미국 애들은 당최 믿을 수가 없어. 툭하면 결근에 그만두기를 밥 먹듯 하고. 너 새로운 일 찾을 때까지만 나와서 좀 도와줘. 내가 매니저급으로 시급은 쳐 줄게.”     


영무는 울며 겨자 먹기로 편의점으로 돌아갔다. 당장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편의점에 들어서자 사장이 반기며 영무를 안았다. 그리고 같이 일할 직원을 소개했다.     


“영무야, 너랑 같이 일할 아가씨야. 멕시칸인데 그런대로 쓸만해. 내가 새로운 매니저 올 거라고 얘한테 말해 놨어. 그러니까 잘 가르쳐서 써먹어.”     




그녀는 자기의 이름이 씨에떼(Siete)라고 소개했다. 씨에떼는 스페인어로 7을 의미하는 행운이 가득한 이름이라고 말했다. 키가 작고 몸매가 뭉툭한 보통의 멕시코 여성과는 달리 혼혈인 그녀는 한눈에 봐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따뜻한 올리브 빛 피부는 조명을 받아 건강하게 빛났다. 긴 검은 머리를 쓸어 넘길 때마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실루엣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그녀의 눈빛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건장한 한국인 영무를 보자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이제 서른두 살이 된 영무의 눈에 그녀는 아직 앳되게만 보였다.      


거의 매일을 함께 일하며 영무와 씨에떼는 금세 친한 사이가 되었다. 어린 씨에떼는 손님들에게 친절했고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일한 지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씨에떼가 영무에게 다가와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저기요, 릭(Rick, 영무의 영어 이름) 당신이 사는 집에 나를 좀 받아줄 수 있나요? 지금 사는 집에서 나오고 싶은데, 갈 곳이 없어요. 이 집에서 계속 살다 간 미쳐버릴 것 같아요. 당신에게 피해 주지 않을게요. 절 좀 도와주세요.”     


“아니, 무슨 소리야 씨에떼? 지금 사는 집에서 남자친구랑 함께 지낸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요. 릭, 남자친구 집에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남자친구가 저 몰래 바람을 피웠어요. 그것도 제가 잘 아는 친구랑요. 둘은 아니라고 발뺌하는데 저는 이미 그 둘이 그 짓 하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어요. 남자친구는 아직도 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견딜 수 없어요. 다 거짓이에요.”     


왕방울만 한 씨에떼의 맑은 갈색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영무는 외국 여인의 눈물을 직접 보는 게 낯설게만 느껴졌다. 슬픔에 젖어 울고 있는, 소녀티를 갓 벗은 스무 살의 여인이 한없이 가여웠다. 그 모습에 영주의 마지막 애원하는 모습이 겹쳐졌다. 씨에떼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어요. 남자친구 집에 같이 사는 남자친구의 삼촌이 절 성폭행해요. 남자친구가 없을 때면 저를 가만두지 않아요. 벌써 몇 번째인지 몰라요. 남자친구에게 말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삼촌 집에 얹혀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삼촌의 심기를 건드리면 모두 쫓겨난다면서 참으라고 했어요. 저는 그 집에서 창녀가 된 기분이에요. 이러다 혹시 아기라도 생기는 날엔 전 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게 돼요. 그러니 릭, 제발 절 받아주세요. 오래 머무르진 않을게요.”     


멕시코인들의 문란한 성문화를 익히 들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씨에떼의 이야기를 들은 영무는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정은 딱하지만 나도 널 받아줄 만큼 여유가 없어. 그리고 너랑 나랑 나이 차가 있다 해도 우린 남녀야. 남녀가 한집에 산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어? 난 괜한 오해받고 싶지 않아. 미안해, 씨에떼.”     


“릭, 사장님한테 당신이 불법 이민자가 됐다는 말을 들었어요. 저는 미국 시민권자예요.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과 결혼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당신은 영주권자가 될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저랑 한집에 같이 살아야 하는 건 필수고요.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요. 당신은 영주권이 필요하고 저는 집이 필요해요. 다시 한번 생각해 줘요. 제발요, 릭.”     


결혼이라는 말에 영무가 움찔했다. 실지로 미국에는 많은 돈을 주고 위장으로 결혼해 영주권을 얻는 사람도 더러 있다. 젊은 동양 여성들이 늙은 미국인과 가짜로 결혼해 영주권을 얻기도 한다. 미국 이민국에서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와 조사를 철저히 하는 이유다. 불법 이민자인 영무에게 이런 일은 다시없는 기회일 수 있었다. 더욱이 이 불쌍한 여인을 구제하는 일 아닌가. 영무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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