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주권, Green Card> 1장. 더러운 땅
연보랏빛 봉투에서 영주가 꺼낸 건 초음파 사진이었다. 작지만 선명한 아기의 형체가 고스란히 사진에 담겨있었다.
“오빠, 우리 아가야. 18주래!”
초음파 사진 위로 영주의 눈물이 연신 떨어져 내렸다. 넋이 나간 듯한 영무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며 영주가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며 말했다.
“오빠, 나 우리 아기 낳고 싶어. 부모님은 아직 내가 임신한 거 몰라. 만약 알게 된다면 이 아기도 오빠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오빠, 우리 도망치자. 아니, 날 데리고 도망가 줘. 나 모아 놓은 돈 좀 있어. 어디 숨어서 1년은 버틸 수 있을 거야. 우리 같이 가서 아기 낳고 돌아오자. 그러면 그땐 엄마랑 아빠도 어쩌지 못할 거야. 오빠, 나 오빠 정말 사랑해, 그리고 우리 아기도. 꼭 낳고 싶어. 생명은 소중한 거라고 오빠가 말했잖아.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오빠가 말했잖아.”
한동안 말없이 영주와 초음파 사진을 번갈아 보던 영무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한심하다는 듯 눈을 지그시 내리감으며 영무가 말했다.
“너 미쳤어? 너 바보야? 왜 이걸 지금 말하는 거야? 18주가 지나도록 모를 리는 없었을 거고,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너? 더 빨리 말했어야지.”
“오빠가 날 피했잖아. 나도 마음속으로는 오빠한테 이미 몇만 번은 더 말했어.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나도 너무 놀랐고 무서웠다고. 그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었어. 그래서 오빠한테 몇 번이고 편지를 쓴 거야. 그런데도 오빠는 아무 답이 없었어. 아기랑 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내가 너무 미련하게 느껴져서 정말 죽고 싶었다고. 하지만 우리 아기는 무슨 죄야? 이 아기는 아무 죄가 없잖아!”
격앙된 감정에 영주의 목소리가 커지자 영무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은행잎만 바람에 나부낄 뿐 인기척은 없었다. 누가 볼 새라 초음파 사진을 다시 봉투에 쑤셔 넣으며 이번엔 영무가 큰소리로 영주에게 말했다.
“네가 이렇게 멍청한 앤지 몰랐다. 내가 아무리 피했다고 하더라도 이건 시간을 끌 일이 아니지.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한테 알렸어야지. 그러면 일이 쉬웠잖아. 그리고 그런 수모를 겪고도 내가 네 편지를 읽을 거 같아? 내가 바보로 보여? 아무튼 이 일은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난 몰라. 내 인생 여기서 끝내고 싶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애를 낳던, 지우던 내 상관할 바 아니라고. 네가 이렇게 대책 없고 미련한 앤 줄 알았다면 애초에 너 같은 애 만나지도 않았어.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냐고? 젠장!”
영무는 자신도 모르게 모진 말을 퍼붓고 있었다. 분노가 어디서 나오는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무너진 자존심일 수도 있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영주 부모가 자기에게 가할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영무가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정말 진심이야. 나 같은 놈 감당도 못할 거면서 날 먼저 꼬드긴 건 너야. 그리고 지금 내 인생은 엉망진창이야. 아주 조졌다고. 그래서 지금 난 네가 정말 싫어. 제발 부탁이니 내 삶에서 좀 꺼져 주라. 너도, 네 부모도 다시는 내 삶에 나타나지 않길 바래. 그리고 그 애도. 내가 전에 너한테 생명은 소중한 거라고 했던 말은 취소할게. 원하지 않은 생명은 예외야. 그리고 나 그 아이 감당할 자신 없어. 그러니 다시는 연락하지 마.”
무언가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다가서는 영주를 외면하며 영무는 헬멧을 집어 들었다. 헬멧으로 세차게 벤치를 내리친 뒤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헬멧 속에서 욕설인 듯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토바이 엔진음이 분노를 대변하듯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영무가 건물 숲 사이로 사라졌다. 노란 은행잎이 가득 쌓인 바닥에 영주와 연보랏빛 봉투가 함께 쓰러졌다. 스산한 바람만이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가는 영무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마 할 수 없었던 말, 차마 해서는 안 됐던 말은 독한 가시가 되어 죄책감으로 영무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영주를 데리고 도망가고 싶었다.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모질게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로서 제 아이를 가진 사랑하는 여자 하나 지킬 수 없다는 게 설움으로 복받쳐 올랐다. 더는 운전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쏟아지자 영무는 길가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을 도와 일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 다음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술 한잔 사주라!”
다음 날 아침, 심한 두통과 함께 영무가 잠에서 깨어났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일어나 주변을 살피던 영무가 화들짝 놀랐다. 그곳은 영주와 사랑을 나눴던 <신데렐라 모텔>이었다. 심지어 방 호수도 그날과 같았다. 술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오토바이를 끌고 그곳으로 온 게 분명했다. 영주에게 모진 말을 퍼붓고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서 올 때, 힐끗 바라본 영주의 쓰러진 모습이 떠올랐다. 무언가에 홀린 듯 영무가 혼잣말을 뇌까렸다.
“살려야 해!”
영주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전화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휴대전화는 없었다. 술을 마시고 기억을 잃은 사이 어디에선가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머리가 깨질 듯 두통이 밀려왔다. 마치 꿈을 꾸듯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견딜 수 없는 어지러움에 영무는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 깨어난 영무가 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은 벌써 정오를 향하고 있었다.
서둘러 모텔을 나온 영무는 오토바이를 몰아 무작정 영주의 아파트로 향했다. 기세는 콘크리트 벽이라도 뚫을 모양새였다. 하지만 영주의 아파트 앞 금빛 현관에 다다랐을 때, 트라우마처럼 그날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영주 엄마의 모진 말들이 다시 콘크리트 보다 강한 금강문이 되어 영무를 가로막았고, 무시무시한 칼을 든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마치 사천왕처럼 그 문을 호위하고 선 듯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영무가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술에 취한 초라한 모습, 볼품없이 풀어헤친 옷매무새, 몸에서는 역겨운 냄새마저 풍기고 있었다. 이윽고 체념한 듯, 고개를 푹 떨군 영무가 울음 섞인 혼잣말을 토해냈다.
“그래, 이 꼴로 뭘 어쩌겠다고? 이번 생은 틀렸어. 능력 부족이야. 하늘이 허락했다면 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내버려 두진 않았을 거야. 이것도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미안하다 영주야. 못난 날 용서해라. 아니, 절대 용서하지 마!”
대학 캠퍼스에는 흰 눈이 내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무는 캠퍼스 곳곳에서 영주를 찾곤 했다. 하지만 더는 영주를 학교에서 볼 수 없었다. 깊어진 겨울은 어느새 새해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새해와 함께 미국 우표와 소인이 찍힌 편지 한 통이 영무에게 날아들었다. 영주의 편지였다.
오빠가 말했지. 우리의 생명은 지구의 나이만큼, 46억 년간 진화한 결과라고, 그래서 생명은 소중한 거라고. 우리 아가는 그보다 더 오랜 세월 우주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가 모두 담긴 생명이었어. 5개월, 배 속의 나이로는 5개월이지만 빅뱅 이후 우주의 나이로 치면 우리는 모두 평등한 생명이었어. 지금도 내 귀엔 그 여린 생명이 들려주는 작은 심장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기적이라는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확률로 잉태된 소중한 생명이었어. 그런 생명을 인간의 사악한 의지로 제거한다는 건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야. 그 생명을 레스토랑 가서 스테이크 한 덩어리 자르듯 해치우는 사람이나, 그걸 도운 의사나 죄의 크기는 다르지 않을 거야. 씻을 수 없는 원죄를 가진 인간만이 신의 영역에 있는 생명의 질서를 무너트리지.
하나의 생명을 죽이는 건 하나의 우주를 송두리째 도려내는 일이야. 하나의 생명은 하나의 우주야.
한때 진실로 오빠를 사랑했던 죄로 모든 벌은 내가 받을게. 그 벌 중 하나는 내 소중한 생명을 업신여긴 한국 땅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 거야.
부디 행운을 빌게. 영주.
편지 봉투에는 행운을 상징하는 7이라는 숫자 3개가 나란히 적혀있었다. 영무는 그 숫자들 아래에 21이라고 썼다. 영주도 그 편지가 21번째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처음으로 읽은 영주의 편지는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
영주의 마지막 편지를 받은 이후 영무는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 존재했다. ‘이 더러운 땅을 벗어나는 것’ 부자였던 할아버지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간 땅, 피땀 흘려 일군 아버지의 공장을 휩쓸어간 화마, 사랑했던 여인과 자신의 핏줄마저 빼앗아간 비정한 이 나라에 혐오가 일었다. 영무는 영주가 보낸 마지막 편지에 찍힌 주소(Portland, Oregon)를 보며 매일같이 속으로 되뇌었다.
‘나 반드시 네가 있는 땅으로 갈 거야. 내 인생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길은 다시 너를 만나 용서를 비는 것뿐이야. 설령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대도 좋아. 나의 모진 말이 나의 진심이 아니었음을 알리고 싶어. 널 사랑했지만, 너와 내 아이를 지킬 용기가 없었다고 솔직히 말하고 싶어. 혹 네가 날 받아준다면 평생을 참회하며 살아갈게. 내가 너무 어리고 어리석었어. 부디 날 용서해 줘.’
영주가 없는 시간이 흐르는 사이 영무는 대학을 졸업했다. 한국에서의 삶에 심각한 염증을 느낀 영무의 목표는 오직 영주가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는 거였다. 거기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주권을 취득하는 거였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영무에게 영주권을 취득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밖에 없었다. 애초에 투자이민이나 가족 기반 영주권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결국 남아있는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는 미국 회사에 정식으로 취업하는 거였고, 마지막 하나는 미국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면 주어지는 1년의 실습 기간에 고용주로부터 영주권 지원을 얻어내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전문 기술이 없는 영무에게 미국 취업이 성사될 리가 없었다. 영무는 미국 이민을 위해 자동차 정비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차선책으로 선택할 수 있는 유학에 대비해 부모님의 식당 일을 도우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어느덧 2년의 세월이 지났다. 드디어 기회는 찾아왔다. 영무가 원하던 지역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소에서 조건부 취업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영무는 영주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꺼냈다. 그 위에 적힌 영주의 주소를 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다려라. 권영주, 이번엔 내가 너에게 간다. 더러운 한국 땅이여, 이젠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