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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Nov 08. 2024

1-5. 사랑은 장난이 아니랍니다

<소설 영주권, Green Card> 1장. 더러운 땅


“야 너, 애를 데리고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이 시간까지 뭘 한 거냐고? 무슨 짓을 했길래 애가 입을 안 열어? 너 영주 아빠가 누군 줄이나 알고 이런 짓거리하는 거야? 영주 아빠가 늦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이 꼴을 봤다면 넌 오늘이 초상날이었어, 알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는 바람에….”     


“뭐? 죄송합니다? 내가 경고하는데 다신 우리 영주 만날 생각하지 마. 그나마 허우대는 멀쩡해서 심심풀이로 만나게 뒀는데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어. 한 번만 더 만났다간 너뿐만 아니라 네 부모가 운영하는 그 정육점까지 모두 망하게 해 줄 테니까. 우리 영주는 애당초 너 같은 애랑 어울릴 애가 아니야. 똑똑히 알아들어!”     


전화기의 정지음이 들릴 때까지 영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영주 엄마는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허우대가 멀쩡하다는 것과 자기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까지 뒷조사를 이미 끝냈단 말인가. 영주 엄마의 말은 영무의 자존심을 무참히 무너트렸다. 가난은 누구의 책임이란 말인가? 영무는 가난은 그나마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난한 부모와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는 말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차라리 영주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를 위해 고생하시는 부모를 욕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날 밤이 지나고 2주가 지나서야 영주는 학교에 나타났다. 그사이 몰라보게 핼쑥해진 모습이 집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을 겪은 게 분명해 보였다. 영주가 무슨 할 말이 있다는 듯 다가와도 영무는 그녀를 외면했다. 마음은 벌써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리고 있었지만, 영주 엄마의 말들을 떠올리면 차마 다가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아니 다가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코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말이 가진 어떤 에너지 때문이었다. 말은 이미 구름처럼 흩어진 지 오래지만, 저주의 에너지는 남아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자기만의 길을 가는 이는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다.>     


영무는 읽고 있던 책 속 니체의 문장에 노란 형광펜으로 줄을 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있던 봉투의 오른쪽 아래에 '20'이라는 숫자를 쓴 뒤 방 안에 있는 나무상자에 집어넣었다. 자취방으로 배달된 영주의 스무 번째 편지였다. 영무는 혼자 중얼거렸다.     


“읽지 않을 걸 알면서 왜 자꾸 편지는 보내는 거야? 차라리 말로 하지, 말로는 제 부모의 잘못을 빌 용기조차 없는 거야? 네 부모가 나한테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는 한 너랑 다시 만날 일은 없어.”     


첫 키스, 첫 경험, 그리고 첫 이별, 운명의 장난보다 더 짓궂었던 하룻밤이 지난 지  세 달이 지났다. 계속 피하기만 하는 영무를 더는 설득할 길이 없어지자 영주는 어느 날부터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무는 그 어떤 편지도 열어보지 않았다. 다정했던 영무는 더없이 냉소적이고 더없이 염세적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처음엔 영무도 영주를 외면하는 자신의 모습이 미웠다. 처해 있는 현실이 미웠고 자신의 나약함은 더 견딜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매일 보면서 말 한마디 걸지 못하는 영무의 마음도 늘 가시밭길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영주와 만나 그날처럼 사랑할 꿈을 꾸었다. 같은 강의실, 바로 곁에 있는 영주를 보면서도 영주가 그리웠다. 그럴 때면 영무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내가 더 당당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면 돼. 세상이 인정하는 사람이 되면 영주 부모도 어쩌지 못할 거야. 지금은 비록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반드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거야. 그때 더 멋있게 더 성숙한 모습으로 만나자, 영주야!’     


그러던 어느 날, 영무의 자취방으로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어둑한 저녁, 까만 정장을 입은 사내 둘을 보자마자 영무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뒷조사’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사내들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어쨌는지 다짜고짜 영무를 향해 소리쳤다.     


“눈깔이 그기 뭐꼬? 사내새끼가. 벌써 쫄아삤나. 니 특수부대 출신이라매. 아니꼬우모 한 번 뎀비 보던가, 이 새끼야. 니 혹시 정신 몬 차릴까 봐 사모님이 우리를 보낸 기라. 아따 참말로, 귀찮쿠로. 우리가 존말로 할 때 알아들으모 좋겠는데. 말끼 몬 알아들으모 니 좋아하는 그 사시미칼로 배때지 콱 쑤시삔다. 이 백정새끼야!”


    

놀란 영무를 향해 두 사내가 바짝 다가서며 더욱더 교활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니 우리 헹님이 누군지 모르제. 동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물어봐라. ‘권시민’이 누구냐꼬. 그래, 영주 아부지 말이다. 우리 헹님 인자 맘 딱 잡고 내년에 국회의원 출마할 끼다. 신문사 인수해 가 인자 분위기 좋게 바깠다 아이가. 그라이께네 니가 좀 도와 도고, 알았제? 오늘은 여거까지 1절 끝났다. 니 내한테 2절 노래 듣고 싶으마 또 우리 영주 아가씨한테 들이대라 마. 내 2절은 더 멋진 노래랑 땐스 준비해 오꾸마.”     


영무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처음엔 놀람과 두려움에 떨렸고 그다음엔 억울함과 분노가 그의 몸을 가만두지 않았다.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한동안 숨을 헐떡이던 영무가 구역질을 토해냈다. 역한 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된 침을 뱉어내며 영무가 흐느꼈다.      


“권영주, 너 도대체 뭐냐? C8, 나한테 다들 왜 이러는 건데?”     


그날 이후 영무는 영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뒤늦게 영주 아버지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된 영무는 경악했다. 놀람과 허탈함에 어이없는 한숨만 내쉬었다.


영주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각종 밀수와 밀매, 불법 도박과 오락실로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렇게 생긴 돈으로 지하세계를 섭렵하며 지역의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사실상 조폭의 두목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 대부분 사업을 후배들에게 일임하고 본인은 봉사와 지역사회 발전 모임에 참여하며 권력에 대한 욕심을 키워나갔다. 급기야 위기에 몰린 지역신문사를 헐값에 인수하면서 그 지역의 지하세계 그리고 돈과 언론을 장악한 영주 아버지는 마지막 야욕인 권력욕에 불타고 있었다. 어느덧 성공한 사업가와 언론인으로 변모한 영주 아버지에게 영무는 애당초 성에 찰 수 없는 존재였다. 아니 존재하지 말아야 할 존재였다.     




가장 사랑했던 순간이 가장 수치스러운 이별의 순간이 되었지만, 영무는 아파할 수조차 없었다. 한순간에 분노와 증오로 바뀌어버린 사랑 앞에 영무의 세상은 혐오로 가득했다. 영무 아버지가 그랬듯, 세상에 대해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무엇이든 부여잡고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지만, 마음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영주와 첫 키스를 하던 날의 초록은 이제 붉은 단풍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스산한 가을바람과 함께 알 수 없는 번호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오빠, 나 영주야. 제발 전화 끊지 말고 내 말 좀 들어줘. 제발, 이대로 전화 끊으면 나 정말 죽어. 오빤 아무 말 안 해도 돼. 내가 하는 말 그냥 듣기만 해 응?”     


영주의 울먹이는 목소리에는 차마 전화를 끊을 수 없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이대로 전화를 끊으면 영주가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무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오빠, 나 이제 학교 못 나가. 며칠 후에 미국으로 떠나야 해. 아빠가 이미 모든 수속을 끝냈어. 근데 나, 이대로는 미국 못 가겠어. 오빠 얼굴도 못 보고 떠나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나 내일 병원 진료가 있어. 모처럼 혼자만의 외출이야. 그때 잠깐 나 좀 만나줘.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꼭 해야 할 말도 있고. 딱 10분이면 돼. 오빠 제발 한 번만.”     


미국, 마지막 한 번, 꼭 보여주고 싶은 것, 꼭 해야 할 말, 10분, 영주가 뱉은 단어들이 영무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영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영무는 이미 거부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동안 영무를 괴롭히던 영주 엄마의 모진 말도, 깡패들의 끔찍한 협박도, 영주의 간절함 앞에서는 그 에너지를 모두 잃어버린 듯했다. 영무가 무심한 듯 대답했다.     


“알았어, 대신 딱 10분 만이야. 그리고 마지막이고.”     




병원 뒤뜰 벤치에는 노란 은행잎이 비 오듯 날리고 있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영무가 헬멧을 벗어 벤치에 놓으며 영주를 바라봤다. 4개월 만에 만난 영주의 얼굴은 은행잎처럼 노랬다. 그 무엇도 바르지 않은 얼굴을 보며 영무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화장으로 잔뜩 치장하고 발랄하게 웃던 영주보다 민낯에 은행잎처럼 바래진 영주의 얼굴이 훨씬 예쁘게 느껴졌다. 사랑했던 여인, 아니 사랑만 했던 여인, 하지만 서로의 감정이 식어서가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여인의 파리한 모습이 영무의 사랑이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와락 안아주고 싶은 감정을 누르며 영무는 애써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꼭 보여주고 싶다는 게 뭐야? 아직 나한테 할 말이 남았어? 빨리 말해, 나 얼른 가 봐야 해. 저녁에 부모님 식당에 단체 손님이 있어서 도와드려야 해.”     


영주의 눈에서는 금세 닭똥 같은 눈물이 흘렀다. 소중한 듯 가슴에 품고 있던 연한 보랏빛 봉투에 손을 넣으며 영주가 흐느꼈다.      


“오빠 미안해!”     


봉투를 들고 한 발짝 다가서는 영주에게서 주춤 물러서며 영무가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너 지금? 장난하는 거지? 아, 아, 아니 장난하는 거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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