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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Oct 25. 2024

1-3.사랑에 미래 따윈 존재하지 않아

<소설 영주권, Green Card> 1장. 더러운 땅


6월 중순의 햇살이 영무와 영주의 100일을 기념이라도 하듯 눈부시다. 아침 일찍 학교에 들른 영주는 친구에게 가방을 맡긴 뒤 영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여름보다 더 뜨거운 6월의 날씨 탓인지 반바지를 입은 영주의 옷차림은 속이 다 비칠 만큼 가벼웠다. 갓 사랑에 빠진 스물둘의 청춘은 늦은 봄꽃처럼 향기로웠고 초여름 햇살처럼 뜨거웠다.     


멀리서 영무의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온다. 영주는 짧은 반바지를 손끝으로 잡아 아래로 내리며 다가오는 영무를 바라본다. 영주의 눈빛이 기대로 가득하다. 첫사랑과의 백일, 처음으로 온종일 영무와 함께할 생각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기껏해야 영화 보고 커피 마시고, 저녁이 되면 친구들과 함께 술 마시다 분위기 좋아질 만하면 통금 시간은 어김없이 둘을 갈라놓았다. 사랑은 아쉬움일까? 그들의 아쉬움은 조금씩 쌓이고 쌓여 터지기 직전의 봉선화처럼 부풀어 올랐다.     


“영주야, 우리 오늘 섬으로 갈 거야. 근데, 저 멀리서 너를 본 순간 갑자기 섬에 가서 외울 주문이 떠올랐어. ‘배 뜨지 마라. 제발 배 뜨지 마라.’ 하하!”     


영주에게 알록달록 꽃무늬가 새겨진 헬멧을 씌우며 영무가 말했다.     


“뭐라고? 정말 배가 안 뜰 수도 있어? 배 안 뜨면 오빠랑 나랑 같이 죽는 거 알지? 에잇, 몰라. 배 안 뜨면 그냥 오빠랑 그 섬에서 영원히 살지 뭐. 좋아하는 회나 실컷 먹으면서. 근데 오빠 고기 잡을 줄은 알아?”     


영무의 말과는 달리 배를 타는 일은 없었다. 섬까지 놓인 방파제를 따라 오토바이는 달렸다. 오토바이가 달리자 풍경이 그 둘을 지나갔다. 방파제가 지나가고 향긋한 바다 내음이 지나갔다. 멀리 섬들도 지나가고 하늘에 구름도 지나갔다.      


그들이 도착한 섬에는 또 다른 섬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섬과 섬을 내달리며 그들은 행복했다. 섬에는 나지막이 “방방” 대는 오토바이 소리와 그들의 웃음소리만 존재하는 듯했다. 영원할 것 같던 시간은 흘러 어느덧 해가 서쪽 바다로 떨어지고 있었다. 먼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영무가 말했다.     


“오, 10시의 신데렐라여!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너는 어떻게 신데렐라보다 두 시간이나 먼저 통금이 발동되는 거야? 네 부모님은 아주 고전 중에도 고전 속에서 사시는 분들이야. 이제 가자. 날씨가 심상치 않다.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야겠어.”     


섬을 떠나 방파제를 타고 돌아오는 길, 먹구름이 점점 가까워지며 한두 방울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어둠이 내렸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비는 점점 거세졌다. 헬멧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영무의 시야를 가렸다. 반바지에 가벼운 옷차림을 한 영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무서워. 앞도 잘 안 보이고. 그리고 너무 추워. 비 좀 그칠 때까지 잠깐 섰다 가자. 이러다 사고 나겠어.”     


영무도 더는 무리라는 생각에 오토바이를 몰아 큰길을 빠져나왔다. 오토바이가 선 골목길 어귀에는 작은 상회의 엷은 불빛만이 비를 맞으며 졸고 있었다. 이미 흠뻑 젖어버린 영주에게 재킷을 벗어 감싸며 영무가 말했다.     


“이게 다 내 탓이야. 오늘 아침에 배 뜨지 말라고 주문 외우면서 심하게 비바람 치는 상상을 했거든. 너 정말 추워 보인다. 입술이 새파래졌어. 집까지 그리 멀지 않으니까 잠깐만 기다렸다 가자. 다시 기도해야겠다. 우리 영주 무사히 집에 가게 해 달라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은 영주를 마주 보고 돌아앉으며 영무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헤어지기 직전에 멋있게 주려고 했는데 망쳤네. 우리 백일 기념 커플링이야.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오빠, 내 손가락 크기 어떻게 알았어? 딱 맞네. 우리 오빤 눈썰미도 좋아. 정말 감동이다! 이렇게 비 오는 날, 오토바이 위에서 반지를 받다니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오빠, 고마워!”     


영주가 영무의 품에 안겼다. 영무는 파고드는 영주를 가만히 끌어 자신의 두 다리 위로 그러안았다. 젖은 영주의 몸이 미끄러지며 겹쳐졌다. 남아 있는 체온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둘은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찾듯 본능처럼 서로의 입술을 더듬었다. 첫 키스였다. 영무는 영주의 떨리는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감쌌다. 서로에게 닿은 가장 여린 감촉 위로 빗물이 흘렀다. 더없이 부드럽고 달콤했다. 첫 키스의 황홀함은 빗소리에 귀먹고 어둠에 눈멀었다. 그 순간, 표현할 수 없는 에너지가 두 사람을 뜨겁게 하나로 이어 주었다.     

그림 by 도란도란


영주는 생각했다.


‘좀 가난하면 어때? 오빠라면 내 인생을 걸고 싶어. 나라고 뭐 대단할 게 있나? 돈이 많은 건 부모님이지 내가 아니잖아. 지금껏 부모님 도움 없이 나 혼자 얻은 거라곤 이 오빠밖에 없어? 나 이 오빠 꼭 지킬 거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꼭!’     


비는 잦아들 기미도 없이 거세게 퍼부었다. 난처해하는 영무를 향해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영주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오빠, 나 너무 젖어서 이대로는 집에 못 가. 우리 어디 잠깐 들어가서 옷 좀 말리고 가자. 옷 좀 마르면 나는 택시 불러서 갈게. 이 꼴로 집에 갔다간 엄마한테 괜한 의심만 살 수 있어. 근처에 들어갈 만한 곳 있나 찾아보자 얼른.”     


첫 키스의 힘일까. 영주가 대담해졌다. 멀리 모텔의 불빛이 비를 뚫고 영무의 눈에 들어왔다. ‘신데렐라 모텔’, 영무가 시계를 쳐다본다. 7시 28분, 영주의 집까지는 채 2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영무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문득 허기가 몰려왔다. 뱃속이 꼬르륵 요동쳤다.     




영주는 예쁘다기보다 탐스러운 여자였다. 늘 귀티 나는 옷을 입었고 모든 행동에 있어 부족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부족함이 있다면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성적과 부모의 과도한 통제에 의한 자유였다.      


지역 언론사의 사장인 영주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의 행동을 극도로 제한했다. 온통 사건과 사고로 도배된 신문 기사를 오랫동안 보아 온 탓인지 남의 입에 오르내릴 행동에 민감했다. 영주를 일찍 미국으로 유학 보내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다 큰 딸을 언제까지나 통제할 순 없었다. 미국이라면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자신의 권위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가족의 행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무는 첫눈에 봐도 영주가 부자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의 부모가 지역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부호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 지역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신문사 사장이 영주의 아버지일 거라고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마치 이쪽의 현실과는 다른 세계인 양 모텔 입구에는 오색의 블라인드가 굳건한 경계를 만들고 있었다. 한 세계를 건너듯 어렵사리 주차장을 통과해 모텔 입구에 들어서자 작은 쪽문이 열리며 한 남자의 비릿한 음성이 복도 밖으로 흘러나왔다.


“주무시는데 5만 원이고요, 잠깐 쉬어 가는 데는 2만 원입니다.”     


영무는 주머니를 뒤져 2만 원을 건네며 문득 자신이 염라대왕 앞에 선 죄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의 죄를 캐물은 염라대왕이 말했다. '5만 원은 천국이고 2만 원은 지옥이야'. 작은 플라스틱 접시에 카드로 된 키를 판결문처럼 집어던진 모텔 종업원이 “탁” 소리가 나게 창문을 닫았다. 영무와 영주는 서로 마주 보며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비에 홀딱 젖어 서 있는 청춘 남녀의 꼴이 누가 봐도 요괴스러웠다.      


모텔방에 들어서서 카드 키를 꽂자 유혹하듯 붉은 조명이 들어왔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붉은빛 아래, 비에 젖은 영주의 속살이 얇은 블라우스를  뚫고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영주가 다시 영무의 가슴으로 파고들며 노을처럼 붉게 물든 침묵을 깼다.     


“오빠, 내 심장이 미쳤나 봐. 터질 거 같아. 나만 그런 거야? 오빠 심장 소리도 듣고 싶어. 나처럼 쿵쿵대는지, 내 귀로 직접 들어 볼래.”     


비에 젖은 영무의 셔츠 위로 귀를 가져가며 영주가 더욱 깊숙이 다가섰다. 영주의 밭은 숨소리가 방 전체에 퍼졌다. 숨소리는 어느새 성난 소용돌이가 되어 영무의 심장을 향해 휘몰아쳤다.


진정한 사랑에 미래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강물은 바다로 가려고 몸부림치지 않는다. 그저 흐를 뿐이다. 그 순간, 둘의 사랑도 그랬다. 두 개의 뜨거운 강물이 만나 그저 흐를 뿐이었다.  오직 하나로 흐를 뿐이었다.

그림(표지 포함) by 도란도란, 원작 이기하 <지독하게 끌어안고 지독하게 키스하고 / 대원씨아이>


<작가의 말>


먼저 제 글에 어울리는 그림을 선물해 주신 @도란도란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도란도란 작가님과는 블로그에서 만나 브런치까지 함께하며, 지금은 북코압이라는 공동체에서 다른 작가 10분과 함께 종이책을 기획, 출간 예정에 있습니다. 이런 글벗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천자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척벽비보 촌음시경(尺璧非寶 寸陰是競)" 

"보배는 한 자가 되는 금옥이 아니고(尺璧非寶), 아껴야 할 것은 오직 한정된 짧은 세월이다(寸陰是競)"


금쪽보다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저를 위해 그림을 그렸을 @도란도란 작가님을 생각하면 제가 빚진 게 얼마나 많은지 돈으로는 가늠할 수 조차 없습니다. 도란도란 작가님이 연재하는 글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s://brunch.co.kr/@sanohyeeun/20 


아울러, 제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의 시간도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가치임을 너무도 잘 압니다. 저의 글을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독자 여러분의 시간(寸陰)이 아깝지 않도록 열심히 글 쓰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촌음(寸陰)을 함께하는 여러분과의 인연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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