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주권, Green Card> 1장. 더러운 땅
“짝~”, “쩍~”
느닷없는 뺨 세례에 영무는 우두커니 서서 볼을 감쌌다. 연달아 두 번 영무의 뺨을 사정없이 갈긴 여인은 영무의 여자친구인 영주의 엄마였다. 외동딸인 영주에게는 철저한 야간 통행금지가 적용됐다. 대학생이 된 뒤에도 밤 10시를 넘기면 안 된다는 원칙은 변함없었다. 영주의 엄마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의 시계는 10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 누구야? 어떤 놈이길래 우리 영주를 이 시간까지 데리고 다녀? 우리 영주가 어떤 앤 줄이나 알아? 앞으로 다시는 우리 영주 만날 생각 하지 마, 알았어?”
“그리고 영주 너, 미쳤어? 왜 저런 놈하고 싸돌아다녀? 저런 놈이랑 오토바이 타고 다니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날로 네 인생 종 치는 거야. 아빠가 오늘 늦게 들어오기 망정이지, 만약 이 꼴을 봤다면 오늘 줄초상 났어, 이것아! 또 이런 일 생기면 그날로 짐 싸서 미국행이야, 알았어?”
모녀가 아파트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진 후에도 영무는 한참이나 움직일 수 없었다. 여자친구인 영주의 부모님이 엄격하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보자마자 날아온 두 방의 귀싸대기는 그의 몸을 굳게 하고도 남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영무는 자기 손에 헬멧이 들려 있었다는 걸 알았다. 돌아서서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길에 그는 생각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겪은 거지? 왜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던 거지? 좋다고 먼저 다가온 건 영주였어. 도대체 내가 누군 줄 알고. 이건 한 인격에 대한 묻지마 살인이야.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의 수모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내 반드시 사과받을 거야. 아니, 반드시 복수할 거야!’
뺨에서 느껴지는 얼얼함이 목구멍을 타고 된 욕이 되어 나왔다. 영무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영무에게 먼저 다가온 건 영주였다. 큰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 적당하게 그을린 윤기 나는 피부에 사람 좋아 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까지, 누가 봐도 호감형인 영무는 같은 과뿐만 아니라 다른 여학생들의 눈에도 쉽게 띌만큼 매력적이었다.
반면에 같은 과 후배인 영주는 평범한 외모에 작은 키로 다소 내숭을 떠는 성격이었다. 키를 물어보는 친구들에게 굳이 160cm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실제 키는 그에 한참이나 모자랐다. 늘 굽이 높은 운동화나 힐을 신었고 짧은 웃옷으로 자신의 약점을 커버했다.
학교에서 차로 멀지 않은 곳에 영주의 집이 있었다. ‘10시’라는 가혹한 통금 시간이 있던 영주는 귀가 시간이 다 되도록 기다렸다가 곧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영무에게 다가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영무는 그런 영주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처음 몇 번은 그녀의 부탁에 다른 의도가 있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부탁이 반복되면서 영무는 영주가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았다. 오토바이 뒤에 타서는 무섭다는 핑계로 영무를 꼭 껴안아 과도하게 엉겨 붙었다. 하지만 영무도 그런 영주가 싫지만은 않았다. 등에서 느껴지는 영주의 풍만한 가슴과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이 좋았다.
“야, 권영주! 너 내 등에 찰싹 들러붙을 때마다 꼭 진드기 같아. 등을 뚫고 들어올 거 같단 말야. 앞으로 널 진드기라 부를 테니까 놓치지 말고 잘 잡아라."
멈춰있는 오토바이 엔진을 이유 없이 부릉거리며 영무가 말을 이었다.
"아 참, 너 그거 알아? 진드기는 떼어낼 때 몸통만 떼어내면 안 된다는 거. 무섭다고 급하게 떼어내면 물고 있던 이빨이 살 속에 남아서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대. 그러니 꽉 잡는 건 좋은데 떨어질 땐 이빨까지 고스란히 빼가라. 나 아프기 싫다!”
평소에도 썰렁한 농담을 잘하던 영무가 영주의 마음을 떠보며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뾰로통해진 영주가 되받아쳤다.
“뭐라고요, 진드기? 오빠, 말 다했어요? 좋아요, 진드기처럼 달라붙을 거니까 후회하기 없기예요. 이빨을 아주 심장에까지 꽉꽉 박아 넣을 거니까. 떼어낼 생각만 했담 봐라. 내 남은 이빨이 오빠의 심장을 가만 두지 않을 걸!”
영주는 영무의 허리를 더욱 노골적으로 잡아당기며 영무의 등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22살이 된 영주는 한 번도 남자를 사귄 적이 없었다. 남자와의 교제를 허락하지 않은 부모 탓도 있었지만, 영주는 줄곧 미국 유학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영주의 부모는 영주를 유학 보내 미국에서 학위를 받게 한 후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부모의 기대만큼 영주의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원하던 미국 유학에 실패한 영주는 2년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학교도 학교 같지 않았고 남자도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영주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다. ‘모태솔로’, ‘성모 마리아’라고 놀려대는 친구들의 비아냥거림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20대의 꽃다운 청춘을 이대로 보내고 싶진 않았다. 아빠를 빼면 남자의 손길이라곤 닿아 본 적 없는 자신의 몸이 부끄러웠다. 아니, 몸에게 미안했다.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가고 있을 때 복학생인 영무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레더 재킷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 영무는 그동안의 동급생 조무래기들과는 급이 달랐다. 쾌활한 성격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미소까지 더해져 한눈에 반해버린 것이다. 영주가 같은 과 여학생들에게 말했다.
“야, 저 오빠 딱 내 스타일이야. 지금, 이 시간부터 저 오빤 내 거야! 너네, 눈독 들일 생각도 하지 마.”
호들갑 떠는 영주를 향해 친구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미리 영무를 찜하고 나서는 영주를 딱히 말리거나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 영문도 모른 채 영무는 영주의 계획에 한 발짝씩 말려들고 있었다.
“오빠, 여기서 내려주세요. 집 앞까지 갔다가 엄마나 아빠한테 들키면 저 끝장나요. 여기서부턴 걸어갈게요. 고마워요. 오빠! 내일도 부탁해요.”
“야, 권영주. 내가 무슨 네 전용 기사냐? 이게 벌써 몇 번짼 줄 알아? 집 앞까지 모셔다드리고 그냥 돌아서 가는 게. 등 뒤에 있을 땐 진드기처럼 붙어 있다가 집 앞에만 오면 메뚜기처럼 튀어서 달아나잖아. 앞으론 늦지 않게 버스 타고 집에 일찍 일찍 들어가라. 나 귀찮게 하지 말고. 이래 봬도 나 바쁜 사람이다!”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영주는 까치발을 모아 영무에게 다가가며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오늘 차비! 이 정도면 됐죠?”
발그레해진 영주의 볼이 예뻐 보였다. 영주는 자신의 입술을 모아 새초롬한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뒤돌아 집으로 내달렸다. 얼마 후 영주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빠~ 나 오빠 좋아해요. 그것도 아주 많이! 우리 오늘부터 만나요. 네? 나랑 만날 거죠? 카톡에서 숫자 1이 사라지면 오빤 오늘부터 내 거♥”
미리보기로 카톡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무는 그 의미를 알아채고는 메시지를 열었다. 창에서 1이 사라졌다. 영무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사랑은 교통사고처럼 온다고 했던가? 느닷없이 자기에게 다가와 ‘내 거’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영주가 영무는 고마웠다. 외동으로 자란 영무는 항상 외로우면서도 누군가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활달한 성격에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였지만 유독 이성 앞에서는 작아지기만 했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도 주변을 어슬렁거릴 뿐 직진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놓쳐버린 사랑이 많았다.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이성이 친구와 연인이 되어 나타날 때면 그 패배감과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영무에게 영주가 직진으로 다가온 것이다. 어쩌면 사랑은 교통사고처럼 다가오는 게 아니라 물처럼 채워지는 건 아닐는지. 메말랐던 영무의 공간에 물처럼 흘러든 영주는 어느새 영무의 가슴을 호수처럼 일렁이게 했다.
“오빠, 금요일이 우리 백일인 거 안 잊었지? 여행 가자! 무척 아쉽겠지만 난 당일만 돼.”
영주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깊고 그윽해져 있었다.
“그럴 줄 알고 오빠가 하루를 사흘처럼 보낼 수 있는 곳으로 예약했어. 내 오토바이로 갈 거니까 너는 옷만 편하게 입고 와. 나머지는 내가 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
기대로 가득 찬 영무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영주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