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주권, Green Card> 1장. 더러운 땅
모든 강물이 바다에 가닿으면 한 가지로 짠맛을 낸다. 심지어 바닷가 높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맑은 냇물도 바다를 만나면 그 즉시 짠맛을 내는 바다가 된다. 영무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영주는 영무에게 빠져 그의 바다가 되었다. 어디를 보아도 세상은 영무뿐이었다. 영무의 바다에 스며들어 유리될 수 없는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빠져 세상이 온통 그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은 다시 내가 되는 것, 사랑은 그렇게 다른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한바탕 소용돌이가 몰아친 후 영무는 나무토막처럼 영주에게서 분리되었다. 식곤증 같은 졸음이 밀려왔다. 길었던 하루, 운전과 비, 그리고 그 비를 모두 증발시켜 버린 불같은 사랑은 영무를 영원과도 같은 공간 속으로 끌어당겼다. 품으로 파고드는 영주의 보드라운 숨결이 땀에 젖은 목덜미에 스쳤다. 시원함과 나른함, 중력을 거스르지 못한 채 영무는 심해보다 깊은 잠 속으로 가라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영주의 다급한 목소리가 방안을 화들짝 깨웠다.
“오빠, 큰일 났어! 얼른 일어나 봐. 지금 10시야!”
울상이 된 영주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오빠, 나 이제 어떡하지? 집에 가면 난리 날 텐데. 아빠가 알면 우리 둘 다 가만 안 둘 거야.”
영무가 급히 창문을 내다봤다. 그사이 언제 그랬냐는 듯 비는 그쳐 있었다. 급하게 옷을 챙겨 입으며 영무가 말했다.
“빨리 옷 챙겨 입고 나가자. 내가 태워다 줄게. 이 시간에 택시 부르면 언제 올지도 몰라. 지금은 무조건 집 앞까지 최대한 빨리 가보는 게 상책이야. 가자, 얼른!”
서둘러 옷을 입는 영주의 손이 바빴다. 그러나 일순, 정지화면처럼 영주의 몸이 멈춰 섰다. 휴대전화를 쥔 영주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오빠, 엄마한테 온 부재중 전화가 벌써 10통 째야. 나 이제 정말 죽었다!”
서둘러 오토바이를 타고 영주의 아파트 현관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10:40분, 둘은 영주 엄마가 현관에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영주와 작별 인사를 위해 오토바이에서 내려선 영무를 향해 중년의 한 여인이 다가왔다. 상황을 가늠할 새도 없이 다짜고짜 뺨을 갈겼다.
“짝~”, “쩍~”
영무와 영주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낸 여인은 영주를 데리고 돌아섰다. 금빛으로 치장된 고급스러운 아파트 현관을 지나 마치 다른 차원으로 건너가듯 두 사람은 금빛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뺨 세례에 넋을 놓고 있던 영무의 귀에 여인이 남긴 마지막 말이 녹음기처럼 연속으로 재생되었다.
“근본도 없는 백정 놈 같으니라고, 시골 바닥에서 지방대나 다니는 주제에, 누굴 넘봐. 오토바이 타다 뒈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백정 놈 같으니라고?’ 영무의 부모님은 사업에 실패한 후 시골로 내려와 조그만 정육식당을 차렸다. 영무는 힘에 부치는 부모님을 위해 주말이면 식당에 나가 고기 손질을 돕곤 했다. 영주의 엄마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영무는 자기에 대해 이미 모든 뒷조사를 마친 듯한 영주 엄마의 말에 한없이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저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영주에게는 어릴 때부터 쭉 같이 자란 단짝 친구가 있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같은 학교에 다니며 좀처럼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영주가 영무를 만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둘만의 이야기에 영무가 끼어들자 친구는 심술이 났다. 급기야 영주 엄마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몰래 알렸다. 나중에 당할 화를 걱정한 영주 엄마는 그 사실을 영주 아빠에게 알렸고 영주 아빠는 몰래 영무의 뒤를 수소문했다. 그렇게 영무의 부모님이 어디에서 무얼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된 것이다.
언젠가 영주가 영무의 부모님에 대해 궁금해하자, 한참을 망설이던 영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부모님은 오직 나 하나 잘 되기를 바라고 사시는 분들이야.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아빠 사업이 괜찮았어. 운용하시던 공장에 직원만 30명이 넘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고1이 되던 해 3월에 공장에 불이 났어. 엄청 큰 불로 번져서 공장이 모두 다 타버렸어. 불행 중 다행으로 다친 사람은 없었는데, 문제는 다음날 드러났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들었던 화재보험 만기가 지나버렸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됐어. 엄마가 경리 일을 볼 땐 한 번도 놓친 적 없던 일이었는데, 사업이 커지다 보니 새로운 경리를 채용했었거든. 두 분이 평생을 일군 사업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거지.”
체념한 표정의 영무가 숨을 “후”하고 뱉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 길로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오셨어. 그나마 남은 돈으로 작은 정육식당을 차렸고. 덕분에 나의 방황도 그때 시작됐어. 식당에서 고기 썰고 굽신굽신 손님 시중하는 부모님이 너무 창피했거든, 그동안 만나던 친구들 얼굴 보기도 싫었어. 정말 죽고 싶더라고, 부모님 속이 타들어 가는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
“오빠의 밝은 모습 뒤에 어렴풋이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슬픔이 이거였구나. 미안해 오빠, 내가 괜한 걸 궁금해해서.”
“아니야, 너도 언젠간 알아야 할 일이야.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지금 네 앞에 서 있는 이유이기도 하니까. 나 고등학교 때 정말 심하게 방황했어. 오토바이 타고, 매일 술 마시고, 학교도 잘 안 나갔어. 그런 거에 비하면 나 지금 사람 되지 않았냐?”
“오빠, 나 만나려고 사람 된 거구나. 오빠랑 난 결국 만날 운명이었던 거네. 오빠 그런 일 없었으면 이런 지방대에서 나 만날 일도 없었을 거 아냐. 맞아, 맞아, 우린 운명이야! 근데 어떻게 다시 정신 차린 거야? 그것도 이렇게 멋진 사람으로.”
영무는 그때를 회상했다.
부족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부유한 환경에서 한순간에 가난한 시골 정육점 아들이 된 영무는 심각한 사춘기를 보냈다. 세상을 모두 부정하고 자신마저도 부정하며 친구 집을 전전하던 영무를 아버지가 찾아왔다. 그리고 조용히 선술집으로 데려가 각자의 잔에 술을 따랐다. 얼떨떨한 영무는 아버지의 무거운 침묵에 눌려 아버지의 속도에 맞춰 술을 마셨다. 몇 병의 술이 비워지자 아버지는 영무를 일으켰다.
“나랑 갈 데가 있다.”
조금씩 비틀거리며 아버지는 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야트막한 산 정상에 오르자 너른 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영무의 아버지가 말했다.
“지금 눈에 보이는 땅이 모두 네 할아버지 땅이었다. 내가 13살 때 네 할아버지가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어. 그리고 이듬해 충격을 견디다 못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혼자서 저 너른 땅을 지킬 힘이 없었어. 힘이 없다는 건 그런 거다. 어렸고 배우지도 못했지. 그래서 빼앗길 수밖에 없었어. 내가 정신을 차리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공장을 키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힘을 가지고 싶었다. 더 크게 힘을 키워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땅까지 빼앗아 가버린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어.”
애써 눈물을 참는 듯 아버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공장에 난 불은 수십 년을 노력해서 이룬 엄마와 아빠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앗아갔어. 나도 정말 죽고 싶었어, 죽으려고 여러 번 시도까지 했었어. 하지만, 너의 엄마 그리고 너, 나는 할아버지처럼 무책임하게 가족을 남겨둘 수 없었어. 다시 용기를 냈고 이제는 알게 됐단다. 힘이라는 건 꼭 돈이나 재산만이 아니라는 걸. 힘은 가족이고 사랑이라는 걸.”
무심한 듯 영무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영무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빠는 죽도록 공장 키울 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 일한 만큼 정직하게 벌고, 먹고 싶은 것 실컷, 남 눈치 보지 않고 먹을 수 있어서 좋아. 그리고 네 엄마랑 매일 마주 보며 일할 수 있어 좋고, 네가 있어 더 좋고 말이야. 영무야, 인제 그만 아파해라. 난 네가 돈을 떠나 행복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면 좋겠다.”
아버지의 옷에서 풍기는 비릿한 고기 냄새가 영무의 가슴을 아프게 후려쳤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영무에게 영주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영주야, 너 괜찮아?”
“야, 네 눈깔엔 영주가 괜찮은 걸로 보였냐? 너 미쳤어?”
영주 엄마의 악에 찬 목소리였다.
사랑은 함정입니다.
사랑이 나타날 때,
우리는 그 빛만 보고,
그림자는 보지 못합니다.
- 파울로 코엘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