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주권, Green Card> Permanent Resident
미국 오리건주의 한 병원 응급실, 노숙자로 보이는 한국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Help me, Help me, sir! Please, save me sir! Give ma a kidney. I have money here, please, sir!”
까무잡잡한 얼굴에 인도인으로 보이는 의사의 가운을 움켜쥐며 한 남자가 소리쳤다. 이미 눈은 초점을 잃어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엄마, 나 여기서 죽기 싫어! 미안해 엄마, 내가 잘못했어. 나 좀 데려가 줘, 응. 잘못했어요, 엄마. 나 신장 좀 줘, 신장 한쪽만 떼주라고. 이러다 나 진짜 죽어요!”
어설픈 영어를 짓거리던 남자는 이내 엄마를 부르며 한국말을 쏟아냈다. 말에는 힘이 없었지만, 살고자 하는 몸부림은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해 보였다. 외아들인 그는 어머니의 간곡한 반대에도 미국행을 강행했다. 미국에 와서도 줄곧 한국으로 들어오라는 어머니의 부탁을 거부했던 그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82년생 개띠, 이름 주영무, 키 180cm, 특수부대 출신, 지방대 경영학과 졸업, 운동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건장했던 그의 몸에는 온통 주사 자국이 가득하다. 한눈에 봐도 노숙자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옷은 남루하기 그지없다. 옷이라고는 입었다기보다 그냥 누더기 채로 덮었다는 게 맞을 정도였다.
영무는 벌써 3년째 투석에 의지해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주 2회는 무조건 받아야 하는 투석을 거르면 그는 이처럼 응급실로 실려 오곤 한다. 다행히 주 정부에서 제공하는 무상 의료가 영무를 살리고 있었다. 무상 의료마저 없었다면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다.
영무가 처음부터 투석을 게을리한 건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황달과 함께 급성 신부전증 진단을 받은 그는, 처음 2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치료했다. 꼬박꼬박 투석을 이어가며 적당히 운동도 했고 좋아하던 술과 담배도 끊었다. 낮에는 다니던 식당에 나가 스시를 만들고 서빙을 도우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에게는 신장이식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년이 지나도 신장이식 순서는 다가오지 않고 병세는 점점 나빠졌다. 미국 병원에 수시로 전화를 걸어 순서를 확인해 봐도 기약 없는 모호한 답변만 돌아왔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함께 점점 약해지는 몸을 견디지 못한 그는 불법으로 구한 마리화나를 입에 대기 시작했다. 잠깐이지만 마리화나를 피우는 시간만큼은 모든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건강 악화와 함께 그나마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 더는 돈을 벌 수 없는 상황에서 마리화나를 피운다는 건 삶을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모아뒀던 돈도 모두 바닥이 나자 그는 노숙자들이 모인 곳에 텐트 하나를 쳤다.
그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신장이식뿐이었다.
주영무, 그가 미국에 온 지도 벌써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한국에서 지방대를 졸업한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이 싫어졌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식당에서 일을 하고 번 돈으로 미국 전문대학에 입학해 자동차 정비를 배웠다. 천성이 성실하고 붙임성이 좋은 그는 졸업과 동시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소에 취업했다. 하지만 회사는 그에게 영주권을 지원하지는 않았다.
졸업 후 1년이 지나도록 새로운 비자나 영주권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건 망설임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돌아갈 수 없었다. 한국을 떠나며 술에 취해 친구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국?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조까라 그래! 뻑큐! 이제 이 지긋지긋한 한국 땅 보고 오줌이나 싸나 봐라. 아주 한국에는 좆같은 놈들만 드글드글해서 나같이 선량한 인간들은 살아갈 수가 없어. 두고 봐, 내가 미국 가서 성공하면 이 좁아터진 놈의 땅덩어리 다 사버릴 테니까. 그런 다음에 아주 거지 같은 새끼들은 다 추방해 버릴 거여, C8! 내가 아주, 씨를 말릴 껴! 한국 놈들이라면 이가 갈린다. C8!! 뻑킹 이디엇!”
고향이 송탄 미군 부대 근처인 영무는 영어로 된 욕과 경기도와 충청도의 중간쯤인 사투리를 섞어가며 열을 올렸다.
“너희들 영주권이 뭔 줄 알아? 영주권은 영어로 ‘Permanent Resident’여.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말이지. 그걸 ‘Green Card’라고도 하는데 영주권 색깔이 초록색이라서 그렇대. 근데, 초록색은 말이야, 인생에 초록불이 들어왔다는 뜻인 거여. 이제 건너만 가면 된다는 거지. 나 이제 미국 가면 안 올 겨. 거기서 영원히 살 거여. 뭔 말인지 알아? 아주 한국은 이제 일본이랑 같이 폭삭 가라앉아 버려야 해, C8, 흐흐흐흐!!”
백 달러짜리 지폐 여러 장을 꺼내 흔들던 영무가 “퉤”하고 침을 뱉었다. 때는 2009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몸살을 앓던 시기, 영무는 미국행을 결정했다.
누구나 미국에 갈 수 있지만 누구나 미국에서 일할 수는 없다. ‘영주권’, 그것은 전 세계인들이 한 번은 들어봤을 꿈, 바로 아메리칸드림이다. 영주권은 살아갈 권리이자 마음껏 일할 권리이다. 아직도 수많은 나라에서는 미국에서의 삶을 꿈꾸며 영주권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가난한 나라일수록 경쟁은 치열하다. 미국에서 영주권을 얻는 그 자체로 그들에게는 성공이 보장된다. 미국에서 우버 택시를 운전하는 에티오피아 출신의 한 남자는 자기가 번 돈으로 고국에 남은 가족 15명을 부양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난민 지위로 영주권을 얻은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모두가 꿈꾸는 영주권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권리를 얻는 자체로 성공이고 행복이 된다. 영무에게도 영주권은 그런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어두운 현실을 벗어나 저 태평양 건너 유토피아로 갈 권리. 종교를 통해 영생의 천국으로 가듯 영주권을 통해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갈 권리였다.
미국행이 결정되자 한국에서 살아온 그동안의 삶이, 28살 영무의 뇌리를 스쳐 갔다. 항상 의리 넘치고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특수부대에 자원하여 군대를 마쳤다.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유독 성격이 밝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딜 가나 인기를 독차지했고 여자들의 호감을 샀다. 행복한 날만 이어질 것 같았던 그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건 대학에서 사귄 여자친구와의 이별이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영무에게 친구가 말했다.
“5개월이나 된 애를 지웠다고? 넌 또 그걸 말리지도 않았고? 걔네 부모는 정신이 있는 사람들이냐? 아무리 의사들 실력이 좋다고 해도 딸 몸에다 그게 할 짓이야? 나는 소름이 돋아서 말하기도 무섭다 야!”
친구의 말을 들은 영무의 쓴웃음 뒤에는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사연이 숨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