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몇 발자국 물러나 내가 없이 혼자 걷는 널 바라본다 옆자리 허전한 너의 풍경 흑백 거리 가운데 넌 뒤돌아본다 그때 알게 되었어 난 널 떠날 수 없단 걸
악뮤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가사 중에서
내 몸이 잔잔히 흔들리고 있다. 등은 추운데 앞쪽은 따뜻하다. 무슨 상황일까. 한쪽 눈을 슬그머니 뜨는데 동이 터오고 있었다. 태양이 오늘따라 더욱 이글거리며 나를 노려보는 것만 같다. 마치 '이제 일어났냐. 정신 나간 X아!'라고 말을 거는 것도 같다.
나는 누군가에게 업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언제부터 업혀 있던 것일까. 나를 업은 이는 누구란 말인가. 어젯밤 나랑 술 대적하던 현해탄 부장? 아니다. 그는 노래방으로 가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혹시 골드 버튼 이시후 님? 아니다. 그는 칼퇴했고 대인기피증에 나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선정후'다. 선정후 등이 이렇게 넓었던가. 가만히 그의 등을 쓰다듬어 보았다.
'넓고 따뜻해. 영영 깨지 말자.'
다시 그의 등에 기대어 이대로 죽고 싶었다. 술 먹고 필름 끊긴 적이 단 한 번도 없건만, 나는 지금 이 시점에 왜 이 등에 업혀 있는 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진혜원, 너 깼지?"
"어, 오빠… 미안해. 언제부터 날 업고 있었던 거야?"
"세 시쯤."
"지금 해 뜨는 거 환영은 아니겠지?"
"아마도."
"오빠, 이대로 날 저기 보이는 쓰레기 수거함에 넣어줄래? 난 쓰레기야. 제발 날 버려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내려줘. 내가 스스로 걸어가 처박힐게. 이대로 쓰레기와 함께 사라지고 싶어."
"그냥 있어. 난 이미 버린 몸. 너라도 무사히 데려다줘야 덜 억울하지."
"버린 몸? 내가 오빠한테 뭔 짓 했구나? 그치? 근데 오빠 머리가 왜 이래? 파는 어디서 났어?"
오빠 머리에 왜 파가 있을까. 파 브리지인가. 그럴 리가 없지. 파 브리지 같은 소리 하는 진혜원, 이 미친년! 오늘 죽자. 부끄러움이 탱천하여 하늘로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
"등줄기에도 파가 붙어 있는 것 같아."
"오빠, 나를 내려줘. 제발! 무릎이라도 꿇을까?"
"몸부림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응."
집에 도착했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오빠를 붙잡았다. 제발 우리 집에 들어가 씻어 달라고, 내가 옷을 구해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신신당부하며 오빠를 집으로 들여보냈다. 나는 오빠 옷을 구하러 가야 한다. 아직 7시도 되지 않았는데 어디서 남자 옷을 구한단 말인가.
'클럽 마그마! 나의 구원자, 이지수!'
지수에게 전화했다.
"너 사고 쳤지? 이 시간에 전화는 빼박 사고야."
"응. 대형사고. 나 형순 오빠 옷 좀 빌려주라. 지금 당장."
"넌 여름엔 내 스터디찡 재킷 가져다 팔 잘라놓고 이번엔 오빠 옷을 달라고? 너 남자 옷 벗겼냐? 대체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야!"
"정후오빠 옷에 토했어. 머리에 파 브리지 해주고."
지수가 정신 나간 듯이 웃어댔다. 한참을 웃던 그녀가 꺼이꺼이 울며 말했다.
"파절이 엽기녀 됐구만. 넌 미친년이야. 너 시말서 가지고는 안 되고 사직서 써야겠다. 지금 퇴근 중이니까 오빠랑 너네 집 앞으로 갈게."
지수와 형순 오빠는 내게 옷을 건네며 사직서 수리되면 클럽 마그마로 오라고 했다. 이제 나는 집에 들어가야 한다. 오빠는 여전히 화장실 안에 있었다. 문고리에 쇼핑백을 걸어두고 다시 집밖으로 나왔다. 잠시 뒤 오빠가 나왔다.
"이 옷은 어디서 빌려온 거니?"
오빠의 가슴에는 포효하는 사자가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사자의 갈기가 멋졌다. 형순 오빠가 클럽 마그마에서 공연할 때 입는 옷이었다. 이미 사직서 쓸 각오를 한 터라 포효하는 사자가 그렇게 무섭진 않았다.
"해장하러 가자. 네가 사. 그리고 나 집에도 데려다주고."
나는 오빠에게 특해장국을 사주었고 내 파란 포터 옆자리에 앉혀 집에도 데려다주었다. 집에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사직서를 써야 할 시간이다. 어젯밤 취기와 함께 '애사심'이 막 차오른 피플스, 3개월 만에 그만두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늘부터 술 끊는다. 술이 내 인생을 이토록 망가뜨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에필로그-선정후 이야기>
혜원을 업고 지구 끝까지라도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혜원이 그만큼 가벼웠고 마른 몸이 안타까웠다. 아무리 가벼운들 술에 취해 축 늘어진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 어깨를 짓눌렀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에 탄 지 5분도 되지 않아 혜원은 "우읍, 우욱" 하며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택시에서 쫓겨나 다시 혜원을 업었고 잠시 후 내 뒤통수와 등이 따뜻해졌다.
이러다 탈수로 죽지 않을까 싶을 때쯤, 내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혜원이 드디어 잠에서 깬 것이다.
"진혜원, 너 깼지?"
쓰레기통에 자신을 버려달라는 혜원이 귀여웠다.
'내가 널 어떻게 버려. 끝까지 업고 가야지.'
햇볕마저 외면한 혜원의 작은 반지하 원룸, 원고로 가득 쌓인 책상,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책들, 이곳에서 잠 못 이루며 써냈을 수많은 그녀의 꿈들, 나는 이 작고 가여운 아이가 만들어 놓은 삶의 흔적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차곡차곡 눈에 담았다. 가슴 저릿한 연민이 사랑으로 다가왔다. 논바닥에 거꾸로 박혀 있던 아이, 손을 놓으면 어김없이 넘어졌던 아이, 너의 위태로운 뒷모습과 상처들이 내게는 사랑이었다.
혜원은 자신의 출근 일도 아닌 월요일, 피플스 사무실에 들어섰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다가와 내 책상 위에 흰 봉투 하나를 올렸다.
"지난 금요일, 토요일 양일간 대표님께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이게 뭡니까? 혹시 사직서예요?"
"네. 너무 죄송하고 부끄러워 도저히 얼굴을 들고 출근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진혜원 씨, 그 정도 일에 사직서를 내밀 정도로 피플스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피플스가 좋습니다. 좋아졌습니다."
"사직서 다시 넣어요. 진혜원, 지금부턴 대표가 아니라 오빠로서, 한 남자로서 충고할게. 너 내가 없는 자리에선 절대 술 마시지 마. 그리고 그렇게나 죄송하면 나랑 세 번만 만나자. 두 번째 고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