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기는 나의 실연이다. 나는 명사(名士)가 아니기에 피플스에 내 기사를 실을 수는 없지만 꿈을 꾼다. 유명한 소설가가 되어 피플스에서 인터뷰하는 그날을. 반드시 그날이 올 것이란 걸.
나는 어릴 때부터 살아 있는 대상을 정물화(靜物畫)로 볼 수 있었다. 움직이는 대상을 고정해 세밀하게 그려냈다. 세밀한 관찰력이 작가에게 있어선 큰 장점이다. 하지만 연애에선 그러질 못했다. 연애만 했다 하면 눈에 콩깍지가 몇 겹씩 끼었고, 사랑이 이성보다 늘 우위였다.
마지막 연애는 대학교 4학년 때였다. 당시 만났던 남자는 '거지발싸개'라 기억 저장 창고에 넣어두었다. 그 남자가 이틀에 한번 꼴로 한밤중에 전화 걸어 내게 하던 말이 있다.
"하룻밤만 재워 줘."
술을 마셔 운전할 수가 없다며 재워 달라 애원했다.나는 학교 앞에서 자취 중이었고 그의 집은 차로 20분 거리였다. 단호히 거절했다.
"안돼.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이 시간에 오겠다는 게 말이 된다 생각해? 대리 기사 부르거나 택시 타."
"난 네 남자친구야. 오늘 하루만~"
"친구는 친구나 남자잖아. 나 바빠. 이만 끊는다."
그는 대학 입학 선물로 아버지에게 중형 SUV를 선물 받았고,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부모의 신용카드로 술값을 턱턱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우리 학교 총학생회장이었다. 겉으로는 리더십 넘치고 젠틀했으며 외모도 준수했다. 그러나 내게 그 남잔 거지발싸개 같은 놈이었다. 걸핏하면 전화해 재워 달라는 말에 나의 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공모전 마감까지 겨우 두 달 남짓, 잠 못 이루며 글 쓰던 시기였다. 나는 매우 예민했다. 온몸의 가시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 전화로 원하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가벼운 노크로 시작된 그의 행패는 점점 더 강도가 세졌고 발길질까지 서슴지 않았다. 문득, 문을 향한 폭력이 나를 향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쳤다. 나는 그의 발길질 소리를 기억하며 그때부터 '안전 이별' 방법을 찾았다.
진실에 거짓을 약간 보태기로 했다. 고1 때 나의 엄마는 첫사랑을 만나 떠났고 아빠 또한 첫사랑과 연애 중이며 아빠는 사업이 망해 현재 행상을 하며 전국을 떠돈다 했다. 여기까진 진실이고 지질한 거짓을 만들었다. 반지하 원룸의 한 달 월세 17만 원, 6개월 밀리면 102만 원. 나는 그에게 100만 원만 빌려 달라고 했다. 공모전에 당선되면 상금을 받아 갚겠다고 했다. 내심, 그가 돈을 정말로 빌려주면 어쩌지 하고 걱정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우린 여러모로 서로 다른 것 같다. 오빤 나이도 있고 결혼할 여자를 만나고 싶은데 넌 아직 어리잖아. 글도 계속 써야 하고 이쯤에서 서로 갈 길 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 100만 원은 어렵고 20만 원 정도는 빌려줄 수 있어."
그는 나를 가엾게 보며 지갑에서 20만 원을 꺼냈다.
"공모전 꼭 당선돼라. 그래야 내 돈 빨리 갚지. 남녀 사이에도 돈 관계는 명확해야 해! 그게 우리 집안의 철칙이야."
그의 마지막 인사였다. 나는 반드시 공모전에 당선되리라 이를 갈았다. 졸업을 코앞에 두고 공모전에 정말로 당선되었다. 오래 준비해 온 작품이 아니라 마감 직전 '거지발싸개'가 만들어 준 소재 '안전 이별'로 쓴 소설이었다. 이듬해 그의 결혼식 축의금으로 나는 20만 원에 20만 원을 더 넣어 메모와 함께 친구 편에 보냈다.
"그 무엇이든 받은 건 두 배로 갚는다. 이건 우리 집안의 철칙이야. 넌 내게 거지발싸개였지만 네 신부에겐 신사이길. 안녕!"
오늘 일기는 여기서 마친다. 내일 새벽 6시, 노들섬에서 정후 오빠와 자전거를 타야 한다. 지금 내 정물화 속 주인공은 정후 오빠다. 세밀한 관찰력으로 그를 꿰뚫어 보겠다. 나의 가시들이여, 모두 솟아라!
사실 나는 자전거를 탈 수 있다. 아홉 살, 읍내로 이사한 그해 가을부터 탈 수 있었다. 여름 내내 나는 생사를 넘나드는 열병을 앓았다. 어쩌면 그 열병이 나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쳤는지도 모른다. 아픔은 홀로서기를 가르치는 가장 강력한 묘약이다.
술 취한 나를 업고 집까지 데려다준 그날, 파 브리지를 하고도 나를 바라보는 정후 오빠의 눈엔 사랑이 가득했다. 나는 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사랑을 더 확인하고 싶었다. 문득 자전거가 떠올랐다. 남편에게 운전 배우면 반드시 싸우게 된다는 유부녀들의 수많은 증언을 실험하기로 했다.
새벽 6시 노들섬, 정후 오빠가 저 멀리에서 나를 보곤 손을 흔들었다. 자전거를 못 타는 척 끌고 가는 나의 눈에 오롯이 오빠만이 보였다. 내 심장이 '쿵'하고 울리며 말했다. '속이지 말자. 그 무엇이라도.' 나는 자전거 안장에 앉아 페달을 힘차게 구르며 오빠에게 달려갔다. 오빠는 놀란 표정이었다.
"너 자전거 탈 수 있어?"
오빠 바로 앞에 자전거를 멈추고 당당히 말했다.
"아홉 살 가을부터. 오빠가 나한테 그때 그랬었지. 넌 균형감각이 없으니까 포기하는 게 어떠냐고.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야. 난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타잖아!"
나는 씩 웃었다. 오빠도 나를 따라 웃었다. 시작부터 속여선 안 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갈 것이다. 오빠에게 자전거를 건네주었다.
"자, 자전거는 오빠가 타. 난 뛸게. 나 피플스 입사하고 첫 인터뷰 장소가 여기였지. 유원 언니 만난 곳이야. 그 뒤로 언니랑 여기서 10km씩 뛰었어."
"첫 인터뷰부터 고생 많았지? 마라톤은 언제 시작한 거야?"
"고1. 대학교 4학년 봄 대회를 끝으로 안 뛰었어. 다시 뛰니까 여기가 팔딱팔딱 뛰어."
달리면 달릴수록 더욱 힘차게 뛰는 심장의 소리와 팔딱임이 좋았다. 한 시간 남짓 오빠는 자전거를 타고 나는 달렸다. 편의점에서 따뜻한 커피를 사서 벤치에 앉았다. 곧 해가 떠오를 듯 여명은 짙어져 가고 한강의 잔물결은 반짝였다. 떠오르는 해와 윤슬에 반짝이는 해, 두 개의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하며 소설 쓰기 힘들지 않아?"
"아무래도. 틈틈이 쓰곤 있어."
"집중해서 쓰면 좋을 텐데."
"꼭 그렇지도 않아. 인터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이고 소설도 똑같아. 이 일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어제, 네 글을 읽었어. 계간지에 실렸던 네 소설. 당시에 많이 힘들진 않았을까 걱정했어."
"첫 소설이 문제작이 될 줄은 몰랐지. 나 그 작품으로 페미니스트가 되었더라고. 악플 공격도 받고. 그 소재가 그런 식으로 해석될 줄은 생각 못 했어. 신경 쓰지 말자, 다짐하지만 글 쓰며 계속 검열을 하게 돼. 내 글이 누군가를 찌르는 가시가 될까 봐."
오빠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너 어렸을 때 부지깽이 들고 다녔지만 아무도 때리지 않았어. 넌 다른 아이를 때릴 수 없어. 네가 더 아파할 테니까. 내가 좋아한 진혜원은 그런 아이였어. 겉으로는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바짝 돋우고 있지만, 그 가시가 밖을 향하지 않았어. 안으로 너를 찌를 아이였지. 너 자신을 찌르지 마. 혜원아, 너를 규정하는 건 오직 너뿐이야. 세상의 잣대에 너를 깎고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았으면 좋겠어.누가 뭐라든 너는 너의 길을 가면 되는 거야."
세상의 끝까지 살아남는 건 다정한 마음이다. 다정한 사람이 전하는 다정한 말에 내 마음의 성벽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빛조차 다정해서 나는 '왈칵'하고 말았다.
"햇살이 눈에 부셔서 그런 거야. 떠오르는 해가 찬란해."
"맘껏 울어. 이런 햇살이라면 울어도 돼."
그날 저녁, 오빠와 함께 클럽 마그마로 갔다. 형순 오빠에게 빌린 포효하는 사자 티셔츠를 돌려줘야 했다. 우리가 들어서자 지수와 형순 오빠가 한달음에 뛰어와 정후 오빠 손을 잡았다.
"대표님, 오셨군요! 우리 혜원이가 모자란 건 많지만 착하고 체력은 남아돌아요. 시키는 일 뭐든 다 잘해요. 아직 사직서 수리 전이시면 한번 더 생각해 주세요."
이지수, 창피하다. 그러나 감동이다. 무릎까지 꿇고 빌 기세다.
"야, 나 안 잘렸어. 아하하하하~"
"대표님, 아량을 베풀어 주시니 이 은혜를 마그마의 특별 메뉴와 공연으로 갚겠습니다."
정후 오빠와 지수, 형순 오빠는 손을 맞잡고는 연신 서로에게 인사했다. 형순 오빠가 만든 각종 화려한 안주들이 테이블을 채웠다. 지수의 공연이 이어졌다. 밴드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였다.
"진혜원, 나와. 같이 부르자."
나는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지수가 대학 축제 무대 위에서 늘 마지막 곡으로 부르던 노래였다. 둘이 함께 부르는 건 졸업하고 처음이다. 나는 무대 아래에 있던 형순 오빠에게 눈짓을 했다. 노래가 끝나고 미리 준비해둔 작은 봉선화 화분을 형순 오빠에게 받았다. 흰 포장지에 싸인 자주색 봉선화 꽃잎들이 클럽의 조명 아래 더욱 선명한 빛을 발했다. 나는 화분을 들고 정후 오빠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빠, 내가 어렸을 때 오빠한테 봉숭아 꽃물 들여주며 했던 말 기억해? 나중에 크면 나한테 장가오라고. 지금 당장 오진 말고 우리 연애하자. 난 오빠가 좋아!"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에필로그-선정후 이야기>
문학상 수상 후 계간지에 실린 혜원의 소설을 읽었다. 계간지 발행 직후, 한 사건이 벌어졌고 데이트 폭력과 안전 이별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혜원의 소설은 사건과 결부되어 기사화 되었다. 작가를 향한 원색적인 비난과 함께 무차별적인 악플이 기사에 달렸다. 이제 막 등단한 신인작가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다.
나는 혜원이 지나온 시간 앞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사무치는 아픔이 전해져 왔다.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만 하는 이는 가시를 가질 수밖에 없다. 혜원이 자신을 향해 돋우고 있을 가시들이 세상을 향하길, 가시 밖으로 새 잎이 나고 꽃이 피길 간절히 바랐다. 그녀가 아픔을 풀어낼 유일한 문은 글이다. 나는 혜원의 가시에서 피어날 글 꽃들이 제빛으로 빛날 수 있게 도울 것이다.
내일 혜원을 만나 해주고 싶은 말들을 고르고 골랐다. 수없이 되뇌고 되뇌었다.
"혜원아, 너를 규정하는 건 오직 너뿐이야. 세상의 잣대에 너를 깎고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가 뭐라든 너는 너의 길을 가면 되는 거야."
그리고 내일은 전하지 못할 또 다른 말.
"너의 글이 세상 속에서 빛나는 날까지, 그 이후로도 영원히 너와 함께 걷고 싶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