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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란도란 Oct 15. 2024

진심 : 마음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

<피플스 잡지사 이야기>


원고 마감 D-1

피플스 가을 특집호

<명사(名士)들의 실연 이야기>  


원고 마감 하루 전, 점심에 '소소한가' 모임에 갔다. 회사 근처의 카페 'LILY CHOU CHOU'에서 만나기로 했다. '소소한가'는 마라토너 강유원 선수와 암벽등반가 손희우 선수와 함께 만든 소모임이다. 우리는 주로 술을 마셨지만, 오늘은 다소곳하게 앉아 차를 마시기로 했다. 희우가 카페의 빨간 문을 열고 들어서며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언니들, 여기가 약속 장소 맞아? 여긴 술이 없는데."


유원 언니가 희우에게 손짓을 하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얼.른. 와.라."


늘 피로에 절여진 채 밤에 만나 술잔을 기울이던 우리였다. 대낮에 민낯으로 카페에서 만나니 매우 어색했다. 분위기를 깨기 위해 내가 말했다.


  "드디어 둘의 이야기를 완성했어. 내일이 원고 마감인데 미리 보여주고 싶어서 불렀지."


  "소설 쓴 건 아니지?"


유원 언니가 말했다. 둘은 내게 건네받은 원고를 들고 각자 읽기 시작했다. 나는 햇살이 잘 드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새 희우의 훌쩍임이 햇살을 가르며 들려왔다. 희우의 동그란 큰 눈에 맺힌 눈물이 햇살을 머금었다. 눈에서 아름다운 윤슬이 일렁였다.  


  "혜원 언니, 글을 왜 이렇게 잘 써. 내 이야기인데…, 분명 내 이야기가 맞는데 너무 슬프고, 또 아름다워."


  "네 삶이 아름다워서 그래. 나는 있는 그대로 썼을 뿐이야."


  "진혜원, 얼른 소설 써. 너 글발 올랐어. 이거 내 이야기 맞아? 나 원래 눈물 없는데 코끝이 찡해. 울컥했다고."     


  "언니가 눈물이 없다고? 그간 술자리에서 내가 본 건 뭐야?"


  "이슬?"


우리 셋 모두 까르르 웃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함께 웃을 수 있는 건 우리가 이미 친구가 되었다는 뜻이.      

소설을 쓸 때마다 쓰는 방법이 있다. 소설 속 인물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넨다.
 
 "나는 당신이 궁금해요. 내 이야기를 먼저 들려줄게요. 그러니 당신의 이야기도 내게 들려줄래요?"

소설 속 인물들과 막역한 사이가 되는 것. 그렇게 친구가 되면 나는 비로소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전달자'가 될 수 있다. 인터뷰도 이와 같다. 유원 언니, 희우, 연두 작가와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이들의 삶과 내 삶이 만나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한 사람의 삶은 하나의 서사임을, 나는 인터뷰를 진행하며 깨달았다. 인터뷰는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일이기도 하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내 마음부터 열어야 한다. 마음을 여는 열쇠는 마음으로만 만들 수 있다. 마음의 열쇠로 연 그들의 마음 안에는 보물 같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내가 기자가 되어 얻은 건 사람이었고, 그곳엔 그 사람의 마음이 있었다.  

 <진혜원의 취재일지>


나의 글로

사랑하는 이들의 삶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by. 도란도란


밤 10시 모든 원고가 마감되었다. 종로의 한 신문사 건물 옆 한성 종합상가 7층 <피플스> 사무실에 전 직원이 출근했다. 잡지사에 입사한 이후로 사무실에 전 직원이 앉아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사무실에서 만난 부장 넷은 워크숍과는 사뭇 달랐다. 나만 취재를 하는 것인가 의문이었는데 아니었다. 디지털부 이시후 사원을 제외한 부장 넷과 나, 편집장은 모두 기자였다. 지난 3개월간 총 22명이나 되는 명사들을 인터뷰했다. 마감한 원고량이 상당했다. 나는 이 중에서 10장 분량의 원고를 담당했다.  


마케팅부 현해탄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대표님, 두 시간이나 일찍 끝났는데 회식 어떠십니까?"


금요일 밤, 원고 마감 후에 혼자만의 초록 병 병나발 계획은 그렇게 무산되었다. 첫 회식에 불참할 수는 없었다. 현해탄 부장을 잠시 노려보았다. '현해탄 부장, 당신 오늘 죽었어~ 나랑 병나발 불자. 누가 먼저 쓰러지나 봅시다. 집에 기어가게 만들어 주겠어.'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시후 사원은 미리 회식을 예상한 듯 불참 의사를 당당히 밝히고 6시에 홀연히 사라졌다. 칼퇴근이었다. 이시후 사원이 당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누구도 건들 없었다. 선정후 대표조차도.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시장 내의 '오늘 인생고기 만났다'라는 삼겹살집에 갔다. 내가 원하던 초록 병이 테이블 위에 깔렸다. 각 일병이었다. 피플스는 서로의 술을 따라주는 귀찮은 폐습 따위는 애초에 없었단다. 각자 주량껏 일병씩 자유롭게 가져다 마시면 된단다. 멋진 회사였다. 이 지점에서 1차로 반하고 말았다.


진행자병에 걸린 현해탄 부장이 또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건배 제의를 했다. 뒤이어 선정후 대표의 건배사가 이어졌다. 선정후 대표는 자신의 소주 일병을 들고는 평소와는 달리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잡지 한 권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습니다. 피플스의 가을 특집호는 '실연'을 키워드로 명사들의 사랑과 이별을 다루었습니다. 그간 취재하고 원고 작성하느라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피플스의 구호로 건배하겠습니다!"


나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부장 넷과 선정후 대표가 초록 병을 높이 들고 외쳤다. 나도 얼떨결에 초록 병을 들었다.  


   사람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세상이다.

   세상을 기록하는 잡지!

   독자가 평생 간직하고 싶은 잡지!

   피~플~스!


입안을 휘감는 소주 맛을 음미하며 피플스의 구호를 다시 읊조렸다.

워메, 오지다!

폼난다!

나는 세상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달큼한 목 넘김, 식도를 타고 흐르는 소주는 짜릿한 전율을 남겼다. 카! 이 맛이다. 달큼함, 짜릿함. 두 번째 건배부터는 나도 피플스의 구호를 외쳤다. '애사심'이란 것이 취기를 타고 차오른다. 2차로 반했다. 이 좋은 자리에 이시후 사원이 빠진 게 참으로 아쉬웠다.


  "이시후 사원도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저 피플스가 점점 더 좋아져요. 자랑스러워요!"


나의 고백에 기획부 박진감 부장이 진지하게 말했다.


  "디지털부 이시후 사원은 둘째, 넷째 주 금요일은 매우 바쁩니다. 그는 스타예요. 대스타."        

     

그렇게 전해 들은 이시후 사원의 정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공포영화 주온의 주인공 귀신 '토시오'를 닮은 그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대스타였다. 지난 주말 가평 가던 봉고 안에서 디자인부 고소리 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피플스의 핵심 인력이자 보물'

이시후, 그는 진짜 골드였다. 만 구독자의 유튜버로 드 플레이 버튼이었다.


둘째, 넷째 주 금요일 밤 12시 정각에 자작곡을 유튜브에 올렸다. 대인기피증이 심한 그는 '독고다이'란 필명으로 온라인에서 활동 중이었다. 화면의 귀퉁이 불투명한 부스 안에서 그는 노래를 불렀다. 평소에는 동굴저음이나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는 청아했다. 마치 숲 속의 폭포수 아래에 있는 듯, 청량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동안 대스타를 바로 옆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입을 벌린 홀린 유튜브 영상을 보던 얼굴로 선정후 대표의 손이 어른거렸다.


  "진혜원 기자, 넋이 나갔네요. 정신 차려요."


  "이런 분을 제가 몰라보았다니, 이런 분께 제가 토시오 닮았다고 했다니, 저 이제 어쩌죠? 이시후 님이 저를 미워하고 그러면 전 어떡하면 좋아요?"


  "이시후 사원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요.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돼요."


  "정말요? 다행이면서도 좀 슬프네요. 근데 이시후 님은 피플스에서 무슨 일을 하시나요?"


  "온라인 홍보를 맡고 있습니다. 이시후 사원이 읽는 책은 초판은 무조건 다 나갑니다.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죠."


  "그런 분이 왜 우리 피플스에 계시는 거죠?"


선정후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제 사촌 동생입니다. 둘 다 외동이고 유학 기간 내내 함께하며 형제처럼 지냈죠."   


나는 피플스에 세 번 반하고 말았다. 이시후 님이 나의 직장 동료라니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건배사의 마지막 차례였던 나는 이렇게 외쳤다.   

  

  "천상의 목소리, 오~ 독고다이를 찬양하라!"   




<에필로그>


혜원은 소주 네 병을 쉼 없이 마시고는 그대로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여자애가 조심성도 없이 술자리에서 쓰러지다니 화부터 났다. 일부러 안주가 맛있는 삼겹살집으로 회식 장소를 골랐는데, 혜원은 삼겹살은 한 점도 먹지 않고 파절이만 네 접시를 먹었다. 안주도 좀 먹으라고 몇 번이나 눈짓으로 삼겹살을 권하고, 혜원의 파절이 그릇 위로 삼겹살을 올려놓았지만 그녀는 초지일관 파만 골라 먹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부장 넷은 노래방으로 몰려갔다. 나는 대리 기사를 부르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혜원을 업었다. 대리 기사가 늦어지고 있었다. 혜원이 무어라 웅얼거렸다.


  "오빠, 나 차 타면 토할 거 같아. 걸어갈래. 집에 걸어서 갈래."


  "여기 종로야. 너희 집까지 걸어서 못 가. 밤새도록 걸어야 해."


  "그럼 밤새 걸어. 오빠, 걸어랏!"


혜원은 내 머리를 잡고는 "걸어랏!" 명령하곤 다시 잠들었다. 나는 걷기로 했다. 그래, 밤새 걷자. 걷다 보면 너네 집 도착하겠지. 뭘 먹고는 사는 건지 가볍기만 한 혜원의 무게에 마음이 저릿했다. 월급을 올려줘야 하나? 잘 좀 먹지. 이렇게 말라서야. 그간 이 몸으로 어떻게 을 썼던 건지 안쓰럽기만 했다.


  "혜원아, 잘 챙겨 먹어. 응?"


  "으음…, 냠냠."


입맛을 다시며 혜원이 답했다. 파절이에 소주만 마셨는데도 혜원에게선 싱그러운 풀 향기가 나니 나도 단단히 미친 것 같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지만, 등 뒤로 전해지는 그녀의 온기는 더없이 따뜻했다. 혜원과 함께라면 나는 지구 끝까지라도 걸어갈 수 있을 듯했다.       


   

https://youtu.be/vZYAUul6SF8?si=s6T3Mgirp472euJL

 너에게 모두 주고 싶어
너를 위하여
걸어서 저 하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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