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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란도란 Oct 08. 2024

사랑 : 나만의 우주를 지키는 것

<웹툰작가 연두이야기>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낙하한다.

지구는 태양으로 낙하하고 있지만
태양에 닿지 않는다.
인공위성은 지구로 낙하하고 있지만
바닥에 닿지 않는다.
태양은 우리은하 중심의 블랙홀을 향해
낙하하고 있지만 블랙홀에 닿지 않는다.

 - 김상욱 '떨림과 울림'에서


사랑도 서로를 끌어당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낙하한다.

당신이 잊지 말아야 할 것.

사랑은 두 세계가 하나로

일치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우주를 지키며

서로에게 닿지 않는 것.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다.


나만의 우주를 지켜낼 수 있을 때

사랑도 지킬 수 있다. 

 

<취재-진혜원 기자>

 



연두 작가가 돌아온다. 그는 3주 전 마케도니아로 돌연 출국했다. 인터뷰 하루 전날이었다. 어제 워크숍 중에 편집장에게 연락이 왔다. 내일 오전 7시 30분까지 인천 공항으로 가야 했다. 급하게 인터뷰를 잡았다. 시간이 빠듯했다. 가을 특집호의 원고 마감까지 겨우 5일 남았다. 


7월에 계약직 수습기자로 입사한 후 두 달간 마라토너 강유원 선수와 암벽 등반 손희우 선수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피플스 가을 특집호 <명사들의 실연 이야기>에 세 명의 기사를 실어야 했다. 연두 작가가 마케도니아로 떠나며 한 명이 비었다. 연두 작가의 인터뷰 기사는 결말을 맺지 못하고 그대로 둔 상태였다. 내일은 인터뷰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미노미노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니 밤 11시가 넘었다.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니 어서 자야 했지만 잠이 도통 오질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을 때부터 초록 병과의 조우가 간절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나의 초록 병, 소주는 금요일 원고 마감 후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병나발을 불어주겠다. 너저분한 마음에 소주는 독이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어린 시절의 미노미노 모습이 나타났다. 사랑은 타이밍이요, 용기가 필요함을 알면서도 어리석었다. 7년 전 그날 미노미노의 번호를 내가 먼저 물어봤어야 했다. 사진만 찍고 돌아서는 미노미노의 옷자락을 잡아야 했다. 어쩌면 나는 옷자락을 잡아야 할 만큼 미노미노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내가 그간 그리워 한 사람은 어린 시절의 미노미노였을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과 공간이 그리웠던 것인지도.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진혜원, 얼굴이 왜 그래?"


공항에서 내 몰골을 보자마자 편집장이 물었다.   


  "잠을 좀 설쳤습니다. 대표님."


  "호칭은 편집장으로 통일 하자. 둘이 있을 때는 말 놓지 그래?"


  "알겠습니다. 편집장님. 일하러 왔으니 깍듯하게 해야죠. 어디 일개 사원이 대표님께 말을 놓습니까?"


연두 작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가 아니었다. 한 여자와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이쪽으로 걸어왔다. 여자는 우리를 보더니 매우 반가워했다. 손을 들어 흔들기까지 했다. 상당한 미인이었다. 연두 작가의 그녀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녀는 달려와 편집장을 안았다.   


  "정후야, 잘 지냈어? 우리 얼마 만에 보는 거니."


편집장은 반가워 호들갑 떠는 그녀를 떼어내며 물었다.


  "누나는 늘 에너지가 넘쳐. 결혼식은 못 가서 미안해."


  "어머머,  없던 넉살이 생겼다야.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나 그때 결혼 안 했어.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


  "자세하고 길어질 그 이야기, 자리 옮겨서 하자. 여긴 피플스 진혜원 기자."


  "안녕하세요."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연두 작가의 그녀는 나를 보고 함박웃음을 짓고는 바로 안았다. 친화력 하나는 압도적인 그녀였다.


  "반가워요. 진혜원 기자. 어머나! 싱그러워. 사람이 어쩜 싱그러움이 폴폴 풍기지? 혜원 씨는 무협 좋아하려나?  갓장르인 무협의 무림 고수 작가 천무화영이라고 해요. '삼류무사 개망나니'를 연재 중이죠. 혹시 알아요?"


  "아, 죄송합니다. 무협 장르는 잘 모르지만 기회 되면 꼭 보겠습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이동하며 어마어마한 수다의 기운을 감지했다. 천무화영 작가, 연두 작가와 하루 종일 인터뷰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빡 왔다. 차 안에서 오디오는 전혀 비지 않았다. 두 작가는 내가 평생 만나본 사람들 중에 가장 말이 많았다. 인터뷰 시작도 전에 기가 쪽쪽 빨려나가는 것 같았다. 아침을 먹기 위해 들어간 식당에서 천무화영 작가가 말했다.     


  "제일 먹고 싶었던 게 해장국이었어요. 선지해장국. 고향의 진한 피 맛! 난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어요. 선지해장국 먹었으니까."


사람이 지극히 밝았다. 먹을 때는 그래도 좀 조용할까 싶었으나 천무화영 작가는 기인이었다. 펄펄 끓는 뚝배기의 선지를 입에 한가득 넣고도 말을 잘했다. 발음이 하나도 새지 않았다. 말하기 기술이 특출 났다. 옆에 있던 연두 작가가 말했다.


  "진혜원 기자님, 죄송합니다. 인터뷰 진행 중에 갑자기 마케도니아행,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오늘 제 연애 이야기 모조리 털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마감 전에 돌아오셨으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실연 이야기를 취재 중인데 두 분은 다시 만나시는 건가요?"


천무화영 작가가 질문이 끝나자마자 답했다. 


  "아니요. 저희는 실연 유보 중이에요."


  "유보 중이라는 건 어떤 의미죠?" 


  "말 그대로 실연을 잠시 뒤로 미룬다는 의미예요.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고 지켜낼 수 있을 때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특히 저요."


천무화영 작가가 답했다. 연두 작가의 지난 인터뷰가 떠올랐다. '더 이상 빙봉이 될 수 없어서 그녀와 헤어졌다'라고 그가 말했었다. 나의 세계를 잃고 사랑하는 이의 세계로 너무 깊숙이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나 자신을 지워가며 하는 사랑은 오래갈 수 없다고 말이다. 천무화영 작가가 이어 말했다.


  "졸업 앞두고 떠난 배낭여행에서 마지막이 마케도니아였거든요. 그곳의 오흐리드 호수를 연두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풍경이 굉장해요. 그렇게 투명한 호수는 처음 봤어요. 연두도 보면 좋아하겠다 싶어서 당장 오라고 연락했죠. 전 뭐든, 항상 그런 식이었어요."


당시에 연두 작가는 모 플랫폼의 공모전에서 입상 후, 막 연재를 시작한 신인 작가였다. 마감에 쫓기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마케도니아에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제가 좋아하는 걸 연두가 모두 같이 하길 원했어요. 그림, 게임, 식단 조절, 운동 다 같이 하고 싶었죠."


천무화영 작가는 연두 작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연두 작가가 이어 말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살도 많이 빠졌고 건강해졌어요. 순정만화 작가가 될 수 있었고요. 그런데 내가 정말 원하던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뒤따랐죠. 제 의지에서 시작한 일이 아니라 화영이가 하니 저도 함께한 거였거든요."


천무화영 작가는 연두 작가의 최신간 '연둣빛 바람'을 보고 고민 끝에 용기 내어 연락했단다. 작품에 실린 이야기의 일부가 둘의 실제 연애였고, 연두 작가의 마음이 그제야 보였다고 한다. 연두 작가는 천무화영 작가의 연락을 받자마자 항공권부터 알아보았다. 둘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천무화영 작가는 한 달 정도 국내에 머무른 뒤 다시 마케도니아로 출국할 계획이라 했다. 둘의 실연은 현재 유보 중이다.  




<에필로그>


  "7년 전, 향리골 추석 노래자랑에 왔었어?"


하루 종일 이어졌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혜원이 내게 물었다.


  "퇴근과 동시에 말 놓는구나. 갔었어. 향리골은 매년 갔어. 한국 들어올 때마다."


  "나 봤으면서 왜 아는 체를 안 했어?"


  "그때는 미노미노가 네 남자친구인 줄 오해도 했었고, 어린 시절 사고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어."


  "그 사고는 오빠 잘못이 아닌데, 왜?"


  "네가 아니라 내가 빨리 물에 뛰어들었어야 했다고 자책했지. 난 열세 살이었잖아."


  "열세 살도 똑같은 어린이야. 무모하게 뛰어든 나보다 어른들에게 알리러 간 오빠가 현명했던 거야. 오빠 덕분에 내가 산 거고. 여전히 자책하고 있는 건 아니지?"


  "응. 그러니 주말에 고백도 했겠지? 오늘은 두 번째 고백을 할까 하고."


  "고백이 너무 잦다. 무슨 이틀 간격으로 하냐."


  "그런가? 잊을만하면 할까?"


  "응. 주말쯤. 금요일 원고 마감인 건 안 잊었지?"


  "그럼. 마감은 지켜야지."


  "데려다줘서 고마워. 일에 집중합시다! 아자!"     


집에 들어간 혜원을 보고 차에서 내려 잠시 집 앞을 서성였다. 반달 옆에 유난히 빛을 내는 별이 보였다. 달만큼이나 밝은 빛을 내는 작은 별. 인터뷰 중 들었던 '유보'라는 말이 작은 별 끝에 걸렸다. 미루고 미루었던 마음들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조바심 뒤로 한 걸음만 물러나 있기로 했다. 때로는 차고 넘치는 사랑보다 조금 모자란 사랑이 낫기도 하니까.        


    

https://youtu.be/s9nIjoGJxys?si=jTzA6-uMvckJsYgl


결국 돌고 돌아 시간이 지나도

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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