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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란도란 Oct 01. 2024

 사랑 :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

<진혜원과 미노미노 이야기>


<프롤로그 - 진혜원 이야기>

숲은 내게 말했다.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이라고.

    - 셸리 리드 '흐르는 강물처럼'


어린 시절 나의 풍경에는 네가 있었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마루에 누워

저만치 떨어진 너의 집을 바라보았다.

마파람이 불어오면 논의 벼와 밭의 옥수수가  

쑥쑥 자라나기 시작했다.

너와 나의 사이, 벼와 옥수수가 야속하게 가르면

나는 논두렁길을 달려 너를 만나러 갔다.

논두렁길을 달리며 나의 시간은 흘렀고

너를 향한 마음은 시간의 층에 쌓였다.


모든 존재는 시간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다.

나를 만든 일부는 그 시절의 풍경과

그 풍경 속에 있던 너였다.

 

 UnsplashKiona



걸을 때마다 쿠킹 포일이 슥슥 소리를 냈다. 아주 불편했다. 이 상태로 춤은 무리였다. 쿠킹 포일과 랩으로 재현한 은색 부츠가 자칫 잘못하면 찢어질 것 같았다. 하체는 고정하고 상체만 움직이는 춤을 춰야 했다. 소찬휘의 'Tears'는 극강 고음이라 애초에 과도한 춤은 무리였다. 상체만 흐느적거리는 기이한 춤에 가창력으로 승부하기로 했다. 기이하며 웃긴데 노래는 잘하는 거다.


디지털부 이시후 사원과 편집장은 장기자랑 불참이었다. 나의 경쟁 상대는 부장 넷이었다. 마케팅부 현해탄, 기획부 박진감, 디자인부 고소리, 사진부 이정도다. 봉고에서 이들의 노래 실력은 모두 드러났다. 현해탄과 이정도, 이 둘은 나처럼 장기자랑에 사활을 걸었다. 장기자랑을 철저히 준비해 왔다. 반짝이 의상으로 무장한 현해탄과 장발 가발을 쓰고 기타를 멘 이정도. 나의 의상만 처절하고 궁핍했다. 나만 화려한 거지 같았다. 


나는 숙소의 모든 쿠킹 포일을 수거해 만든 은색 장도 두 개를 양손에 쥐고 무대 뒤에 대기했다. 전주가 흐르자 은색 장도를 휘두르며 등장했다. 부장 넷은 입을 쩍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이 곡의 클라이맥스인 "좌닌한~"을 외칠 때는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공이었다. 200이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나의 무대를 마지막으로 장기자랑은 끝났고 발표만 앞두고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빌었다. 


현해탄 부장이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장기자랑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던 이시후 사원이 어기적 거리며 나타났다. 밤에 보니 얼굴은 더 하얗고 더 토시오 같았다. 내 옆자리에 앉았을 때 또다시 흠칫 놀랐다. 트라우마 극복은 역시 쉽지 않았다. 편집장은 아까부터 쭉 보이지 않았다. 내 무대는 본 것일까. 봐서 정신 건강에 좋을 건 없으니 안 봐도 상관없지만 말이다. 


  "지금부터 대표님의 시상이 있겠습니다. 대표님이 곧 무대 위로 올라오실 예정이니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2024 신입사원 역량 강화 워크숍 장기자랑 1등!  두구두구두구두구두~ 바로~ 바로~ 편집부 진혜원 기자입니다."


나는 내 이름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해냈다. 200은 내 거다. 일어나며 한쪽 다리의 랩과 쿠킹 포일이 찢어졌다. 


  "대표님, 어서 무대 위로 올라오십시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보라색 세미 정장 재킷을 입은 선정후 편집장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대표님은 워크숍 불참인 듯했다. 선정후 편집장이 대리시상을 하러 나온 줄만 알았다. 


  "피플스 대표 겸 편집장 선정후입니다. 신입사원 역량 강화 워크숍에 전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일정도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대표님, 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바로 시상 진행하시죠."


  "진혜원 기자, 앞으로 나오세요."


선정후가 피플스의 대표였다. 두 달 동안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해줄 수가 있나 배신감마저 들었다. 나는 한쪽만 남은 은색 부츠와 다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은박 상의 차림으로 올라갔다. 한쪽 손에는 쿠킹 포일로 만든 장도도 들고 있었다. 내 모습을 본 선정후는 입꼬리가 실룩실룩거리는 게 웃음을 꾹 참고 있는 듯보였다. 내 꼴이 비록 우스웠으나 상금이 200이었다. 나는 돈을 모아야 했다. 돈을 악착같이 벌어야 소설을 다시 쓸 수 있다.    


  "진혜원 기자, 축하합니다. 현해탄 부장님, 이제 밝혀주세요. 오늘 무대의 정체."


선정후는 내게 꽃다발과 봉투를 건넸다. 봉투가 꽤 두툼했다. 두께만 봐선 200이 넘을 것 같았다. 손에 닿은 봉투의 두께감에 감동이 차올랐다. 현해탄 부장이 말했다. 


  "오늘 이 무대는 수습 기간을 마치고 정규직이 된 진혜원 기자를 위한 자리였습니다. 우리 피플스, 수습기자 시절이 힘들기로 업계에서 유명하지 않습니까. 진혜원 기자는 그간 잘 버틴 데다 성실하게 업무에 임해주었기에 이 자리를 빌려 상여금을 지급합니다."    


나는 선정후를 노려보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속속들이 알아갈수록 놀라운 회사였다. 상여금을 장기자랑을 통해 전달하다니. 오늘 나의 혼신을 다한 무대는 결국 나를 위한 축하 무대였다. 잘 버텨 낸 나 스스로를 칭찬했다. '진혜원, 수고 많았다.'  


오늘의 에피소드는 나중에 소설 쓸 때 반드시 써먹으리라 다짐했다. 연이어진 캠프파이어에선 술판과 춤판이 벌어졌다. 부장 넷은 또다시 선창과 후창, 합창을 하며 흥에 겨워 춤을 췄다. 부장 넷이 저렇게 친할 수도 있나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회사 분위기는 나름 훈훈하니 좋았다. 파하는 분위기가 됐을 때, 나는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숙소에 들어가 쉬려고 했는데 선정후가 따라왔다. 


  "노래 실력 여전해. 춤은 더 웃겼고. 너답다!" 


  "놀리는 거야? 피곤해. 난 먼저 들어간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옷 갈아입고 나와. 그 옷은 소리가 무섭다. 슥슥."


내 은갈치 의상을 쓱 보았다. 200을 벌기 위한 나의 전투복이었다. 나의 소중한 쿠킹 포일 은갈치 옷. 


  "대표인 걸 왜 말 안 했어?" 


  "작은 잡지사에서 직급이 뭐가 중요해? 중요하지 않으니까 얘기 안 했지. 삐졌어?"


  "이런 걸로 내가 왜 삐져. 미리 얘기해 줄 수도 있었잖아. 안 그렇습니까? 대표님?" 


  "네~ 네~ 죄송합니다. 어서 옷이나 갈아입고 나오시죠." 


  "대표님도 그 보라색 재킷 갈아입고 오세요. 안 어울립니다." 


그렇게 해서 우린 티셔츠 쪼가리만 입고 한밤중의 강변길을 걷게 된 것이다. 나는 그날 밤 선정후의 고백에 "잡지사보다 양계장이 더 좋다"라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날의 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믿는 건 사랑 앞에서는 진실된 선택과 행동만이 옳다는 것이다. 




<에필로그 - 진혜원과 미노미노 만나다>


워크숍을 마치고 가평에서 돌아온 일요일 오후, 미노미노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침 우리 집 근처라고 했다. 7년 만에 만나는 내 첫사랑이었다. 7년 전 향리골 추석 노래자랑에서 나는 꽃무늬 몸뻬 차림이었다.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폭탄 머리도 했었다. 머리에 헬맷이라도 쓴 듯 대두였다. 스무 살의 나는 미노미노 앞에서 한없이 창피했고 움츠러들어야만 했다. 


스물일곱의 나는 긴 생머리요, 하늘하늘한 원피스도 있고, 단정한 정장도 있고, 풋풋한 캐주얼도 있다. 지난번에 빌런 이민호를 퇴치하려고 지수에게 빌려온 메이크업 도구도 있었다. 문제는 화장을 잘 못한다는 데 있다. 서둘러 미용실에 가서 드라이도 하고 메이크업도 했다. 나는 오늘 미노미노에게 고백할 것이다. 


집 근처에서 가장 분위기 좋은 카페를 약속 장소로 골랐다. 그 카페의 조명 아래라면 고백은 문제없다. 1시간 일찍 가서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으며 조명발 제대로 받는 자리를 찾았다. 약속한 시간 정각에 미노미노가 나타났다. 여전히 하얀 피부에 눈꼬리가 처진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나를 보고 웃는 미노미노를 보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첫사랑은 세월이 흘러도 설렜다.  


미노미노와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부모님은 양계장을 접고 서울로 올라오셨다고 한다. 미노미노의 회사와 집이 우리집과 가까웠다.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있겠단 생각에 마음은 잔뜩 부풀어 올랐다. 그때 미노미노가 내게 하얀 리본이 달린 봉투를 건넸다. 고백 편지인가. 하얀 리본이 내게 말을 거는 같았다. 

'아니야. 고백 아니야. 후딱 열어 봐.' 나는 리본을 풀고 안에 있는 카드를 꺼냈다. 청첩장이었다. 


  장남 김민호


X노무시끼, 늦가을 배추 속에 들어앉은 배추벌레 같은 시끼, 잘 여문 옥수숫대 속에 처박아 버리고 싶은 시끼, 닭모가지 비틀 듯 모가지 잡고 싶은 시끼. 7년 만에 찾아와선 청첩장 주는 써글놈. 


청첩장을 쥔 손이 달달 떨렸다. 난 오늘 너한테 고백하려고 평소에 입지도 않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도 입었고 5만 원 주고 메이크업도 받았고 2만 원짜리 드라이도 했단 말이다. 내 첫사랑은 이렇게 떠나가는 것인가. 


  "아하하하하하, 축하해. 결혼 일찍 하네. 오래 만났어?" 


  "응. 7년. 대학 동기야. 아, 맞다! 넌 남자친구랑 잘 만나?" 


  "남자친구? 나 남자친구 없는데." 


  "헤어졌어? 옛날에 향리골 노래자랑에 네 남자친구 왔었잖아." 


  "무슨 소리야? 나 그때도 남자친구 없었어. 그날 네가 사진만 찍고 그냥 가버려서 얼마나 속상했다고."   


  "내 옆에 서 있던 남자, 줄곧 너만 봤어. 우리 사진 찍을 때도 내내 보고 있었고. 눈에서 레이저 쏘겠더라. 난 그 사람이 네 남자친구인 줄 알고 얼른 자리 비켜준 거야. 실은 나 그때 네 번호 물어보려고 했었거든." 


  "그렇구나. 번호를 물어보려고 했었구나. 그 남잔 대체 누굴까? 난 그날 너 말고 만난 사람이 없어." 


나의 첫사랑은 7년 전 그날 이미 어긋났다. 시간의 층 하나가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무대 아래서 나만 줄곧 보았다는 그 남자. 그 남자... 눈에서 레이저 쏜 그 남자. 설마, 선정후 너였냐!      


https://youtu.be/GJreCZ8ciTo?si=oZf2_rdafUGW7ddI


안녕, 
나의 첫사랑.

잘 가, 
미노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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