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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란도란 Sep 24. 2024

사랑의 물리학

<진혜원과 선정후 이야기>


<프롤로그 - 선정후 이야기>

그 아이가 말했다.
첫눈이 올 때까지 꽃물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햇살이 잘 드는 봉당에 앉아
해사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 아이의 해사한 웃음에
그만, 쿵!  
  
나는 그 해,
손톱이 자라질 않길 간절히 바랐다.
이윽고 첫눈이 내리던 날
손끝에 초승달처럼 남은 꽃물을 바라보며
쿵! 쿵!
내 심장은
달음박질했다.

첫사랑이었다.


오전 8시 종합상가 앞, 12인승 노란 봉고 안에 나는 앉아 있다. 전 직원이 신입사원 역량 강화 워크숍에 참석했다. 입사한 지 두 달이 넘는 동안 봉고 안에 있는 이들과 <피플스> 사무실에서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다. <피플스> 직원이 있긴 했다. 총 7명이었다.


봉고에선 자리 배치가 매우 중요하다. 운전석에 선정후 편집장, 그 바로 뒤에 편집장과 등을 마주하고 내가 앉았다. 나는 역방향이나 창가를 선택했다. 2열은 의자가 역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어 멀미하는 사람은 앉기 힘든 자리였다. 왠지 이 자리가 내 자리일 것 같았다. 나의 착각이었다. 자리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마케팅부 현해탄 부장이었다.


  "거긴 제 자리입니다! 오늘만 특별히 양보해 드리죠. 돌아올 때는 얄짤없습니다."


현해탄 부장은 2열, 내 바로 옆에 앉았다. 말이 많아 보였다. 3 열이자 내 정면 창가에 앉은 사람기획부 박진감 부장, 그 옆에는 디자인부 고소리 부장, 끝에는 사진부 이정도 부장이었다. 봉고의 운전석 뒤 2열과 3열은 부장들의 자리였던 것이다. 젠장, 잘못 앉았다. 회사 생활을 처음 해보니 이런 면에서 센스가 뒤떨어졌다.


4열과 5열로 이동하려 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이상했다. 아까 출발 전에 선정후 편집장이 전원 참석이라 했는데 부장만 넷이다. 편집장과 나, 또 다른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부장들과 함께 하는 신입사원 역량 강화 워크숍인가. 실은 멘탈 강화 워크숍일지도 모른다. 뒷자리로 이동하기 위해 일어서는데 현해탄 부장이 잡았다.


  "어디 가십니까?"


  "아하하, 여긴 제 자리가 아닌 듯하여 뒷자리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때 4열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토시오'였다. 일본 공포영화 <주온>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줄임말) 꼬마 귀신이다. 봉고에 귀신 탔다.


  "으악! 토시오예요. 토시오가 탔어요! 모두 내리세욧!"


나의 호들갑에 현해탄 부장이 팔을 잡더니 등을 토닥여 주었다.


  "진정하세요. 토시오 아닙니다. 디지털부 이시후 사원입니다."


덥수룩한 바가지 머리에 하얀 피부, 아이처럼 작은 머리, 검은 눈동자가 큰 눈, 그는 영락없는 토시오였다. 토시오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시후입니다."


외모와 다르게 목소리는 동굴 저음이었다. 고소리 부장이 말했다.


  "어려 보이지만 진혜원 씨보다 한 살 위예요. 입사도 먼저 했고요. 우리 피플스의 핵심 인력이자 보물입니다."


  "죄송합니다. 오해했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이시후 사원은 다시 모습을 감췄다. 나는 4열로는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나에겐 토시오 트라우마가 있다. 스무 살에 영화 <주온>을 본 뒤로 지난 7년 간, 곳곳에서 토시오의 환영을 보고 있다. 이 회사에 사원은 둘 뿐인 듯한데 이시후 사원과는 친해지기 영 글렀다. 대인 기피증이 있는 것인지 모습을 잘 드러내지도 않았다.


<피플스>에 기자는 나 혼자란 말인가. 그간 혼자 취재하러 다녔던 것인가. 회사의 직급 체계가 이상했다. 이 작은 잡지사에 부장만 넷이라니. 혼자 심각해져서 고민이 깊어졌다. 그때였다. 제일 진중해 보였던 박진감 부장이 입을 열었다.


  "잊~쥐는 마~"


봉고 안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뭘 잊지 말라는 걸까. 혹시 회사 사칙이나 이런 거 선창일까. 잠시의 침묵을 깨고 박진감 부장 옆에 앉은 고소리 부장이 말했다.


  "내 사랑을~ 너는 내 안에 있어."


고소리 부장 옆에 있던 이정도 부장도 연이어 말했다.  

  "길진 않을 거야. 슬픔이 가기까지 영~원히."


현해탄 부장이 "뮤직 큐!"라고 외쳤고 차 안에는 소찬휘의 'Tears' 전주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은 합창이 시작되었다. 이정도 부장은 자신의 백팩에서 오색찬란한 미러볼을 꺼냈다. 마치 1990년대 관광버스 분위기다. 이들은 일어날 수만 있다면 모두 일어나 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아무 일도 내겐 없는 거야
  처음부터 우린 모른 거야
  오~ 넌 그렇게 날 보내줄 수는 없겠니  


다시 집으로 보내주면 안 되는지 묻고 싶었다. 

아니면 이 기회에 토시오 트라우마나 극복해 볼까 심히 고민되었다. 가평으로 향하는 1시간 40분 내내 부장 넷은 오색찬란 미러볼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누군가 선창을 하면 옆에 사람이 다음 구절을 불렀고 마지막에 토시오 닮은 이시후 사원이 음원을 찾아 틀었다.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봉고 안에서 멘탈이 다 털린 기분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식사 후에는 바로 수상 레저 센터로 갔다. 그때부터 오후 내내 보트 타기의 연속이었다. 디스코 보트, 바나나 보트, 땅콩 보트를 3 연속으로 탔다. 신입사원 역량 강화 워크숍은 허울뿐이고 이들은 그냥 놀러 온 것이다. 밤에는 장기자랑과 캠프파이어가 이어졌다. 학교 다닐 때 수련회 같았다. 고소리 부장이 오후에 미리 알려 주었다. 장기자랑 상금이 파격적이었다.


  "혜원 씨, 오늘 밤 장기자랑 미리 준비하세요. 1등 하면 현금 200이에요."


내 월급이 180만 원인데 장기자랑 상금이 200만 원이었다. 장기자랑에 진심인 회사였다. 반드시 1등을 해야만 했다. 심사위원은 부장 네 명이었다. 나는 가평에 오는 동안 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모두 꿰뚫었다. 200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이들은 당시의 노래방 인기곡들을 아주 좋아했다. 나의 선택은 박진감 부장이 선창 했던 소찬휘의 'Tears'였다. 검색해 보니 2000년대 노래방에서 고음 양대 산맥인 곡이었다. 남자들에게 <She's gone>이 있다면 여자들에게는 <Tears>였단다. 고음 최고 레벨 곡에 도전하기로 했다.   


숙소의 주방에서 랩과 은색 쿠킹 포일을 챙겼다. 쿠킹 포일을 다리에 말고 그 위를 랩으로 감쌌다. 은색 부츠를 재현했다. 나는 은갈치 패션으로 무장했다. 가삿말처럼 잔인한 여자가 되기 위해 쿠킹 포일로 식칼 모양을 만들어 입에 물었다. 칼춤을 출 것이다. 가평 오는 길, 차 안의 열광적인 합창을 재현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목청이 연이은 고음에 버텨주는 것과 돌아이 기운이 뿜어져 나와 무대 위에서 날뛰는 것뿐이다. 200만 원은 내 거다.


https://youtu.be/3W2EnCe4mCw?si=8lju-8-__1MBKNy5





<에필로그>

    

여름의 끝자락, 강바람에 가을의 선선함이 실려왔다. 캠프파이어까지 마치고 늦은 시간, 선정후가 산책을 나가자고 했다. 얇디얇은 티셔츠 쪼가리에 선선한 바람이 무자비하게 훑고 지나갔다. 팔짱을 껴서 나 스스로를 안아 주었다. 선정후가 말했다.


  "우리 뒤로 걷자. 맞바람이다."


선정후도 얇은 티셔츠 쪼가리가 다였다. 애초에 나에게 벗어줄 옷 쪼가리가 없었다. 우린 뒤로 걸었다. 


  "내 첫사랑은 너야."


  "알아."


  "열세 살이었지. 지금 서른 하나. 지구상에서 내가 사랑한 인류는 너 하나야."


  "오~ 꽤 로맨틱해."


  "나랑 만나자. 남과 여로."


  "현재  삶에 남은 미노미노야. 답이 됐지?"


  "걔도 만나고 나도 만나."


  "싫어. 힘들어."


  "사랑은 원래 힘든 거야. 짊어져."


  "됐어. 그게 양다리야. 난 좋은 사람이야."


  "내가 별로인가?"


  "잡지사보다 양계장이 더 좋을 뿐이지."


  "그렇군. 내가 양계장을 하나 매입하면 되나?"


  "돈 많나 봐? 헛짓거리 말고 잡지사나 신경 써."


  "오늘 고백에선 것만 기억해. 나는 네가 너라서 좋아." 


  "응. 접수! 요만큼 설렘."


나는 엄지와 검지를 엇갈려 작은 하트를 만들었다. 선정후가 "풉!"하고 웃었다. 


  "춥다. 그만 들어가자."


선정후는 숙소로 들어가려는 내 손에 편지 하나를 쥐어줬다. 숙소에 들어와 편지를 펼치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잘 말린 보라색 제비꽃을 넣은 책갈피였다. 가지런한 글씨체로 적은 한 편의 시가 눈에 들어왔다.

김인육 시인의 <사랑의 물리학>이었다. 시를 읊다가 피식 웃음이 터졌다.

내 심장의 문에 콩, 콩콩!

자그마한 소리가 울린다.



사랑의 물리학
                                                     김인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Unsplash의 Casey Ho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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